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many – Berlin(1)

11월 16, 2018

독일 – Berlin



2008년 7월 30일(수)

07시 45분 베를린 중앙역에 내렸다.

함께 내린 한국인 남학생 4명을 마중 나온 유학생 도움으로 Hostel을 예약하고
기차를 타고 Zoologischeler역에서 내려 찾아가던 중
로터리에 AO Hostel 간판이 보인다.

전에 우리가 사용했던 호스텔과 같은 체인점이다.
반가워 올라기니 방이 있단다.

위치도 좋고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숙소라서 정보도 풍부하다.
운이 좋았다.
1인 11유로다. 일요일 요금은 갑절이란다.

베를린은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지만 파리보다 더 넒은 녹지를 가지고 있고 베니스보다 더 많은 다리가 있단다.

19세기 프로이센제국의 군사, 산업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1920년경 전성기를 누리지만 세계 제2차 대전으로 폭파되어 잿더미가 되었다.

더군다나 1948년 참전국들에 의해 동.서로 갈린 베를린은 1961년 8월 동독이 장벽을 쌓으면서 단절의 시대를 거쳤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400만여 명의 동독인들이 더 나은 임금과 정치적 이유로 서독으로 몰려들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으나 아직도 베를린 양쪽 지역은 조율과정을 거치고 있단다.

우리가 투숙한 호스텔에서 우측으로 조금 가다가 큰 네거리로 나가면 브라이트 사이트 광장 모퉁이에 폭격 맞은 카이저 빌헤름 1세 기념 성당이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않기 위해 무너진 상태대로 보존한단다.


빌헤름 1세 기념교회
 독일 통일의 영웅을 기려 지은 대성당인데 2차대전 때 폭격으로 부서졌으나 전쟁의 무서움을 잊지 않기 위해 현 상태 대로 보존한단다.

이 광장 앞 버스 정류장에서 100번 버스를 타면 베를린 시내 주요관광지를 거의 모두 들린다.

우선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ruger Tor)으로 갔다.

브란덴부르크 門은 동베를린 지역에 있다.
1788년부터 1791년에 걸쳐 세워진 개선문이다.
성문 위에는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과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로 장식되어 있다.

광장에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 앞에는 미군 복장과 소련 복장 한 모델들이 기념사진을 함께 찍게 해 준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으나 1년 후 1990년 10월 2일 자정에 독일의 통일을 선언하고 이 광장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를 연주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가는 길목의 십자가들.
qpfmffls 담장을 넘다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십자가가 장벽이 쌓여 있던 자리에 늘어서 있다.
아깝게도 1989년 5월에 희생된 사람도 있다.


부란덴부르크 문
 1788년부터 1791년에 걸쳐 세워진 개선문이다.




문 위 승리의 여신상과 마차.

성문 위에는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과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로 장식되어 있다.



광장의 도우미들.
기념촬영을 함께해준다.
브란덴부르크 문 모퉁이를 돌아서면 제국의회 의사당이 보인다.
이곳에서 독일 통일 후 첫 의원총회를 열었다.




제국회의 의사당,
독일 통일 후 첫 번째 의원총회를 이곳에서 열었다.

대성당을 지나 알렉산더 광장으로 가면 주변에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마리엔 교회가 있고 붉은 벽돌건물 시청이 나온다.
옆으로는 송신탑이 있다.


대성당

聖壇

돔 천장의 장식

파이프오르간

聖畵

聖物


베를린 시내 전경 - 대성당 종탑에서....



알렉산더광장의 분수

시청사

시청 잎 광장의 분수


분수의 조각들




길거리의 동상 – 용과의 혈투

Marien Kirke


마리엔 교회 박물관 조각들




콘서트홀 쪽으로 가면 양쪽으로 독일 교회와 불란서 교회 가운데 아름다운 콘서트홀이 서 있다.
콘서트홀 광장에는 쉴러의 동상이 서 있다.



프랑스 교회
 콘서트 홀로 들어가는 우측에 있다.



독일 교회(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교회)
콘서트 홀로 들어가는 좌측에 있다.


콘서트 홀
 두 교회 한가운데 아름다운 콘서트 홀이 있다.


쉴러 동상
 콘서트 홀 계단 앞에 쉴러 동상을 세워 놓았다.



점심 후에는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미군 검문소로 갔다.
일명 “Chaly”로 불리는 U.S. Army 검문소가 있던 자리다.

담장이 세워졌던 자리에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다.



U.S. Army Check Point.
일명 “찰리”라고 부르던 검문소.


장벽이 있던 자리


허물어진 장벽 조각으로 만든 기념물

허물어진 장벽 조각으로 만든 기념물

기념사진 촬영 장소

베를린 장벽에 관한 기록물 전시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서쪽으로 3.4km에 걸쳐 있는 Tiergarten(도심 공원)을 걸었다.
도심 한가운데서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대한 공원이다.

서쪽으로 한참을 가면 승전 기념탑이 나온다.
탑 꼭대기에는 로마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 상이 지는 햇살에 황금빛으로 번쩍인다.

승전 기념탑이 있는 로터리 옆 작은 정원에는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동상이 있다.



승전 기념탑

승전 기념탑 꼭대기의 로마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 像


비스마르크 동상.
승전 기념탑 옆 작은 공원에 세워져 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독일 북부를 지칭한 왕국, 영어로는 프러시아)의 재상으로 독일 통일을 이끈 총리가 되고 첫 연설에서 “오늘날의 중대한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鐵과 血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이른바 철혈정책을 내세웠다.

철혈정책의 鐵은 무기를, 血은 전쟁을 통해서 흘리게 될 군인들의 피를 뜻한다.
즉 군대를 동원해 전쟁을 일으켜 통일을 쟁취하겠다는 뜻이다.
당시 독일은 39개의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 있었으며, 영국이나 프랑스, 러시아보다 약소국으로 남아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통일되어야 유럽의 다른 강국들과 대등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군대를 양성하던 비스마르크는 덴마크의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 지역이 덴마르크로부더 독립운동을 일으키자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 지역의 독립을 지원했다.
3년에 걸친 덴마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이 지역들에 대한 처분문제로 다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일으켰다.
1866년 7주에 걸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마인 강 북쪽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북독일 연방을 결성했다.

이러한 프로이센의 움직임에 프랑스는 위기감을 느꼈고, 비스마르크 역시 독일이 서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맞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결국, 1870년 7월 19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잘 훈련된 프로이센 군대는 빠르게 프랑스로 진격했다.
미쳐 전쟁을 준비하지 못한 프랑스는 패배를 거듭했고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고 파리를 함락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프로이센은 알자스, 로렌 지방을 얻게 되었으며,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50억 프랑에 달하는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유럽의 신생 강국으로 부상했으며, 전쟁 중이던 1871년 1월 18일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에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를 황제로 한 독일제국이 선포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독일 통일이다.
<서진근 편저 UN 192 회원국 다이제스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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