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gding earth building

11월 16, 2018

中國南方文化探訪 (6) – 융띵투로(永定土樓)



융띵투러(永定土樓)를 찾아 나섰다.
샤먼(廈門)에서 서쪽 내륙으로 약 150km.

08시50분 버스를 탔다. 고속도로를 달린다.
지방도로로 내려섰다.
대나무가 우거진 산간 경치가 그만이다.
그런데 칼로 벤 듯 잘려 나간 대나무가 많다.
얼마 전 태풍에 잘린 것이란다.
위력이 대단한 태풍이었나 보다.
永定에 가까워지면서 간간이 토루가 보인다.

13시20분 영정(永定)에 도착했다.
시내에 반듯한 호텔이 없는 아주 작은 시골 동네다.
택시도 보이지 않는다. 오토메틱 릭샤가 대중교통이다. 1위안.
티코만 한 낡은 자가용이 하루에 300위안을 달란다.

호텔 옆에서 장사하는 젊은이가 호텔 프런트 아가씨에게 통역해 주어서 깨끗한 자가용을 하루 빌렸다.
세 곳을 들러보기로 하고 280위안.

호텔 옆에서 장례행사가 요란하다.
밴드가(징, 날라리. 북) 요란하게 연주하고 문상 온 손님들에게 음식과 茶를 대접한다. 술은 보이지 않는다.
밤새 폭죽을 터뜨린다.
103세 되신 분이 돌아가셨단다.

08시30분, 중형승용차 새 차가 왔다.
振福樓가 있는 마을까지 1시간. 입장료 40위안


진복루
 3층 토루인데 맨 위층에만 창문이 있다.


辰福樓

진복루 소개

진복루 내부 사당
 정문으로 들어서면 전면에 있다.


外環樓
 토루들은 두 겹 또는 세 겹으로 건물을 짓는다.


진복루는 3층이다.

토루 안에 正東과 正西에 우물이 있다.
 팔괘의 원리에 따라 토루를 지어 이렇게 우물을 배치했단다.
내환루 옆에 있는 서쪽 우물.



동쪽 우물

土樓
 이 토루는 四環樓인데 중앙이 사당이다.



위의 두 장의 사진은 필자가 찍은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 전시한 것을 복사한 것임.


진복루의 굴뚝

토루의 1-2층에는 창이 없다.
外侵에 대비해서 건물을 그렇게 지었단다.
1층에 몇 개의 주방이 있는데 굴뚝도 2층 높이에서 짧게 뽑았다.




진복루 앞 개울 건너 개인 집의 굴뚝
 연기가 멀리 퍼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 밑까지 올렸다.



11시에 振福樓를 떠나 10분 거리에 있는 永定客家土樓 民俗文化村으로.
입장료 50위안에 구내 셔틀 10위안씩.
셔틀은 탈 필요가 없다. 걸어서 돌아다니며 구경해야 하기 때문이다.
1912년에 완공되어 보존상태가 좋은 振成樓로 대표되는 원형토루들과 많은 四角土樓들


토루들

光裕樓
 광유루는 四角土樓



광유루 소개

광유루 안으로 들어서서
 정면 안쪽에 사당이 있다.




3층에 올라서




振成樓
 1912년에 완공된 가장 잘 보존된 4층 원형 토루다.
건평이 5,000제곱미터에 이른다.



진성루 소개



진성루





12시30분에 점심을 먹고 민속촌 정문으로 나오는데 馬祖女神을 모신 天后宮이 있어 들렀다.


天后宮
 천후궁은 마조여신을 모시는 道館이다


마조 여신의 일생을 그린 벽화

마조 여신
 마祖 女神은 天上聖母, 天后, 마祖婆라고도 불리는 道敎에서 모시는 해양 신이다.

마조 여신의 속명은 임목랑이며 960년 어부의 딸로 태어났다.
효심이 대단하여 아버지가 고기잡이를 나가면 풍어와 안전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고, 그 부친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고기를 많이 잡았단다.

마음이 착하고 부지런하여 마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단다.
28세에 요절하자 마을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을 그녀가 선녀가 되어 승천한 것으로 생각하고 도관에 여신으로 모셨단다.

푸젠 성을 위시해서 중국 남부와 대만, 베트남에서 어부 등 뱃사람들이 풍어와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으로 모신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중국 남부에 상륙했을 때 마조 여신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 지명을 “마카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4시에 永定高北土樓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고북토루 소개

토루들(빌려온 사진)

토루들(빌려온 사진)

승계루 소개

承계樓全景

승계루 내부 – 사당



사당





제일 중앙 건물에 사당이 있다.




원형의 승계루와 옆에 있는 四角토루


원형의 승계루 옆의 4각 토루가 정답게 붙어있다.



승계루는 1628년 – 1644년(明代) 까지 16년간 지어졌으며 1709년(淸代)에 落成했다.
4층에 四環樓로 402 介 間이며 둘레가 229.34m이다.

토루는 漢나라가 망하면서 황하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전란을 피해 남으로 이동해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활의 터전을 잡아가던 客家들이 唐 나라 때부터 창궐한 도적들을 방어하고 폭풍, 지진 등 자연재해에 대비해 원형 또는 四角形의 폐쇄된 공간인 土樓를 지어 많게는 수백 명까지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이 客家土樓는 明 나라 때 주변지역으로 확산하면서 양식도 다양해졌다.
현존하는 대표적 양식은 圓中有方式, 三堂四落式, 궁전식으로, 주 건축자재가 현지의 질 좋은 진흙이므로 “土樓”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全 樓의 핵심적 위치는 中央에 모셔진 “祖堂”으로, 종교의식, 결혼이나 喪事 등 큰 행사장소로 쓰였다.
大家族 小社會를 구성하는 객가토루는 외부침입 방지와 태풍, 지진 등 천재지변에 대처하는 기능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족장들로 구성된 지도체계를 갖추고 있어 공동체의 질서유지를 도모했다.

1층에는 중앙에 사당이 있고 주방, 창고, 가축우리 등이 있으며 2층 이상에 침실이 있다.
2층에는 수백 명이 연회를 할 수 있는 공공장소가 있는 곳도 있다.
토루 안에는 우물, 욕실 등이 있고 선생을 모셔 글을 배우는 학당도 있다.
굴뚝은 지붕 가까이 까지 뽑아 올려 연기가 낮게 퍼져 나가도록 설치했다.

외벽은 이곳의 진흙으로 만든 큰 벽돌이며 견고하다.
내부는 목재로 지어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창문은 3층 이상에 만들어 외침에 대비했고 대문은 2개 또는 3개만 만들어 방어를 쉽게 했다.
대문은 밖에 철판을 대었고 대문 안쪽에 우물을 만들어 火攻에 대비했다.

현존하는 토루는 약 20,000개에 이른다고 하며 푸젠 성에만도 사각루가 400여 개, 원형토루가 360여 개가 있다고 한다.



*.客家.

중국은 복잡한 혈통과 문화구성을 가진 다민족국가다.
황하유역에 자리 잡은 秦 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언어와 문화를 통일하면서, 특히 한나라가 재통일한 후 민족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때부터 漢族이라는 거대 민족이 탄생하여 지금은 중국 인구의 95%가 한족이란다.

이렇게 중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족은 漢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다시 통일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 전란기를 시작으로 5차례에 걸쳐 漢族의 大移動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관료출신과 학식 있는 사람들을 따라 가족단위로 또는 마을단위로 전란을 피해 안전한 남쪽지역으로 이동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고 남방의 기후에 맞는 농작물을 재배하고 중원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고 현지의 문화를 흡수하여 효율적으로 적응해 나가는 집단이 되었다.

이들은 중원문화가 토착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이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고유한 풍속을 지켜나가고 언어 역시 고대 중국어로 생각되는 특수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客家라고 불리는 특수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漢族 大移動經路圖


제1차는 後漢이 망하고 魏晉남북조시대 전란기에 양쯔 강 중하류의 안휘와 강서 북부로,
제2차는 唐末 黃蔬의 亂 등으로,
제3차는 南宋末 金人의 침입과 元 나라가 들어서면서,
제4차는 淸 나라 초기(강희제)부터 중엽(건륭제)까지,
이때에는 客家人의 제2차 이동이 이루어지는데,
한줄기는 전란으로 폐허가 된 쓰촨 성으로,
한줄기는 심천, 홍콩, 마카오 등 광둥 성의 동남해안지역과 해남도, 대만 그리고 동남아와 세계 80여 개국으러 번져 나갔다.

이들 객가는 여자들이 농사일을 맡아 하고 남자들은 자녀교육과 사업을 주로 하였다.
사업수완이 탁월하여 중국 내외에서 유대인과 필적할만한 재력가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전 세계에 약 1억 명이 분포되어 있단다.

객가 출신으로 유명한 인물중에 쓰촨 성 출신의 등소평이 있다.

You Might Also Like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