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zbekistan – Tashkent – Samarkand

12월 03, 2018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2003년 9월 30일

밤 9시25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蘇聯邦이었던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국제공항에 내렸다.
인천 공항에서 7시간 45분을 날라 왔다.
시차는 4시간.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세관신고서는 2부를 작성한다.
카메라 등 귀중품은 물론 소지한 현금도 종류별로 아라비아 숫자와 영어로 기재해야 한다.
세관 검색 대를 통과하는데 줄을 선 것이 헛것이다.
새치가 우선이다.
나오다 보니 내가 맨 꼴찌다.
이번 여행을 주선해준 아나토리 씨가 공항에서 만나자고 해서 나온 줄 알았더니 SERVAS KOREA 팻말을 든 건장한 중년 사내가 서 있다.
옆에서 대학생같이 보이는 젊은 여자가 영어로 통역해 준다.
사마르칸트는 타슈켄트에서 320KM나 되기 때문에 안내할 사람만 왔단다.
모두 이스타나 두 대로 Traditional hotel이라고 소개하는 간판도 없는 숙소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준비된 녹차를 한잔 마시는 동안에 침실이 배정되었다.
개인 주택을 증축 개조한 건물이어서 도미토리 수준이다.



10월1일 아침
2층 식당에 아침상이 차려졌다.



나의 回甲 床.
우연히도 오늘이 나의 환갑날이다.



식탁 한가운데 푸짐한 과일 접시, 사과와 여러 종류의 포도가 수북하다.
빵, 쨈, 요구르트, 치즈, 계란찜 등등 깔끔하고 푸짐한 식탁이다.
오늘이 나의 60번째 생일, 환갑날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옛날에 술탄들이 먹던 식단으로 환갑 상을 받아보니 멋지다.
그 이야기를 하며 한바탕 웃었다.
7시 50분에 사마르칸트를 향해 출발했다.
끝없는 평야가 펼쳐진다. 도로변에서 보이느니 목화밭이다.


목화밭
 옥수수밭과 해바라기밭도 눈에 띈다.
직선 도로, 그러나 노면은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도로변을 따라 시멘트로 만든 농업용 수로가 끝없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시멘트로 만들어 지상에 끝없이 설치한 농업용 수로
 중간에 단속경찰이 많다.
앞서 가던 우리 일행의 차가 과속으로 단속당한다.
한참을 달리다가 길가에 늘어선 과일 장수들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차를 세웠다.
우리나라와 같은 수박하고 하미 과라고 하는 타원형 호박 같은 멜론이다.
하미과가 맛이 있다고 잘라서 맛을 보여 준다.
정말로 달고 맛이 있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로 가는 도로변의 하미과 장사들




그런데 가이드는 다른 사람 것을 흥정해서 벌써 자르고 있다.
맛있게 먹고 나오는 길에 먼저 맛을 보여준 아줌마에게서 두 개를 더 샀다.
우리나라의 둥근 멜론 2개보다 더 큰 것이 하나에 150원 정도이다.

1시에 사마르칸트에 도착했다.
호텔은 역시 타슈켄트나 같은 스타일인데 조금은 전문적이다.
방마다 샤워 룸이 딸려 있다.
호텔에는 어느 집이나 평상이 있고 테이블에는 견과류와 말린 과일이 서너 가지씩 차려져 있다.
그냥 접대용이다.
생수는 돈을 받는다.
녹차는 얼마든지 내 온다.
점심에 나온 수프가(주요리?) 일품이다.
피망과 양배추에 고기 속을 넣어서 만두처럼 만들었다.
국물은 러시안 숲 같다.



사마르칸트에서 점심 상
 전통음식 이라다.




야채와 고기를 섞어 만두속 같은 소를 넣어 쪄낸 요리인데 맛이 아주 좋았다.




호텔 여주인
 눈썹 화장이 특이하다.
눈썹이 붙어서 나는 종족이 있단다.
치아는 모두 금으로 둘러쌌다.




어린이 눈섭이 거의 붙어 있다.
아나톨리 씨가 왔다.
대학교수를 했고 현재는 평화와 협력의 박물관 관장으로 있다.
국제회의 때문에 한국에는 2번 다녀갔고 작년에 왔을 때는 김기명 교수가 이틀을 호스트 했단다.
여행사 대표라는 사람은 영어를 전혀 못 하고 모든 일정을 아나톨리 씨가 주선하는 것 같다.





사마르칸트는 소그드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소그드 지방은 파밀고원과 천산 산맥의 서쪽, 이란고원과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사이에 아랄 해로 흘러드는 Amu Darya 강과 Syr Darya 강 사이의 소그디아나 지방을 지칭하는데,
지금의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이 지역에는 6-7세기경부터 이란계의 소그드인들이 소그드 문자를 쓰며 살았는데, 국가는 세우지 않고 실크로드의 십자로에서 상업으로 많은 부를 축척 해서 왕족과 귀족 다음의 대우를 받았단다.

玄裝은 大唐西域記에서 사마르칸트에서의 체류기에 “이곳 소그드인들은 불을 경배한다.
이곳에는 여러 나라의 진귀한 보물이 많다.
토양도 기름져 많은 수확을 한다.
숲은 삼림이 우거지고 꽃과 열매가 풍부하다.
상업에서 다른 나라보다 앞선다.
왕은 용맹하고 근방 국가들은 그의 명령에 복종한다.
현장은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 되기 전에 사마르칸트를 거쳐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

AD996년 마문 빈 무하마드가 호레즘 샤왕조를 세워 이슬람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였다.
최고 전성기에는 북으로는 아랄 해, 남으로는 페르시아만, 동으로는 파밀 고원, 서쪽으로는 자그로스산맥에 이르러 대부분의 내륙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땅 전부를 차지하여 실크로드의 요지에서 번영을 구가했다.

13세기에 들어와 징기스 칸이 몽골을 통일하고 국제교역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오아시스로 연결되는 실크로드 교통로의 안전 확보가 우선 과제였다. 이를 위해서는 파밀고원과 천산산맥 동쪽의 서하를 평정하고 호레즘 왕국과는 협력하려 하였으나 호레즘 왕국 오트랄 지방의 총독 ‘이날축”이 대상 500여 명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1218년).

그럼에도 징기스 칸은 다시 사신을 보내 협조를 요청했으나 징기스칸의 사신도 수염을 뽑아버리는 망신을 주고 처형을 했기때문에 징기스 칸은 대군을 일으켜 호레즘 왕국을 침공하였다.
징기스 칸은 10만 기병으로 40만 병력의 호라즘 왕국을 침공해서 1220년에 호래즘 왕을 가스피해의 작은 섬에서 죽여 호레즘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때 초토화된 사마르칸트는 14세기 중반에 나타난 티무르제국의 수도로 화려하게 재건되어 중앙아시아 최고의 도시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티무르는 점령지의 기술자와 노예들을 사마르칸트로 데려와 도시를 건설했다.
푸른색 타일을 주로 사용한 거대한 모스크, 메드레세 그리고 미나렛들이 구도시 중심에 모여 있어 도시의 분위기를 특징지어 준다.




박물관 옆 언덕의 조형물

박물관 앞마당의 조형물
 점심 후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고대 유물들, 의상들이 인상적이다.
티무르 묘에서 나온 나무관의 보존 상태가 좋다..
티무르관 앞 벽에는 티무르의 영정이 있고 관 뒤에는 조형물을 세워 놓고 제물을 놓아두고 있다.
근무하는 여직원들이 모두 뜨개질이나 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방문 기념품으로 팔려고 만들고 있는 공예품이다.
줄 매듭으로 만든 팔찌를 하나 샀다.
$1을 달란다.
깎을 수가 없다.
이 나라 물가로 보면 엄청나게 비싼 것이다.



우루그벡 메드레세
 박물관을 나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사마르칸트의 자랑, 가장 화려한 광장인 레기스탄 광장으로 갔다.
세 개의 메드레세가 디귿을 그리며 서 있다.
그 가운데가 레기스탄 광장이다.
이 광장에서 밤에 빛과 소리의 향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광장으로 들어가면서 왼쪽 메드레세가 티무르의 손자인 “울르그벡”이 세운 울르그벡 메드레세이다.
주로 이슬람 신학대학으로 천문학, 철학, 수학 연구소로 사용되었으며 티무르제국의 학술연구 근원지였다.
입구 문 위에 “학예를 연마하는 것은 모든 이슬람 국민의 의무” 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우측에는 티무르제국이 망한 후 이 지역을 통치한 우즈베키스탄 영주인 “야한그도르”가 건축(1619-1636)한 사르도르(용맹한 사자) 메드레세가 있다.
이슬람에서는 일체 동물의 형상을 금기시하는데도 이 건물의 정문 위 중간 부분에 사슴, 사자,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원광이 있는 사람의 얼굴을 모자이크 했는데 이는 자신의 권위를 시험해 본 것이란다.
이 사람은 두 메드레세가 마주 보는 가운데에 “타라카리”(금색으로 입힌) 메드레세를 지어 디귿을 만들었는데, 이 메드레세 건물 내부의 중앙 벽면, 천정의 채색 타일모자이크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곳에 타일을 붙여 작품을 만든 건축가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겠는가 하는 생각에 경외감을 감출 수 없다.





레기스탄 광장은 사마르칸트가 자랑할만하다.
웅장한 건물들이 푸른색 타일을 주로 사용하여 서로 어울려 섬세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게 보이지 않는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다.




야한그도르 메데레세
 레기스탄 광장 우측에 있는 메드레세.
맞은편의 우루그벡 메드레사보다 늦게 건축했는데 당시 이지역을 지배하던 사람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동물형상을 건물 전면에 모자이크했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건물들이 세워진 시기가 다르면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은, 현명한 지도자들은 자기를 과시하고자 해도 세대를 달리하면서도 서로 이해하고 존중함으로써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여 멋을 창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여유 있게 오늘 일정을 끝내고 잠시 쉬고 나서 사마르칸트 세바스멤버들이 초청한 환영 만찬에 갈 준비를 하기로 했다.
나오는 길에 오늘 환갑을 맞은 사람에게 회원들이 선물을 주시겠다고 해서 염치없이 전통 악기 하나를 받았다.
멋지게 생긴 술탄이 방석에 기대어 앉은 그림이 있는 소리가 좋은 탬버린 같은 타악기다.

좋은 기념품이다.

저녁에 버스가 왔다..
버스는 한참을 달려서 어느 후미진 어두운 골목 앞에 내려놓는다.
아나톨리 관장 집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24평 정도의 집인데 입구에는 우리 신발도 제대로 벗어 놓을 수 없는 좁은 현관에 거실도 우리가 모두 앉기에는 비좁은 자기 집으로 초대한 것이다.
손님은 우리 일행 12멍과 여행사 대표, 현지 가이드 그리고 또 한 사람, 한국어를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학생 등 모두17명이 억지로 끼어 앉았다.
식탁에는 과일 등 기본 메뉴에 한국인에게서 배웠다는 야채절임, 잉어절임(함경도식 식혜 비슷함), 부인이 끓인 러시안 숲(부인이 러시안)과 볶음밥 그리고 음료로는 콜라, 와인 , 위스키, 코냑,맥주, 보드카까지 여러 종류를 준비하였다.
러시안 숲은 양파, 당근, 양배추, 감자, 토마토, 고기 등등를 넣고 끓인 정통 러시안 숲이다.

아나톨리는 나의 생일을 알고 장미 세 송이와 우즈베키스탄 남자들이 쓰는 전통 모자를 선물로 준다.
세심한 배려에 국제적인 감각을 자진 사람의 면모를 보면서 내 자신을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10월2일

새벽에 일어나 골목을 나왔다.
집집이 대문 앞을 쓸고 물을 뿌린다.
옛날 생각이 난다.
집들은 모두가 담이 높고 밖으로 창문이 없다.
대문도 항상 잠겨 있는 것 같다.
골목을 나와 보니 바로 박물관이다.
박물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니 큰 도로가 나오고 빵을 파는 여인들, 출근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우리나라의 다마스보다는 조금 큰 대우 다마스가 대중교통 수단이다.
자동차 앞 유리창에 번호가 붙어 있다.
가는 방향을 표시하는 것이란다.
1번부터 100번까지 있단다.
50년대부터 60년대 초까지 서울의 12인승 승합차 역할을 한다.
러시아워에는 15명 이상도 타고 간단다.





길가의 빵 장수들은 집에서 갓 구운 따끈한 빵을 손수레에 싣고 보온을 해 놓고는 몇 개씩 손에 들고 호객을 하고 있다.
호텔에서도 빵은 밖에서 사다가 식탁에 놓는다.
빵은 1개에 180원에서 240원 정도 한다.
3-5인분은 된다.
아침을 먹고 아나톨리 씨가 근무하는 평화와 결속의 박물관으로 갔다.
사마르칸트 중앙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바로 오른쪽 건물 1-2층에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공간에 각종 전시물이 벽이며 홀에 가득히 진열되어 있다.
주로 전쟁과 핵 피해, 지구환경 파괴의 사례들을 수집 전시하고 개선대책에 대한 연구 자료들을 모아 놓았다.
우리나라 어린이의 그림도 서너 점 걸려 있다.
전쟁박믈관은 많은데 평화박물관은 세계에서 오직 이곳뿐이란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등 세계의 저명인사들이 이 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있다.
내로라하는 정치가, 화가, 영화배우, 음악가 등 각 분야의 저명인사들이 사진과 격려의 글을 써서 보내온 바인더에는 최근에 평화상을 받은 D.J.의 편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의 95%가 일본인들이란다.
일본 학생들이 접어 보낸 종이 비둘기가 대단히 많다.
세계 어디를 가나 일본인들의 현지참여가 눈에 띄게 많은데 우리는 언제나 세계로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일까?
우리에게 평화의 종이 비둘기를 하나씩 선물하는데 받는 마음이
어쩐지 무겁다.




비비하님 모스크!

지금은 많이 허물어졌지만 중앙아시아 최대의 사원이다.
34년간 전쟁터로만 떠돌다가 전쟁터에서 죽은 티무르에게는 8명의 왕비가 있었단다.
그중에서 티무르가 가장 사랑하던 왕비 비비하님을 위해서 이 모스크를 지었단다.
이 모스크를 짓는 동안 출정하면서 비비하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남들이 보지 못하게 철 가면을 씌웠는데 건축 감독이 비비하님의 철가면에 입맞춤을 한 사건이 발각되어 건축 기사는 건물 옥상에서 던져 죽였단다.
티무르는 이 사원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고 3년 뒤에 이 슬픈 사연을 안고 사원이 완공되었단다.
지금은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시장 안내표시

시장 안내표시
 사마르칸트 최대의 바자르는 비비하님 모스크 옆쪽에 있다.
사탕과 건과류, 견과류 시장, 김치, 야채시장 그 이 뒤에 과일 시장이 있다.
시장의 규모는 큰데 비해 상품의 종류는 단조롭다.
거의 모두가 농산품이고 기념품이라고 할만한 특산품은 별로 없다.
후진국 시장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김치류와 장아찌를 팔고 있는 고려인
 스탈린이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던져버린 30만 고려인의 후손이다.
우리나라 말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시장 풍경


장사 나온 아가씨들과


인형들


루하바드 사원은 지배자의 묘(구루에미루)라고 하는 별칭을 갖고 있는 묘역이 있다.
티무르와 그가 생전에 존경하던 스승, 그리고 이 사원을 건설한 울루그벡과 그의 가족들이 안치되어 있다.
울루그벡은 티무르의 손자이다.
평소 스승을 존경하던 티무르는 자기 스승의 묘를 자기 것보다 더 크게 모시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루하바드 사원 중앙 홀에는 묘역이 만들어져 있다.
1층에 만들어진 석관의 배열은 맨 앞에 제일 크게 티무르의 스승의 석관이 있고 다음에 티무르의 석관이 있다.
티므르 관의 밭침석은 푸른 옥돌이고 석관은 검은색의 돌인데 모두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그 뒤에 우르그벡의 석관이 제일 작은 모습으로 있고 그 양 옆으로 티무르의 아들과 손자들의 석관이 있다.
왼쪽 계단 위에 우루그벡이 스승으로 존경하고 성인으로까지 받들어 모시는 분의 석관이 있다.
정복전쟁에 일생을 바친 티무르는 스승을 모실 줄을 알았고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은 묘를 자기 것 보다 크게 모시도록 자손들에게 부탁했다.




티무르 후에 최고의 명군이며 최후의 명군이었던 손자 우루그벡은 할아버지 석관을 할아버지 스승의 석관보다는 규모는 조금 작게 만들면서도 최고의 자재를 사용해서 유훈도 받들고 할아버지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표시하는데 아낌없는 노력을 한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이곳의 풍습은 지상에 석관으로 묘지의 표식을 하고 그 지하 1-3m에 목관에 시신을 안치하여 묻는다.
지상에는 무덤 주인공의 신분과 공적에 따라 석관이 모셔지고 그 지하가 묘지가 되는 것이다.
소련의 과학자들이 이 무덤의 주인공들을 검사한 결과 티무르는 다리와 팔에 상처가 있으며 울루그벡은 목이 잘렸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티무르의 상처는 전쟁터에서 다친 것으로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단다.
티무르의 손자 울루그벡은 학자이자 정치가이며 지금까지도 역사적으로 손으로 꼽히는 저명한 천문학자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마르칸트 외곽 자그마한 동산 위에 위치한 울루그벡 천문대에는 천체를 관측하고 태양의 각도를 재어 시간을 알아보던 시설이 남아있는데 현재의 시간과 대조를 해도 1년에 57초의 차이만 난단다.



천문대에 아직도 남아 있는 시설


학문을 즐긴 이러한 위대한 왕을 종교 지도자들이 소외감을 느껴 우르그벡의 아들을 꼬드겨 아들이 자객을 보내 목을 베어 살해했다는 얘기가 있다.

다니엘 묘!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인이다.
유대교인, 기독교인, 이슬람교인 모두에게서 존경을 받는 성인이다.
묘역으로 올라가기 전 밑에 있는 샘물에서 손을 씻고 올라가란다.
이 샘물은 다니엘의 머리가 위치한 곳 밑에서 나오는 샘이란다.
건물로 들어가 보니 관이 아름다운 천으로 덮여 있는데 관의 길이가 무려 18m나 된다.

대성인이라서 관을 크게 만들었단다.




다니엘은 중앙아시아와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런 이의 묘소가 사마르칸트에 있게 된 연유가 있다.
티무르는 자칭 칭기즈칸 후예라고 하면서 몽골제국을 재건한다는 명분으로 정복전쟁을 계속하여 북으로는 볼가 강에서 남으로는 갠지스 강까지 서쪽으로는 비잔틴 제국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라크를 점령했을 때 티무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인 다니엘의 묘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고 성지를 사마르칸트로 옮겨 성소로 만들어 종교적으로 권위를 높이고 순례자들에 의한 경제적 번영을 계산하고 묘를 파서 이장했단다.

아프라 시압!
비운의 성터.

사마르칸트 외곽 언덕.

사마르칸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7세기경 사라센 시대에 크게 발전했고 호레즘 왕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도시다.
호레즘 왕국을 침공한 칭기즈칸은 자국 사신들을 죽인 보복으로 침공했을 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이 도시와 함께 묻어 버렸단다.
최근에 발굴되는 현장 입구에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주로 발굴 현장에서 나온 것들을 전시 중이다.
그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라센 시대에 각국 사신들의 인물그림이 있는 벽화로 최근 연구 결과 벽화 중앙의 오른쪽 끝 부분의 두 사람이 고구려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희미하지만 머리 장식과 의상이 많이 눈에 익어 보인다.




아프라시압 발굴현장
 카즈라키즈르 사원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지어진 1300년 된 이슬람 사원이다.
712년 아담의 20대손인 카즈라키즈르가 사마르칸트에 와서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사원을 지었단다.
몇 차례에 증축하여 지금의 사원이 되었고 그 당시 사용하던 깊이 40m의 우물은 지금도 샘이 솟고 있다.
드려다 보니 까마득히 아래 고인 물이 보인다.
1300년 된 우물이다.




1300년 된 우물
 샤히 진다(살아 있는 왕)는 8세기에 아랍이 침공해 들어 온 후부터 형성된 이슬람 공동묘지이다.
여기에 14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11개의 묘역을 건설했는데 여기에는 이슬람을 전도하다가 암살당한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촌 쿠삼과 그 일행의 유해가 모셔진 묘역(제일 안쪽의 오른편 건물)과 티무르와 울루그벡 일족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푸른색 타일로 치장한 건물들이 좁은 공간에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어 묘역이라기보다는 한 무더기의 아름다운 건축물 전시장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묘역군(샤히진다)의 분위가 올드타운의 거대한 메드레세, 모스크와 더불어 사마르칸트를 푸른 색깔의도시라고 부르게 한단다.
쿠삼과 4명의 순교자의 묘역은 지금도 순례자가 많아 찾아오고 있다.
5명의 순교자 무덤 위의 5층 석관은 청색 타일을 주로 사용하여 보석처럼 아름답게 치장해 놓았다.




샤히진다 묘역


10월3일 금요일

타지키스탄의 국경도시 펜지켄트로 출발.
펜지켄트란 다섯 개의 마을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사마르칸트에서 국경까지 60km.
국경에서 펜지켄트까지 20km이다.
이미그레이션 통과와 세관검사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타슈켄트에 도착했을 때 제출한 세관 신고서 사본을 제출해야 하고 기재 내용도 대조 한다.
나는 사본을 가지고 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었다.
우리 가이드와 타지키스탄 안내인이 도와주어서 해결되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펜지켄트에서도 60km나 되는 도로 사정이 엉망인 산골에 있는 어떤 기술자의 무덤이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인물이겠지만 우리로서는 시간이 아까웠다.
이 사람은 9세기경 이란에서 활동하다가 부하라 도시건설에 참여하여 기본 설계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84세에 고향에 돌아와 묻혔단다.




묘역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공원에서 작업하던 인부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촬영하려고 다가가니 부득부득 같이 먹잔다.
세 손가락을 휘저어 밥알을 들어올려 밑에서부터 훑어 먹는 시범을 보이면서 자꾸 권해서 시도해 보니 잘되지 않는다.
볶음밥이 맛이 있다.




타지키스탄의 여인들

타지키스탄 성직자와 기념으로
 타지키스탄의 길은 험하지만 펜지켄트에서 두산베까지 가는 도중의 경치가 아름답다고 안내서에 소개되어 있고 아프가니스탄에도 갔다 올 수 있다는 정보를 얻은 것이 소득이다.
시장의 푸줏간에는 냉장고가 없다.
고기는 모두 창문에 걸어 놓고 파는데 파리도 없다.
파리 대신 꿀벌이 붙어 있다.
사막 기후이니까 건조한 기후에 부패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고기에 꿀벌들이 앉아있다.
 10월4일 토요일

쵸르 치노르 공원(4개의 나무가 있는 공원)에는 성스러운 샘물이 있고, 천 년이 넘는 프라타너스 나무가 네 그루가 있는 공원이다.
태백산의 검룡소처럼 산 중턱에서 끊임없이 샘이 솟는데 수량이 대단하다.
이 샘물이 사마르칸트 주민의 상수원이란다.




마르지 않는 샘
 1060년 된 프라타너스 나무 밑동에는 문을 달았고 자물통으로 잠가 놓았다.
부탁해서 열고 들어가 보니 10여 명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탁자도 준비되어 있다.





1060년된 프라타나스 나무 밑둥에 1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밑둥 안 공간에서는 예배드리는 모임을 한단다.
그안에서 새씫이 자라고 있다.




기도시간을 표시한 정지된 시계
 자그마한 모스크 출입문 앞에는 다섯 개의 시계가 걸려 있다.
작동되는 시계가 아니고 시간이 고정된 시계다.
아침 5시5분 전, 오후 1시, 오후 5시45분 등 기도하는 시간을 표시한 것인데 해가 떠 있는 각도에 따라 기도하는 시간을 표시해 놓은  것이란다.


민속공예 마을을 방문했다.
2대에 걸쳐 도자기를 만드는 집.
물레를 발로 돌려 가면서 흙 반죽을 손으로 모양을 만드는 것은 어느 곳이나 같은 방식이다.
공영 방송에서 취재 녹화한 테이프를 보여 준다.
대단히 유명한 집안이다.
여자들은 광목보다 더 두꺼운 천에 수를 놓아서 손수건.
방석 카바 등을 만들어 판다.
인사치레로 수건을 하나 샀다. 5달러란다.
터무니없이 비싸다.




80세가 넘은 이 할머니는 아기들 요람을 만드는 인간문화재이시란다.


옆집에는 빵 공장에서 빵을 굽는 화덕을 만든다.
화장실에는 종이가 없고 왼쪽에 자갈만 한 돌이 하나 가득 들어 있는 양동이가 있고 오른쪽에는 몇 개의 돌들이 있다.
용도를 물어보니 용변 후에 뒤 씻개란다.
이슬람들은 휴지를 쓰지 않고 물을 쓰는데 이 집에서는 돌을 사용한다.
빵 가게 앞에는 빵이 창문에 매달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화덕 안에 밀가루 반죽을 얇게 붙여서 구워낸다.
한쪽에서는 밀가루를 반죽해서 빵 하나의 양을 저울에 달아서 둥글게 떼어 내면 한쪽에서는 둥글고 넓적하게 모양을 잡아서 화덕 앞에 던진다.
화덕 앞에 있는 사람이 이것을 받아서 화덕 안에 붙이고 적당히 구워지면 꺼낸다.
이곳에서는 이스트를 넣어서 부풀린 빵은 맛은 있지만 하급으로 친다.
많이 먹으면 건강에 나쁘단다.
조금 빡빡하지만 부풀리지 않은 빵을 호텔에서는 식탁에 내놓는다.
변두리 바자르에를 들렀다.
대부분이 옷 가게뿐이다.
모자가게 구둣가게가 몇 개 있다.
우즈베키스탄에는 공산품이 없다.
모두 터키, 이란,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사마르칸트에는 인구가 50만이나 되는 데도 중국 음식점이 없다.
아직은 외식을 할 수 있는 소득 수준이 안 되는 모양이다.
저녁에는 김태천 사장님 아주머니가 쌀을 사다가 밥을 지었다.
그리고 골목 안 어느 집에서 심은 무를 몇 개 얻어다가 채 나물을 만들었다. 맛있게 먹었다.
김 사장 내외분이 골목을 지나오는데 어린애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단다.
집에 있던 젊은 아주머니가 한국에서 4년간 일하다가 올해 2월에 귀국했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무, 고추, 가지 등을 마당에 심어 놓고 김치도 담아 먹는다며 무를 뽑아 가라고 해서 얻어 왔단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귀국한 젊은 부부
 다시 한국에 가고 싶은데 비자를 받을 수가 없단다.
이 골목 안에서만도 한국을 다녀왔다는 사람을 4명이나 만났다.
여기 사람들은 한국이 동경의 대상이 되어 있다.



10월5일 일요일

오늘은 티무르의 고향 근처에 있는 샤크라 샵즈를 방문했다.
사마르칸트 남쪽 90km에 아르크 시라이(하얀 궁전)라는 여름 궁전이 있는 곳이다.
티무르의 생가는 여기에서도 13km를 더 가야 한다.
티무르는 칭기즈 칸을 따라와 이곳에 정착하여 투루크화된 바를라스부족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티무르는 그런 연유에서 칭기즈 칸의 후예라고 자칭하면서 몽골제국의 옛 영화를 되찾겠다고 1366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면서 시작한 34년간의 정복전쟁으로 러시아에서 인도, 이란 이라크과 시리아, 레바논을 거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를 점령하고 1402년에는 소아시아의 오스만 투루크를 공격해서 바야지드 1세를 격파하고

그해 12월에는 로도스 기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스미나르(이즈미르)를 점령하므로서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때 중국에서는 1368년 주원장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세워 홍무제가 되었다.
사마르칸트로 귀국한 티무르는 원나라의 원수를 갚겠다고 명나라를 침공하기 위해 보병 20만과 기병 20만을 1404년 12월14일에 시르다르강변의 오트라르에 집결시켜 진군을 시작했으나 티무르가 병이 나서 1405년1월19일에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때는 명나라에서는 홍무제가 죽고 영락제가 즉위한(1403년) 직후의 일이다.
티무르가 오스만 튀르크를 침공하여 바야지드 1세를 격파하고 바아지드 1세가 1403년 9월에 죽음으로써 오스만 튀루크에 포위되어 경각을 다투던 비잔티움제국의 운명이 50년 연장되는 결과를 가져왔단다.




아르크 시라이는 정문만 일부 남아 있고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파괴되고 없다.
40m 높이의 문루 위에는 수영장이 있단다.
이 문루도 역시 푸른색 타일로 치장되어 있다.




궁전 앞에는 넓은 공원과 광장이 있고 중앙에 거대한 티무르의 동상이 있다.
원래는 레닌 동상이 있던 자리인데 연방이 해체되고 나서 티무르 동상으로 대체 했단다.




오늘이 일요일이라서인지 많은 신혼부가 티무르 동상에 헌화하고 아르크 시라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신혼부부와 들러리 – 티무르 동상에 헌화하러 간다.



친구들

현지 가이드
 사마르칸트의 여인들은 모든 이를 금으로 씌우는 것이 유행인 모양이다.
올드타운 거리에는 15-6세기에 지은 둥근 지붕의 목욕탕, 찻집, 시장건물들이 즐비하다.
돌아 나오는 길에 산 중턱의 식당에서 양고기 샤실리크 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어릴 때 죽은 티무르 장남의 묘소
샤크라 샵즈는 2-3세기경에 이미 도시가 형성되었고 알렉산더와 칭기즈칸의 침공을 받았고 15세기에는 티무르가 대 제국을 건설하고 고향 근처인 이곳에 여를 궁전을 지었다.
사마르칸트는 사바나 지역이다. 목화농사를 주로 하면서 토마토 과일 등의 생산량이 많다.
모두 관개로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우리가 묵는 호텔에 4학년짜리 남자아이가 있다.
영어를 곧잘 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어디서 영어를 배웠느냐고 물어보니 1주일에 2번씩 과외로 배운단다.
밖에 냉장고에 생수와 맥주가 준비되어 있어서 사서 먹는데 계산은 아들하고 하란다.
아들이 아르바이트로 장사하는 것이란다.
장래 소원이 무어냐고 하니까 축구선수나 여행사 사장을 하고 싶단다.
이 나라 학제는 10학년 제 인데 9학년에서 전문학교로 진학할 수도 있고 10학년을 마치고 대학으로 수도 있단다.

대학엘 합격하면 1년짜리 병역의무가 면제된다.
선생님 1달 봉급이 $100 정도이고 호텔 값은 시즌에는 $50,
비시즌에는 $30인데 흥정이 가능하다.

우즈베키스탄은 2,500만의 인구는 있지만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산업화의 길은 요원할 것 같다.
대우의 김우중 회장이 자동차 공장을 세워서 일자리가 많이 생겼지만, 내수가 크게 진작되지도 않고 수출시장도 만만하지 않아 크게 기대가 되지도 않는다.

김우중 회장은 독립국가연합 5개국의 인구가 7,000만 정도는 되고 이 지역이 지하자원과 면화 생산지라는 것을 보고 투자를 했다지만, 현재 상황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다.

다마스가 국민차 역할은 하지만 수요가 계속 늘어날지 의문이다.
사마르칸트에서 마지막 밤이다.
내일은 부하라로 떠난다.

티무르(Timur)

티무르(Timur, 1,336-1,405sus)는 1,370년에서 1,508년까지 존속했던 티무르 제국의 시조다.
유럽에서는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의 태멀레인(Tamerlane), 혹은 탬벌레인(Tamburlaine)으로 알려졌는데, 전투 도중 다리를 다쳐 발을 절었기 때문이다.
티무르는 투르크계인 “바를라스 부족” 출신으로, 1,336년 사마르칸트 남쪽으로 80km가량 떨어진 케시(Kesh, 現 샤흐리사브즈)에서 태어났다.
성장한 티무르는 차가타이한국의 분열을 틈타 1,360년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전역을 장악하고,
1,370년 자신을 사마르칸트의 주권자로 선언했다.
티무르는 흔히 군사령관인 아미르(Amir)란 호칭을 붙여 “아미르 티무르”라고 불린다.
그는 전 생애 동안 활발한 정복활동을 펴 광대한 영토를 복속시켰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 전역을 제패하고 인도에서 흑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티무르는 정복한 도시들의 주민과 반란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기술자들은 사마르칸트로 이주시켜 위대한 건축물들을 짓게 하기도 했다.
1402년 앙카라 부근에서 오토만 제국 황제 바예지드 1세의 군대를 격파한 후 사마르칸트로 돌아온 티무르는 오랜 숙원이던 명(明)나라 원정을 준비했다.
티무르는 자칭 칭기즈칸의 후예라고 했으며, 그래서 몽골제국(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에 복수한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1404년 말 티무르는 명나라 원정을 지시했으나, 1405년 2월 오트라르(Otrar)에서 갑작스럽게 병사했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구르 아미르(Gur-i Amir)는 그의 무덤이다.
티무르가 사망하자 티무르 제국은 급속히 분열, 약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1508년 우즈베크 족(族)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그러나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Babur)는 살아남아 1526년 인도의 “델리”를 점령하고 “무굴제국”을 세웠다.
(서진근 편저 UN회원국 다이제스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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