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oxing

11월 16, 2018

中國 南方文化探訪 (2) – 샤오싱(紹興), 진화(金華)



紹興


2008년 3월14일(금)

날씨가 맑다.
08시30분, , 넷이서 물만두 두그릇, 만두 두판, 계란 다섯 개로 아침 식사. 23위안.
09시30분 이층 버스를 타고 닝보(영파)를 출발.
4차선 고속도로를 달려 1시간40분 만인 11시에 샤오싱(紹興) 동역에 도착.
一日遊 130-170위안 광고물.

택시(12위안) 타고 버스 남점,
시내 중심가 시청 근처, 위치가 좋다.百貨嬪觀, 100위안.
12시, 소흥주 4위안, 포도주 30.5위안, 맥주 3.5위안x6, 콜라 1,9위안. 쇼핑.

13시. 걸어서 시청을 지나 府山공원 쪽으로 가다가 샤오싱(紹興) 최고의 호텔 紹興飯店에서 점심. 臭豆腐 등. 110위안.
내부 정원 멋지고 금으로 도금한 식기.

13시40분, 호텔 뒷문으로 나와 府山공원으로.
飛翼樓, 8위안. 越王 臺, 越王 殿.
소흥은 춘추시대 월나라의 도읍.
도시 전체가 월왕 구천의 흔적을 보여주는 기념물 일색.

샤오싱은 BC 5세기경 강남 일대의 패권을 겨루던 월나라와 오나라 중 월나라의 도읍지였다.

이 두 나라가 얼마나 지독하게 싸웠던지 후세의 전략가 孫子도 “吳越同舟”라는 비유를 들며 전략을 설명했을까?

오나라와 월나라는 영원한 원수지간이다.
오나라 합려가 월나라를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은 후유증으로 죽으면서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월나라 구천은 책사 범려의 만류를 듣지 않고 부차가 힘을 기르기 전에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하고 회계 산으로 도망쳐 마지막 항전을 했으나 결국 항복하고 만다.
이를 “회계산의 치욕”이라고 한다..

그 후,
구천과 범려는 오나라에 포로가 되어 왕후는 부차의 첩이 되고 범려와 구천은 짐승취급을 받으면 3년을 종살이하다가 평생 신하로 살 것을 약속하고 구사일생 살아 돌아온다.

고향에 돌아온 구천은 범려의 계책을 들어 22년간 부국강병책을 쓰는 한편 “서시”라는 미인을 길러 오나라 부차에게 상납하는 등 수많은 노력 끝에 오나라를 공격해서 우여곡절 끝에 오나라를 멸망시켜 회계산의 치욕을 씻는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고사성어가 “臥薪嘗膽”이다.
이러한 역사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 샤오싱에서도 府山公園에 모여 있다.

16시 魯迅古里, 沈園으로 갔으나 시간이 없어 다음날로 미루고 택시로 호텔로.

19시30분,
咸亨酒店으로.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루쉰의 단편집에 실려 있는 “孔乙記”에 나오는 주점.
그 덕에 지금도 성업 중이다.

루쉰고리에서 “沈園”으로 가는 큰길 왼쪽.
민물 간장게장, 취두부, 醉鷄, 돼지고기요리,대폿잔으로 紹興加飯酒 , 땅콩 등등으로 저녁 식사. 165위안.
관광 온 젊은이들이 대부분.
紹興酒는 黃酒(증류하지 않은 곡주)로 중국 8대 명주



샤오싱 시내를 따라 이리저리 흐르는 운하.
발로 노를 젓는 배.
소흥은 절강성의 베니스라고 불린다.
시청을 지나 샤오싱 반점으로 가는 길을 따라 흐르는 운하


발로 젓는 배를 타고 시내를 돌아볼 수 있다.

샤오싱 반점의 금으로 도금한 수저
 샤오싱 최고급 호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옛날에는 개인 저택이었으니 지금은 호텔로 고처서 최고급 손님을 받는다.
정원과 연못 건물들이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



飛翼樓 안내 간판
 越王 句踐은 府山 정상에 오나라를 향해 望臺를 짓고 오나라에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飛翼樓

越王殿

월왕전 벽화
 월왕 구천이 장작더미 위에 앉아 있고 좌우로는 군사를 조련하는 모습, 아래에는 열심히 농사짓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하는 모습이다.

古事에는 오왕 합려가 월왕 구천에 패해 죽으면서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부탁했다.
오왕 부차가 장작더미 위에서 자면서 월왕 구천에 대한 복수를 잊지 않으려고 했단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와의 전투에서 회계산에서 포위당하자 항복하고 어렵사리 풀려난 후 곰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맹세했다고 한다.

그 후 재상 범려의 진언에 따라 부국강병책을 쓰면서 미인 서시를 오왕 합려에게 바쳐 미인계로 오나라를 어지럽히고 오자서와 오왕 부차 사이에 틈새가 생긴 틈을 노려 오나라를 침공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래서 생겨난 고사성어가 臥薪嘗膽이다.



월왕전 지붕 장식

傾國之色 서시

咸亨酒店

咸亨酒店
 루쉰의 “孔乙記”에 나오는 주점.
지금도 성업 중이고 관광객들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찾는다.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다.
민물게장, 醉鷄, 돼지고기, 臭豆腐, 紹興加飯酒, 땅콩 등으로
저녁을 즐겼다.



3월15일(토)

날씨가 좋다.
08시20분 버스 02번(1위안) 타고 大禹릉으로.
08시45분에 도착해서 구내는 셔틀버스.
會계山 기슭에 조성된 능묘 경내에 많은 조각품이 세워져 있고 조경이 잘되어 있다. 대대적으로 보수 중.
10시, 택시로 東湖. 13위안. 호수 유람, 왕복 180위안.
많이 비싸다.
11시, 택시로 沈園,
13시, 루쉰 고리(魯迅古里),
15시30분 택시로 蘭亭. 35위안,
16시30분, 자가용 택시(40위안)로 周恩來 祖居.
17시, 기차서점으로 가서 金華行 버스표, 56위안.

大禹陵을 포함해서 소흥 시내 관광지 종합 입장권이 145위안이다.
버스를 타고 대우릉으로 갔다. 경내는 셔틀버스가 다닌다.
광장에 석조물 조각 등 조경이 잘 되어 있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비각이 있고 그 왼쪽으로 가면 禹廟가 있다.

禹임금은 舜임금 시절 치수의 명을 받고 십수 년을 노력한 끝에 황허 강의 물줄기를 잡아 황허의 홍수를 다스린 공로로 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고 순임금의 두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요임금 때 부터 우임금 때까지 선양에 의해 현명한 사람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렸단다.

우임금은 나라가 태평하지만 각 지방을 巡行하면서 나라를 돌보던 중 이곳 소흥의 회계산 밑에서 병으로 죽는다.
그래서 우임금의 묘가 회계산에 있게 되었다.

우임금도 왕위를 선양하려 했으나 부름을 받은 사람이 사양했고 족장들이 우임금의 아들 “啓”를 추대하여 왕위를 계승시키게 되어 이때부터 세습제 왕권이 생겨났고 나라 이름을 “하”라고 하였단다.




비석
 비석 뒤편 위로 올라가면 우릉이 있다.


禹廟
 대대적으로 수리 중이다.
지붕 용마루에는 청나라 강희제가 쓴 “地平天成”이라는 글자가 있고
대전 앞에는 청의 건륭제가 쓴 글을 새겨 세운 비각이 있다.
이 우묘는 진시황이 순행 중 들러 우임금에게 제사를 지낸 흔적도 있다.

우임금은 치수를 잘한 공로로 순임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하나라를 세운 임금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임금 이후부터 중국왕조의 선양 관습이 없어지고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세습왕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大殿 앞 御碑亭
 건륭제가 쓴 글씨를 새긴 비석이 비각 안에 있다.


東湖의 유람선
 발로 노를 젓는 배를 타고 동호를 한 바퀴 도는데 180위안이다.
편도만도 탈 수 있다.
걸어서 호수를 돌아볼 수도 있다(1시간이면 돌아 나올 수있다)



石壁
 東湖는 원래 靑石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바위산이었는데 漢나라 때부터 채석이 계속돼 기암절벽이 만들어졌다. 청나라 말기에 제방을 쌓고 물을 끌어들여 호수를 만들어 공원을 만들었다.




沈園
 심원은 송나라 때 心氏家의 개인 정원.
8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詩境園 표지석이 서 있고 그 안쪽으로 아름다운 정원에 연못과 정자, 돌다리, 詩碑가 늘어서 있다.




심원의 경치

육遊 동상
 남송(1125-1200) 때 詩人.
금나라에 철저히 저항하자고 주장한 애국시인이다.




唐碗의 詩가 석벽에 새겨져 있다.
 가이드가 가장 오래 설명하는 장소.
당완은 육유의 외사촌.
육유가 무척 좋아해 결혼하지만 시어머니 등쌀에 이혼한다.
10년 뒤 육유는 당완을 이 정원에서 다시 만나고 이별의 아픔을 “채두봉”이라는 詩로 읊는다.
당완도 “채두봉에 부쳐”라는 화답 시를 쓰고 얼마 후 죽었다는 애틋한 사연이 이 정원에 관광 온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로 인기가 있기 때문인가 보다.
당완의 시를 음미해 보시기를.


루쉰(魯迅)故里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루쉰祖居, 루쉰故居, 루쉰 기념관, 삼미서실(루쉰이 다닌 서당) 등이 있다.


루쉰祖居

루쉰기념관

루쉰은 필명이 수십개였단다.


루쉰의 본명은 周樹人이다.
수십 개의 필명으로 청나라 말기 정부를 비판하고 중국인들의 의식개혁에 정열을 쏟은 문학가요 혁명가이다.

“아Q정전”, “狂人日記”, “孔乙記” 등은 한때 우리에게도 널리 읽히던 작품들이다.
소흥의 유력한 집안의 맏이로 동경에 유학해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와 국민 계몽에 심혈을 기울였다.



周恩來 祖居
 소흥에는 루쉰(周樹人) 집안과 또 하나의 명문가인 周恩來 집안도 있다.


 소흥 시내에서 남서쪽 12km에 있다.
춘추 시대 월왕 구천이 蘭을 심었던 곳


蘭亭
 황희지와 그 아들 왕헌지의 합작이란다.
“鵝”(거위 아)字는 왕희지가 쓰고 “池”字는 왕헌지가 쓴 작품이란다.


流觴曲水.(曲水流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아래에서 받아 마시게 되어 있다

流觴曲水.(曲水流觴)
 왕희지가 친구들과 모여 술잔을 돌리며 詩會를 열던 곳.
위에서 술잔을 흘려 7-8m 거리를 내려오는 동안 시를 한 수씩 짓기로 하며 詩會를 열었단다.
이때 지어진 시는 “蘭亭集序”라는 시집에 담겨 편찬되었다.



유상곡수 시회 풍경을 그린 부채


어비정
 王羲之는 東晉(307-365) 때 사람이다.
楷書(또박또박 획을 구분해서 쓰는 서체), 行書(해서를 약간 기우려 쓰는 서체), 草書(빠르게 흘리듯이 쓰는 서체)에 통달했던 서예가.
관직에 나갔을 때에도 중앙의 요직보다는 지방의 한직을 선택해 평생을 詩想을 쫓아 아름다운 산수를 즐겼단다.

왕희지는 당시 여류 서예가 衛夫人에게서 서체를 배웠으나 지방 곳곳의 묘비를 연구해 가면서 자신만의 서체를 완성했단다.

샤오싱은 아름답고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도시다.
사방으로 연결되는 시내 운하는 유구한 세월을 거쳐 완성되었고 도시의 분위기를 한층 더 아름답고 편안하게 해 준다.

이미 춘추시대(기원전 5-6세기?)) 월나라가 이 곳에 도읍을 정했고 월왕 구천은 춘추 5覇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루쉰 집안이나 조우언라이 집안 같은 명문 가문들이 대를 이어 살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약주와 비슷한 주조방식의 황주 샤오싱 주는 중국 8대 명주중 하나인데 전통이 있는 가문의 가양주를 연상시킨다.



3월16일(일)

아름다운 샤오싱을 떠난다.
08시에 호텔에서 나와 란주 우육면과 죽으로 아침 식사.
08시50분 진화(金華)行 직행버스 출발.
11시20분, 2시간30분 만에 금화서점에 도착.
12시, 터미널 부근에 KAI DI YA 대주점. 150위안. 깨끗한 호텔이다.
13시50분 택시로 蘭溪市 諸葛八卦村으로. 110위안.
14시30분 도착. 입장료 58위안.
17시20분 버스로 란계시 까지 4위안.
17시50분 금화행 버스. 10위안.
경덕진행 버스표 구매. 95위안.
19시, 호텔에 붙어 있는 식당 “金海魚港”에서 만찬. 197위안.

金華는 경덕진을 가는 길목이라서 들려 가기로 했다.
또 금화에서 조금 떨어져서 蘭溪市에 3,000여 명의 주민 중에 2,500여 명이 諸葛亮의 후손들이 사는 제갈팔괘촌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금화에서 택시로 40여 분.
란계시 외곽에 원나라 때(1280년) 제갈량의 후손들이 대거 이주해서 팔괘를 응용해 만든 마을이 있다.

자그마한 동산과 고지대가 둘러쳐진 마을 중앙에 연못을 만들어 그 둘레에 모여 사는 곳을 찾아갔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연못은 태극모양의 반에는 물이 차고 나머지는 맨땅인데 위에서 보면 태극모양이 된다.

연못을 중심으로 저자가 둘러서 있고 한쪽에는 大 公堂이 있어 마을의 대소사(회의실, 강학당 등)를 의논하는 장소로 쓰인다. 동산 위에는 천일 각이 있어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연못을 중심으로 해서 8개의 길이 방사선으로 벋어 나가 자연히 집들을 8쪽으로 나눈다.
이래서 8괘촌이라고 부른다.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미로처럼 방향을 잘 알아보기 어렵게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외부의 침입에 대비한 설계임을 알 수 있겠다.

마을에는 明, 淸代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200여 채가 남아 있다.
아직 관광객이 많지 않고 주민 생활 위주의 형태가 유지되고 있어 예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제갈팔괘촌 입구

팔괘촌 들어가는 길

마을 한가운데 벽에 그려 있는 팔괘

승상 사당

大共堂

제갈무후 상

대공당 안의 기둥 조각
 700년이 넘는 건물이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은 天一閣



연못을 중앙에두고 여덟구획으로 갈라 형성된 마을




저자거리
 연못을 둘러싸고 각종 가게가 들어서 있다.
원래 제갈량이 살던 융중은 후베이 성 한가운데 산중의 마을이다.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제갈의 27대손이 주축이 되어 식솔을 이끌고 집단으로 절강성 란계 城 부근의 평야 지대로 이주해 와 외부의 공격에 대비해 8 괘를 본떠 마을을 형성하고 700여 년을 살아오고 있다.

제갈량의 48대손으로 77세 된 분이 글씨를 써서 팔고 있다.
함께 간 친구가 제갈량의 출사표를 한 장 샀다.



3월17일(월)

08시10분 택시로 쌍용풍경구로. 50위안.
08시40분, 풍경구에(입장료 56위안) 도착해 경내에서 미니버스(1대 20위안)로 도원동 입구까지 올라가서 도원동 동굴, 쌍용동 동굴, 금화관을 거쳐 내려오게 되어 있다.

쌍용동은 배에 누워서 바위 밑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고 동굴 안에는 氷臺洞이라는 폭포가 있어 이채롭다. 도교사원 金華觀은 赤松子가 羽化登仙한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10시30분, 미니버스를 전세(40위안)해서 太平天國 侍王府로.
입장료 16위안.

태평천국은 청나라 말기 1851년 홍수전과 농민이 난을 일으켜 세운 나라로 14년간 유지됐었다.

태평천국은 수도를 천경(남경)에 정했으나 제2인자 이세현이 금화에 시왕부를 설치하고 있었다.
홍수전이 남경에서 죽고 나서 제2인자였던 이세현이 총사령관이 되어 이곳을 사령부로 썼다.

시왕부를 나와 아래로 내려오면 우측에 골동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八永老街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중간에 江이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남북조시대(440년경) 세워진 八永樓가 멋진 자태로 서 있다.
南宋 때 시인 육유를 비롯해 유명한 시인 묵객들이 다녀간 기록이 여러 군데 보인다.

天寧寺는 廢寺



侍王府


태평천국 天王 홍수전 상

2대 侍王 이형세 像

팔영가 누각


팔영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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