Jingdezhen
11월 16, 2018中國 南方文化探訪 (3) – 징더전(景德鎭)
景德鎭
2008년 3월18일(화)
날씨가 흐리다.
08시50분, 직행버스는 경덕진을 향해 출발했다.
명색이 장거리 직행버스인데 너무 낡은 버스다.
6시간 정도 예정된 거리를 지방도로, 고속도로, 지방도로를 오르내리며 달린다.
수시로 세워 손님을 태우고 내려놓는다.
의자도 너무 딱딱하다.
14시20분, 경덕진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소형 택시 2대로 기차역으로 갔다. 11위안씩.
다음 코스는 무이산인데 직행 기차가 없다.
지도를 보고 응담 까지 기차로 가서 그곳에서 기차나 버스를 갈아타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응담행 기차표를 샀다. 10위안.
경덕진 부근에 陶土가 많아 한(漢) 때부터 도도자기를 굽기 시작하여 南朝의 진(陳) 때부터 도도자기를 본격적으로 생산하였고, 宋 때에 생긴 징더전요[景德鎭窯]에서 나는 도도자기는 공품(貢品)으로 유명하였다. 명(明)의 선덕연간(宣德年間)에 어요(御窯)가 건조되면서 도자기의 생산이 활발해졌는데, 주로 생활용품, 미술제품과 건축용품으로 유명하다.
현재 북방의 푸량[浮梁], 남쪽의 러핑[樂平] 등지에서 양질의 자토(瓷土)가 생산되고 부근에서 유유약의 원료도 산출되어 도자기 제작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주민은 대부분이 도자기생산에 종사하고 있으며 종래의 고급품 제작 외에 대량생산도 하고 있다.(두산백과)
기차역 바로 옆에 있는 호텔 京都大酒店. 110위안.
점심은 준비해 가지고 간 계란으로 때우고 택시(20위안)로 浮梁古城으로 갔다.
16시20분, 고성에 도착.
浮梁古縣衛는 唐(817년) 나라 때 세운 古縣衛로 縣署建物 몇 채와 西塔寺가 있던 자리에 千年紅塔, 千年瓷塼, 魁星閣 등이 남아 있고 그 주변에 城을 신축하고 상가와 숙소를 지어 관광지로 복원 개발 중이다.
옛 가마터도 주변의 파편들을 모아 쌓아 놓고 굴뚝을 도자기로 감싸 올려 볼거리를 만들었다.
호텔의 가로등과 전주도 원통형 도자기로 감싸 도자기 고장의 분위기를 한껏 조성해 놓았다.
현성 입구 광장에는 18세기 중엽 경덕진으로 들어왔던 네덜란드 무역선의 모형을 돌로 깎아 만들어 세워 놓았다.
부량 고현위 입구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북(신문고?)이 설치되어 있고 그 옆에는 무고나 지나친 송사를 엄벌한다는 경고문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得民하는 방도, 공정한 재판을 하는 정신 등 관료의 기본자세에 관한 방침 서가 있다.
현위 뒤 뜰에는 花聽이라고 해서 일하다가 잠시 쉴 수 있는 장소도 마련되어 있다.
초입에 패방을 만들고 입구에서 입장권을 판다.
초입에서 부량현성 입구까지 약 200m의 도로 중앙 분리대에 경덕진과 부량 고현위의 역사를 커다란 도자기 타일로 구워 깔았다.
중국인들은 아주 작은 문화재라도 복원해 관광 자원화 하는데 열의가 대단하다.
18시10분,
외진 시골에 있는 현위를 돌아보고 나오니 시간이 너무 늦어 공공버스가 끊긴 지 오래다.
지나가던 오토바이가 다가온다.
큰길까지 태워다 준단다.
한대에 2명씩, 1인 3위안, 버스값보다도 비싸다.
두 대로 큰길의 버스 정류장까지 나와서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18시30분, 버스로 호텔로.
부량 고성 입구 |
도자기 타일 분리대 |
분리대에 깔린 도자기 타일 |
부량 고성 – 새로 복원한 것 |
衛門前 投鼓 |
경고문 |
浮梁縣署 |
儀門 |
부량현서 관내도 |
親民堂 |
琴治堂 |
지침서 |
花廳 |
千年紅塔 |
魁星閣 |
호텔 정원에 잇는 도자기 가로등 |
네덜린드선 입항기록 |
네덜린드 무역선 모형 설치물 |
경덕진 시내 호텔 정문 옆에 있는 도자기 병 |
3월19일(수)
날씨가 흐리다.
경덕진에서 40여km 떨어져 있는 瑤里古鎭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100위안. 요리 입장료 98위안.
瑤里는 북송 말 休寧馬氏가 高령里 村에 정착했고, 남송 때 浮北汪氏들이 고령 外村에 정착했다.
이곳은 瑤江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이 있고 심심산골로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장소로 “桃花源”이라 불렸다. 瑤江 兩岸에 마을이 자리를 잡고 강에는 송어가 뛰놀고 있다.
이곳에서는 남송 때부터 바로 이웃 고령 마을에서 고령토 채굴이 시작되었고, 元代에 들어와 고령토와 일반 도자기 흙을 배합해서 고급 도자기 원료를 만드는 기술이 이곳에서 발명되어 경덕진 도자기 생산이 획기적으로 늘면서 세계 시장에서 명성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경덕진의 도자기 생산이 늘면서 고급 원료의 공급도 늘어나게 되자 기술자들이 몰려들면서 瑤里도 번창하게 되었다.
점심은 생닭을 잡아 백숙으로 삶고 생선조림으로 포식. 160위안.
마을입구 |
촌락발원 내력 |
강변마을 |
강 상류의 경치 |
외나무다리 |
마을의 고옥들 |
중국 공산당 진의(1901-1972) 원수의 집 |
敬義堂 |
뒷벽에는 중화민국 국기와 장개석 총통의 사진이 함께 붙어 있다.
程氏 宗 祠와 요리박물관 |
명대의 건축물 정씨 사당을 모신 집 |
건물 난간의 조각 |
문화혁명 지도자들 |
文化 大革명 당시 만행(?)을 도자기로 구워 전시하고 있다 |
문혁 만행 |
절인 채소 말리기 |
염장한 채소를 썰어 말려 저장한다 |
돼지고기와 생선도 소금에 절여 말린다 |
마을회관 |
강물에서 노니는 물고기 |
경덕진 도자기 소품 |
명나라 때 주택가 |
점심 때 골목 풍경 |
쓰레기 수거 |
이른 아침에는 채소 등을 씻고 다음에 빨래한다.
15시30분에 경덕진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있다. 11위안.
호텔에 도착해서 버스 東 점으로 가 보니 09시18분에 무이산으로 직행하는 버스가 있다고 해서 기차표를 물리고 버스표 확보. 70위안.
경덕진 시내와 외곽에는 도자기 역사박물관, 도자관, 古窯瓷廠,
湖田窯址陳列觀 등이 있다.
*.景德鎭 陶瓷器 이야기.(퍼옴)
여행 가기 전 자료를 모으다가 하늘바다님의 블로그에서 도자기에 대한 다양한 자료가 있는 것을 보고 제 여행 기록에 퍼왔습니다.
경덕진이란 명칭이 도자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송나라때 진종황제가 경덕진의 도자기 가마들을 어요로 지정, 도자기에 진종 황제의 연호인 경덕을 새기도록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원나라 때 황실용품을 생산하면서 경덕진은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했고, 명나라, 청나라 때에는 ‘어기창’으로 이어졌다 합니다…
명나라 선덕 8년에 황실을 위해서 많은 자기를 구워냅니다.
북경의 명 13 능 중 만력황제의 무덤인 정릉의 지하궁전 안에 있는 세 개의 청화 대룡 항아리도 경덕진 어기창에서 구워낸 것이라 하고, 사천성 아미산의 보국 사에 있는 대형자기 불도 경덕진에서 구워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도자기 중 경덕진 도자기가 으뜸인 것은 바로 고령토 때문이라 합니다… 자석, 점토와 함께 도자기 원료인 고령토는 경덕진에서 40여km 떨어진 고령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흙질이 조각하기에 좋고 철 함유량이 적어 도자기 원료 흙 중 최고라고 합니다.
옛날 실크로드를 넘어 중국에 온 서역의 장사꾼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전혀 새로운 자기를 쓰고 있는 중국의 그릇에 눈독을 들입니다.
그리고 중국 도자기들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옮겨집니다.
경덕진에서 활발했던 도자기의 기술은 고려로 전해지게 되는데. 정확히 어떤 경로로 어떻게 전해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고려의 도자기 수요욕구에 여러 경로로 중국에서 온 자기장들과 고려의 자기장들은 자기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 ‘도공’이라는 말은 일본식이라 ‘자기장’으로….. ]
한국 여기저기서 발견된 가마터에서 자기 굽기에 실패한 퇴적층을 만날 수 있습니다.
11세기 전반쯤에 청자,백자가 모두 만들어집니다.
중국이 독점했던 자기의 기술이 한반도로 전해진 것입니다.
세계에서 도자기를 구워낼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고려 오직 이 두 나라 였습니다.
오히려 고려청자는 중국의 도자기를 능가하는 비취색의 보물이 됩니다.
1123년 고려의 수도 개경을 방문했던 북송의 화가 서긍은 훗날 그의 여행기 [고려도경]에서 고려청자의 비색을 최고라고 말합니다.
남송시대 태평 노인이 작성한 골동품 수집목록 [수중금]에는 청자의 으뜸은 고려청자라고 말합니다.
1290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 출신의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을 통해 동양의 신비를 유럽에 전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유럽인들은 동방의 천국을 찾아서 죽음을 무릅쓴 머나먼 항해를 시작합니다.
1499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가마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합니다. 후추를 찾아왔던 그는 돌아가는 함선에 청화백자를 싣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유럽의 황실들은 중국의 도자기에 열광합니다.
중국의 도자기들은 유럽에서 비싼 값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청화접시 하나에 쌀 66가마와 바꾸었다 합니다.
유럽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중국에 이어 일본이란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기 미개한 섬에 조총이라는 총을 팔게 됩니다.
주로 일본의 은제품과 총을 바꾸어 갑니다.
그러는 사이 일본 전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하게 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자기장을 잡아오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나 다완 전쟁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전혀 생산하지 못했던 일본이 이 전쟁으로 조선의 자기장들을 잡아와, 세계에서 3번째로 자기를 생산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생각이 났습니다.
공포정치를 베풀었던 청나라 옹정제가 영문 없이 급사를 합니다. 맹독에 의해서 즉사한 걸로 소문이 납니다… 가장 유력한 사인은… 옹정제의 어용 도자기에 독약을 비장 시킨 맹독이라는 것입니다.
이 음모의 현장이 황제의 어용 도자기를 만드는 경덕진으로 드러납니다.
이 경덕진에 도자기 그림을 그리는 여사랑 이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그의 할아버지인 주자학자 여유량의 저서에 옹정제의 비위를 건드리는 대목이 있어…. 무덤을 파 목을 자르고… 그녀의 아버지 여의중을 비롯해 제자들까지 참형에 처했으며 손자들은 뿔뿔이 유형으로 일가 멸족을 당했습니다.
원한 속에서 앙심을 품고 자란 손녀 여사랑이 복수 수단으로 온갖 고생 끝에 황제가 입에 대는 그릇에 그림을 그리는 화장으로 일하는 데 성공하고 그리고 어용 찻잔 가장자리에 그림을 그리면서 열이 여러 번 닿으면 녹아 흐르게끔 맹독을 비장 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옹정제가 죽었다고도 합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경덕진은 한동안 폐쇄되기도 합니다…
윽… 여사랑인가 ????
특히 조선의 자기장 중….
이삼평(李參平)은 일본 남단 규슈의 사가 현의 아리타에서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흙을 찾아내고, 가마를 만들어 자기를 생산해 내기 시작합니다.
이때가 1616년이였습니다… 이삼평은 일본 자기의 시조가 됩니다.
이삼평이 일본에서 거쳐 간 곳은 국가급 사적이 되고… 비석이 세워지고… 현재 일본에서 도자기 신으로서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일본의 아리타 사람들은 이삼평 도자기 신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한국의 충남 공주에 비석을 세우기도 합니다.
일본은 이 도자기로 말미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지금 일본이 세계 기술대국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임진왜란으로 강탈해간 우리의 도자기 기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도자기뿐만 아니라 인쇄기술 의학기술(동의보감)등 여러 가지를 강탈해가지만 특히 도자기는 이런 기술 중에서 최고의 기술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임진왜란이 끝나고 우리나라 도자기의 기술은 씨가 말라버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 연간에 궁중에서 연례(宴禮)때 사용할 청화백자항아리가 없어서 전국에 수배하여 이를 구하고자 한 것을 보면 도자기 생산 후유증이 심각했으며 도자기의 양대 주류였던 분청사기는 이후에 생산되지 않고 소멸하여 버립니다.
다시 중국으로 가서 보면 중국의 도자기는 유럽에서 계속 인기를 구사합니다.
16,17세기 유럽에서 중국 경덕진도자기는 부와 권위의 상징이였습니다.
유리그릇이나 은그릇으로 밥을 먹는 것과 도자기 그릇으로 밥을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것입니다.
그러니 유럽에서 생산이 안 되는 중국 도자기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광적으로 중국 도자기를 수집하는 유럽황실도 있었습니다.
물론 어떻게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지 ?
유럽인들도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무지 노력을 하지만 실패만 거듭합니다.
여기서 중국이 이 첨단기술을 잘 활용했어야 했는데.
역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1644년 명나라는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섭니다.
한족이 아닌 만주족들이 중국을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중국 한족들은 가슴에 한을 품고 이리저리 흩어지고 나라는 어수선해지면서 화려했던 경덕진 도자기는 생산이 중단됩니다.
유럽의 상인들이 머나먼 항해 끝에 도착한 중국에서 도자기를 사가지고 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그들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에서 자기가 생산되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유럽의 상인들은 배를 일본으로 돌립니다.
일본에서 생산된 도자기들이 갑자기 유럽에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당시 중동지방에서 유럽에 전래된 커피와 더불어 도자기 시장의 확대를 불러옵니다.
일본 아리타 도자기는 날개 단 듯 유럽에서 퍼져 나갑니다.
처음에는 조선의 풍과 중국 경덕진 도자기 풍이 많았지만 차츰 일본 생활 풍속으로 도자기를 발전해 나가며 일본 특유의 자기를 만들어 냅니다.
이로써 일본 에도시대 부국강병의 날개는 도자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동양 도자기의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독일의 작센 왕 아우구스트는 자신의 군사 600명을 베를린 왕이 가진 동양 도자기 127점과 맞바꿨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수집되었던 중국과 일본 도자기들은 현재까지도 유럽의 각종 미술관과 박물관에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청나라 시기.
다시 경덕진에서 자기는 생산되고…. 일본 아리타 도자기와 함께 유럽에서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게 됩니다.
유럽에 커피가 전래되면서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자기가 보편화 되기 시작합니다… 이로서 자기 시장은 급속히 확장되어 갔고 중국 경덕진 도자기와 일본의 아리타 도자기는 유럽시장 선점을 위해 치열한 도자기 전쟁이 일어납니다.
1709년 독일 남부도시 마이센에서 확장일로 있던 중국도자기와 일본도자기에 쐐기를 박는 일대 전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작센왕국 황제 아우구투스는 연금술사 뵈트거와 화학자 치른하우를 감금하고 자기 개발을 명령합니다… 이들은 3년간에 걸쳐 수 만 번의 실험 끝에 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중국 경덕진에 종교 전파도 할 겸 독일의 한 신부가 30여 년간 경덕진마을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조국을 위해 경덕진 도자기 만드는 기술을 낱낱이 기술하여 조국에 계속 편지를 띄웁니다.
독일 마이센에서는 편지내용 그대로 실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가마 마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불을 때기만 하면 가마가 폭발했다고 합니다. 1200도 이상 불을 올려야 하는데 가마가 이를 견디지 못했던 겁니다.
그 독일 선교사는 환장할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데 바로 그 이유는 가마 벽돌, 그리고 벽돌 위에 덮는 흙에 볏짚을 넣는다는 것이 누락되었던 것입니다.
1200도 이상 고열이 되면 가마 불에 의해서 공기가 팽창되어 고압이 됩니다. 이 고압을 견디는 힘은 가마 만들 때 썩힌 볏집이 완충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1000여 년간 도자기 기술을 독점했던 중국
임진왜란 이후 급속한 도자기 발전을 이루었던 일본…..
독일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도자기는 급속하게 유럽으로 확산되는데… 그 이유는…. 아우구스토 황제의 특별관리대상이었던 자기장인 흉거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덴마크,러시아로 건너가면서 비법을 누설하였습니다. 바로 산업스파이로 인하여 순식간에 유럽 전역에서 도자기 생산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유럽의 도자기는 기술개발을 통하여 동양의 도자기를 능가합니다.
오랜 역사 안에서 과학기술의 꽃을 피웠던 중국 경덕진 도자기.
임진왜란 후 도자기를 생산해 유럽에 팔아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던 일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었던 한국.
그러나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세계화를 바라만 보아야 했던….
아니, 이런 역사적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암담한 세월….
도자기역사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우리의 것을 빨리 세계화하지 못했다는 것이 한없이 안타까웠지만….
이제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집니다.
과거 도자기와 같은 기술이 현대에는 널려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과거 도자기 기술과 같은 현대의 기술들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 서방이 챙기는일이…. 아니…
죽쒀서 개에게 주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출처] 경덕진에서…|작성자 하늘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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