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zhou, Xiamen

11월 16, 2018

中國南方文化探訪 (5) – 福州, 廈門, 鼓浪嶼



福州(푸저우)


푸저우(福州)는 푸첸성(福建省)의 省 都로 무이산에서 發源하는 민 강 하류에 위치한다.
전국시대(BC202년) 越 나라가 이곳에 城을 쌓았고, 漢 代부터 해외 무역이 시작되었다.
宋 代에 더욱 번성했으며, 明 代에 최고조에 달했다.
靑代에는 造船과 海軍기지로 활기를 띠었고 청대 말 남경조약으로 개항된 5개 항구 중 하나다.



秦나라 때 부터 발전한 푸저우(福州)는 푸첸성(福健省)의 성도다.
아편전쟁 후 개항한 5개항 중 하나다.

복주는 華僑의 고향이라 부른다.
국외에 250만 명 이상이 살고 있고 특히 대만(60만?)에 많이 살고 있다.



2008년 3월23일(일)

09시10분, 택시(8위안)로 버스터미널로 가서 샤먼행(廈門行) 버스표 확보.
105위안. 20-30분마다 있다.

09시50분, 西湖공원, 입장료가 없다.
완연히 꽃피고 새우는 봄이다.
분재에도 새싹이 돋는다
일요일이라서 가족들 상춘객이 많다.

공원 곳곳에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모여 연주를 하고 지나가던 상춘객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아름답다.

어느 곳에서는 여성이 앞에 나서서 열심히 지휘하는 모습도 보인다.
호수 건너 푸젠성 박물관과 미술관이 붙어 있다.
박물관 앞 광장에 이 곳 출신인 임칙서의 동상이 서 있다.

임칙서는 청나라 말 정치가, 아편 밀수근절 명을 받고 흠차대신이 되어 광주에 내려가 영국인 소유 아편 1,425톤(2만여 상자)을 바다에 흘려보내고 아편 밀매를 금지하고 밀수상인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를 빌미로 영국은 1840년 청나라를 침략하여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때 청나라는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을 체결하고 五個港을 열어 문호를 개방시켰다.
이 조약 내용에는 영국에 대한 보상과 홍콩의 영토 할양도 포함되었다.

전쟁 발발 후 임칙서는 강화론자들에 밀려 관직을 박탈당하고 신장웨이우얼 지역으로 귀양을 갔다.
5년 후 1845년에 복직되어 雲貴 총독에 임명되었다.
1850년 다시 흠차대신이되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러 가다가 병사했다.
중국인들은 임칙서를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한다.


서호공원




盆栽






아마추어 음악회



호수를 건너서 박물관으로

임칙서 동상


임칙서는 푸젠 성 사람.
1,837년 湖廣총독으로 있던 임칙서는 1,838년 청나라 황제 島光帝의 諮問에 응하여 아편 엄금 책을 건의하고 부임지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839년에는 欽差大臣이 되어 광둥 성의 아편무역 단속의 명을 받고 영국인 소유 아편 2만여 상자를 불태우고 상인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것이 영국에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을 주어 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

잠시 변방으로 유배되었으나 몇 년 후 복직되었다.
홍수전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자 “廣西巡撫”에 임명되어 내려가다가 병사했다.

중국인들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점심 후 溫泉公園으로,
주변에 새로운 아파트 단지.

우리가 들어 있는 호텔 바로 뒷산(해발 58,6m)이 于山風景區다.
이곳에는 何氏姓을 가진 아홉 형제가 신선이 되기 위해 도를 닦았다고 해서 九仙山이라고도 불린다.
1,104년에 세운 道館인 九仙閣이 있어 하씨구선을 모시고 있다.
天君殿 앞에서 불교에서의 천도재 비슷한 행사를 한다.

복주시 중앙에 있는 이 산에는 당대에 세운 백 탑사(만 세 사)와 명나라 때 왜구를 물리친 장군 戚계광을 모신 戚公祠가 있다.



공원의 젊은이들


戚公祠 안의 척계광 동상
 척계광은 명나라 장수로 1,555년부터 1,567년까지 푸젠 성과 광둥 성 일대에서 노략질과 밀무역을 해 오던 왜구와 80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왜구를 소탕하였다.
그 후 북방 타타르족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공을 세운 명장이다.
그가 지은 병법서 “紀效新書”는 우리나라의 군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척계광에 관하여…..

도관에서
 중년 여인이 불교의 천도재와 비슷한 제사를 올리고 있는 도관의 모습.
주재자의 행동에는 무당처럼 신이 오른듯하며 카리스마가 넘친다.


도관에서




何氏九仙

何氏九仙
 중국에서는 八仙이라고 해서 종리권, 장과로, 한상자, 이철괴, 조국구, 여동빈 등 男仙 6명과
남채화, 하선고 등 女仙 2명을 八仙이라고 전해 오는데,
하씨 九 仙은 이 지방에서 모시는 신선인지 기록에는 없다.

저녁을 자취하려는데 주변에 시장을 찾을 수가 없다.
음식점 골목으로 들어가니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조그마한 식당이 있어 투도(감자)과 지단(계란),총(파)을 조금 팔라고 해서 사다가 저녁을 맛있게 해 먹었다.



廈門

중국 남동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샤먼, 구랑유[鼓浪屿] 두 섬과 지우룽강[九龙江] 입구의 본토로 구성되어 있다.

진(晋) 왕조 때인 282년 퉁안현[同安縣]으로 지정되었다.
지우룽강의 입구라는 뜻으로 한때는 샤먼[下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훗날 발음은 같고 글자는 다른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수심이 깊고 겨울에 얼지 않는 천혜의 항구로 고대부터 무역항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41년 처음으로 유럽과 교역이 이루어졌던 장소이며 19세기는 중국의 특산물인 차를 수출 주요 항구로 기능하였다.
아편전쟁 이후 1842년 중국과 영국이 맺은 난징조약에서 명시한 5개의 개항지 중에 한 곳이기도 하다.(두산백과)



3월24일(월)

06시40분 호텔을 나와 택시로 06시55분에 복주 남점에 도착해서 만두와 흰죽으로 아침을 먹고,
08시 버스로 샤먼(廈門)으로 출발,
복주에서 하문으로 달리는 차 창 밖 山河는 나지막한 산들이 많고 그 아래 농경지가 펼쳐진 풍경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11시40분에 하문 松栢氣車점 도착.
호텔을 잡는데 약간 어려움이 있다. 고급호텔뿐이다.
택시로 중산공원 근처로 가서,
12시30분에 企鵝賓館으로. 175위안.



점심 후
14시10분 택시로 南普陀寺로.

南普陀寺는 唐 나라 때 창건된 고찰.
當時에는 普照寺라 불렀다.
청나라 때인 1684년에 재건되어 南 보타사라 부르게 되었다.
대웅전에 三世尊佛, 대웅전 뒤 위쪽에 있는 大悲殿에 千手千眼觀音菩薩像이 있다.
관세음보살상이 세존불을 모신 대웅전보다 위에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 왼쪽 큰 바위 아래 普照寺가 있고 오백나한도 큰 바위 밑에 모벼 놓았다.
완전한 관광사찰이다.


남보타사
 唐 나라 때 세워진 고찰(당시에는 普照寺)이지만 명대(1628년)에 전화로 소실된 것을 청대(1684년)에 재건되면서 南 보타사라 하였다.


鐘樓

대웅보전
 과거, 현재, 미래의 세 부처님(삼존불)을 모셔 놓았다.


大悲殿

千手千眼觀音菩薩像
 대비전 안에 모셔져 있다.


普照寺
 뒷산의 큰 바위 아래 법당을 만들고 입구에 정문을 지었다.


보조사 내부 부처님
 15시30분, 택시로 胡里山砲臺. 입장료 25위안.
1891년부터 5년간 조성된 이 포대에는 독일에서 들여온 대포가 2문 있었다.
지금은 좌측에 1문밖에 안 보인다.
아직도 포탄이 29발 남아 있단다.
하문 시내가 해안도로가 내려다보이고 동남쪽으로 대만 부속도서인 小 金門島가 보인다.




대포에 사용하는 포탄
 지금도 29발이 남아 있단다.


대포를 들여오기 전에 독일에 유학 중인 학생들이 조작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

호리산 포대에서 본 하문 시내
 여기서 대만의 부속 섬인 小 金門島가 보인다.
16시20분, 택시로 松栢氣車점으로 가서 永定行 버스표 구매. 70위안.
17시20분 택시로 호텔로…..



3월25일(화)

호텔에 식당이 없다. 호텔을 나서는테 프런트에서 만두, 두유, 계란을 넣은 비닐 도시락을 아침 식사로 나누어 준다.
도시락은 점심으로 먹기로 하고 호텔 옆 골목에서 검은 쌀죽으로 아침을 먹고,
08시20분 택시로 구랑위(鼓浪嶼)로 가기 위해 부두로 달렸다. 9위안.

구랑위 왕복 배편은 15위안, 종합 입장권이 80위안이다.
배는 섬을 한 바퀴돌아 관광을 시키고 구랑위 선착장에 내려 준다.
바로 건너면 4분 거리.

부두에서 내려 일광암으로 올라가는 골목에는 기념품 가게들.
아침이라서 해산물 시장이 열렸다.
싱싱한 게, 새우 등 해산물이 풍성하고 싸다.

구랑위는 하문에서 700m 떨어진 섬.
鼓浪은 큰 배가 일으키는 파도를 의미한단다.
아름다운 경관과 아담한 해수욕장들이 있는 휴양지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조계지로 지금도 당시에 지어진 유럽풍의 저택들이 빽백히 들어서 있다.

섬 중앙에는 해발 92.8m인 일광암이 있고 그 주변에 다양한 석각과 古城寨, 정성공 기념관, 菽藏花園, 皓月園(정성공 기념공원) 등이 있다.



구랑위 관광지도

해수욕장과 일광암

일광암 올라가는 길 입구에 문어상이 있다
 그 뒤 골목이 기념품 가게


福音堂(교회)

일광암사

九夏生寨

山寨 유적

외국인 저택들

다양한 사람들의 노름장면

국제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石築에 붙어 자라는 나무

鄭成公記念館

<鄭成公>

鄭成公의 부친은 명나라 말 무역으로 큰돈을 모은 복주의 거상이면서 명나라 벼슬을 하던 집안의 장남으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정성공은 7세에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명나라로 건너와 남경의 태학에서 공부했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남쪽으로 도망 온 왕족이 나라를 세웠다.
정성공은 당왕(唐王) 융무제(隆武帝)를 도와 명나라 부흥운동을 조직적으로 벌렸다.

1650년 아버지의 해상권을 이어받아 진먼[金門]·샤먼[廈門:아모이] 두 섬을 근거지로 무역하여 군비에 충당하는 한편, 자주 본토의 연안을 공략, 본토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명나라가 망한 후 조정의 압력으로 부친은 청나라에 귀순했다.
그러나 정성공은 부친의 권유에도 귀순을 거부하고 항청운동을 계속하다가 정부군에 밀리자 1661년 25,000명의 군사를 데리고 17세기 초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던 대만을 공격하여 1년 만에 네덜란드의 항복을 받아 39년 만에 대만을 회복하고 그 이듬해 38세에 대만에서 죽었다.



*.대만 華僑.
1683년 정성공 손자 대 까지 이어온 반청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킨 후 청나라는 200년간 주로 푸젠 성 농민들을 이주시켜 농지를 개간하여 정착시켰기 때문에 대만에는 푸젠 성 출신 화교가 제일 많고 광둥 성 출신도 10%에 이른다고 한다.


기념관 밑 작은 공원에 있는 정성공 동상

공원 벽면의 조형물

濤聽軒(일명 피아노 박물관)
 동양 최대의 피아노 박물관이란다.


皓月園(정성공 기념공원)


菽莊園
 대만 화교가 만든 식물원






곳곳에 있는 조형물들





濤聽軒 올라가는 길가에 화강암에 좋은 글들을 새겨 전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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