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zbekistan – Bukhara

12월 03, 2018

우즈베키스탄 – 부하라(Bukhara) 

부하라(Bukhara) = 보하라 (수도원)


2003년 10월 6일 – 7일

부하라는 사마르칸트에서 280km.
시내를 벗어나자 끝없는 벌판이 펼쳐진다.
끝없는 벌판을 달린다.
도로 양옆에는 목화밭이 펼쳐진다.
도로는 매끄럽지는 않지만, 언덕이 없고 거의 직선으로 뻗어 있어 조금 속력을 내어 달렸다.



전면만 남은 카라반사라이의 안쪽에는 집터 등이 남아 있다.




저장고와 숙소로 쓰였을 것이란다.



부하라 전방 약100km 지점 도로변에 카라반사라이가 나타났다.
그 맞은편에는 저장창고와 주거용으로 썼던 覆鉢形 유적도 남아 있다.
차를 세우고 내려보니 우뚝 선 성벽 내부에 옛날에 대상들이 묵었을 건물터들이 남아 있다.
교역할 물건을 잔뜩 실은 낙타를 몰고 수백 킬로미터의 사막을 지나가던 수많은 대상은 이곳에서 갈증을 달래고 각 지역의 정보도 교환하면서 쉬어갔을 것이다.
끝없는 벌판 한가운데 서 있는 이 회갈색의 성벽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묻어 있을까?
새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외로이 서 있는 이 카라반사라이 유적은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 가는 이의 발길을 잡는다.
20여 분을 기다려도 우리 일행의 차가 보이지를 않는다.
우리보다 앞서 갔을 수도 있어서 부지런히 달렸다.
부하라에 도착해 보니 우리가 먼저 온듯 하다.부하라 시내 한가운데 있는 연못 근처에서 차를 세우고 일행을 찾아보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것 같다.





이 연못은 “하우즈”라고 부른다.
생명수가 담겨 있는 연못이란다.

주위에는 메드레사들이 둘러서 있다.
올드타운의 중심지이다.
메드레사는 수도원이면서 교육기능을 담당했던 곳이다.
건물들은 지금은 용도가 바뀌었다.



600년 된 뽕나무
연못 주위에 여러 그루가 있다.




우리를 구경하는 어린이
사과에 꿀을 발라서 먹고 있다.



부하라 올드타운 한가운데 연못이 하나 있다.
호텔은 600년 묵은 뽕나무가 늘어선 생명의 물이 담겨 있는 연못 옆 골목에 준비되어 있다.
올드타운 입구다.
호텔 상태는 사마르칸트와 같다.
연못가 야외 식당에서 양고기 샤실리크 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막 점심을 끝냈는데 우리 일행이 도착한다.
우리가 뒤에 오는 줄 알고 도중에서 기다렸단다.





늦게 도착한 일행이 호숫가에서 점심을 들고 있다.



호텔 주인에게 가이드를 부탁해서 데려왔다.
가이드가 마땅치 않다.
날라리 족 같은 여자아이가 영어를 한다고 나타났다.
조금 있더니 한국어를 한다는 젊은 남자가 온다.
한국에서 2년간 일을 하다가 돌아온 지 몇 년 되었단다.
시원치가 않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 영어를 하는 여자를 데리고 갔다.
양탄자에 손으로 수를 놓는 집을 안내받아 갔다.
일하는 모습들이 열의가 없다.
인사로 무엇인가 팔아주어야겠기에 음식 그릇을 덮는 보온 덮개의 값을 물어보니 $10이란다.
이곳 선생님의 한 달 봉급이 $80인 것에 비교하면 너무 비싸다.
장난삼아 반으로 깎았더니 가져가란다.
사마르칸트에서도 느낀 바이지만 민속공예전문점의 가격이 믿을 수 없었다.
가이드 둘이 모두 도움이 안된다.
돌아오는 도중에 안내를 자청한 두 사람을 모두 돌려보냈다.
마침 타슈켄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호텔 주인 딸이 와 있었다. 영어를 곧잘 해서 가이드를 맡겼다.
아버지가 따라다니면서 도와주었다.




호텔주인 딸이다.
가이드를 이 학생으로 바꾸었다.

브하라는 소그드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가 있는 도시이다.
796년 아랍인들의 침입을 받아 언어와 종교가 이슬람화되었다.
10세기경 호레즘 왕국의 전성기에는 과학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메드레세(교육기관)가 세워졌으며 많은 시인과 과학자가 배출되었다.
14세기에는 “쉐이크 바하우트딘 낙슈반디” 라는 유명한 종교 지도자가 나와 종교 이론을 정립, 설파하여 중앙아시아는 물론 카프카스 지방까지 널리 유포되었다.
부하라의 여러 건물은 호레즘 왕국 시절부터 지어져 칭기즈 칸의 침입으로 많이 부서졌으나 티무르제국 때부터 많이 복원되었다.



거리모습
다음 날 시내 관광을 시작했다.

사마르칸트와는 달리 사람들이 활기가 있고 친절하다.
외부인에 대한 관심이 훨씬 크다.
호텔에서 나와 연못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는데 연못 옆 작은 공원 같은데 동상이 하나 서 있다.
귀가 크고 키가 작달막한 노인이 당나귀를 타고 있는 동상인데, 신은 신발은 뒤꿈치 쪽이 벗겨져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발가락에 걸려 있고 얼굴에는 편안한 웃음을 띠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현명한 바보”의 동상이란다.



옛 賢者의 동상(현명한 바보)
연못을 벗어나 그 옆의 메드레사였던 건물을 돌아보고 구시가지 쪽으로 향했다.




기념품 가게
연못 옆 골목으로 들어서서 올드 타운의 중심부를 향해 들어가니 초입 오른쪽에 둥근 지붕의 환전소(타키 사라판)가 나온다.
거기서부터 오른쪽으로 둥근 지붕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이들은 “타키”라고 하는 16세기에 지어진 시장건물들이다.
건물들에는 모자가게(타키 케리파크 푸르샨), 금, 은 보석가게(타키 자르가) 같은 전문점들이 들어 있다.
부하라의 이 역사지구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타키로 가는 길에서


타키 안으로 들어가면서 둥근 지붕을 연결하고 있는 천장.



중앙 천장

카펫 가게


전통 무늬의 천

타키 뒷골목 풍경

4개의 기둥이 있는 메드라사
여러 개의 메드레사 건물들을 지나 동네 안으로 들어가 “칼리얀 미나렛”을 목표로 갔다.
가까이 가니 거대한 왕궁과 메드레사가 마주 보고 있는 큰 광장이 나오고, 왕궁 바깥쪽 코너에 “칼리얀(큰) 미나렛(첨탑)”이 우뚝 서 있다.
미나렛은 기도시간을 알리는 장소이고 망루와 사막의 등대 역할도 한다.



왕궁 앞 광장

왕궁
칼리얀 미나렛!

부하라의 상징이고 가장 오래된 미나렛이다.

하루에 다섯 번 기도시간을 알려 주는 외에 밤에는 첨탑 꼭대기에 불을 밝혀 망망한 사막에서 밤길을 재촉하며 오아시스를 찾아오는 대상들에게 등대 역할을 해주던 중앙아시아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이다.
칭기즈칸도 이 미나렛을 보고 부하라를 침공하였고 그래서 이 칼리얀 미나렛은 파괴되지 않았다고 한다.
높이가 47m에 내부의 계단은 105개인데 층계가 어찌나 높이 만들어져 있던지 올라갔다가 내려와서는 며칠 간 넓적다리 근육이 아파서 고생했다.



칼리얀 미나렛

칼리얀 미나렛


청색 타일로 치장한 아름다운 이 첨탑은 18-19세기 부하라 한국(汗國)의 수도였을 때에는 죄수들을 부대에 넣어 이 첨탑 꼭대기에서 던져서 죽였다고 해서 “죽음의 첨탑”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미나렛에서 내려다본 광장
광장에는 그림을 파는 사람, 모자를 파는 사람, 각종 수공예품을 파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어린애들은 “붐붐” “붐붐”하며 따라다닌다.
무슨 말인가 하고 안내인에게 물으니 무엇이든지 도와달라는 말이란다.
학생들은 볼펜을 달라고 한다.
공산품이라고는 하나도 생산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무엇이든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가 선물이 될 수 있다.




어린이들

칼리얀 미나렛에서 본 부하라 시내


칼리얀 미나렛에서본 부하라 城 쪽 모습.
城이 舊 市街의 중심에 있다.
城壁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져 있다.

왕궁을 돌아 나와 뒤쪽으로 돌아가서 마켓으로 갔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여기에도 과일과 곡식이 주종이고 堅果類와 乾果 類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시장 변두리에는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고 빵과 케밥류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순박하다.
시장이지만 언성을 높이거나 다툼을 하는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쌀 1kg과 석류 몇 개를 샀다.



시장풍경

여인들
시장을 돌아 나와 버스를 타고 모퉁이를 돌아 “차슈마 아유프”로 갔다.
오른쪽으로 반쯤 허물어진 성벽을 지나서 조금 가면 자그마한 광장에 현대식 건물이 한쪽에 있고 맞은 편에 몇 개의 둥근 지붕이 있는 오래된 건물이 있다.
“차슈마 아유브”가 있는 건물이다.
둥근 지붕은 칭기즈 칸의 침입 때 일부가 망가진 것을 티무르가 복원했단다.
“차슈마 아유브”는 聖書에 등장하는 “욥의 샘”으로 욥이 지팡이를 세웠더니 샘이 솟았다고 한다.
지금도 건물 내부에 있는 우물에서 샘이 솟고 있고 우물 옆에는 수도꼭지가 세 개 설치되어 있다.



차슈마 아유브(욥의 샘) 간판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 문화유산이다.



샘을 보호하는 건물
건물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계단을 몇 개 올라가 “키로프공원”으로 갔다.
키로프공원은 상당히 규모가 크다.
공원 안에는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가 있다.
이 영묘는 이슬람 통치 초기인 900년에 건설된 것으로 부하라에 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란다.
벽돌을 쌓아 올린 기법만으로 변화를 주어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태양의 위치에 따라 흙벽돌의 무늬가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단다.
여기에 사용된 진흙 벽돌은 수천 년을 견딜 수 있게 낙타 젖으로 반죽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공원 안 중앙광장 못 미쳐 오른쪽 숲 속 광장에 아담하게 서 있는 회갈색의 이 건물은 중앙아시아 건축물의 記念碑的인 존재로까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는 샤만(Saman)왕조의 건국자 이스마일 샤마니가 부친을 위해 51년간(892-943) 지은 묘역이다.
그 후 왕족들이 계속 묻혀 왕족 묘가 되었으나 10세기 말 카라한(Klahan) 왕조에 멸망한 후 모래 속에 묻혀 있어서 칭기즈칸의 침략 때 무사했다.
20세기 초 소련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되어 그 역사성과 작품성으로 중앙아시아 최고의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유네스코지정 문화유산이다.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로 가는 키로프 공원 입구에서 시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두 여인을 만났다.
가는 길이 우리와 같은 방향이다.
장바구니에는 과일이랑 빵이랑 음식물들로 차 있다.
복장이 좀 특이하다.
둘이 모두 푸른색 원피스에 흰색 천으로 만든 숄을 머리에서부터 썼는데 거의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두 사람이 喪中이라 喪服을 입은 것이며, 이곳에서는 5-6개월간 상복을 입는단다.
이스마일 영묘 가까운 벤치에 앉아서 쉬는 그들과 한참을 쉬었다.




喪服을 입은 여인들
점심은 韓式.
국수 말이 인지 냉면인지 분간은 안 되었지만 그래도 한식 냄새는 조금 난다.
식당은 현대식 건물의 2층에 있었는데 여러 군데 한글로 환영한다는 말과 정성을 다하겠다는 글들이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주인의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현대식 건물 2층에 있는 한식당 입구
점심을 먹은 후에 오전에 지나쳤던 부하라 城을 구경하러 갔다.



城과 시내

城壁

城 門樓
정문에 들어서자 왼쪽에 나무기둥으로 받쳐진 목조건물이 丹靑이 退色한 채 서 있고 천장에는 단청의 흔적이 있다.



女人과 城壁
7세기에 축성되어 몇 번을 개축한 城으로 18세기에 부하라의 왕이 살던 곳이다.
정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반 정도는 복구되어 있고 지금도 계속 복구 중이다.
성곽 외부의 축성 형태가 특이하다.
성벽이 활처럼 휘어지게 쌓아 올라가다가 어느 정도 올라가서는 직각으로 올라갔고 일정 간격으로 기둥으로 세웠는지 거대한 둥근 지지대가 역시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城 안의 시설

城 위의 사열대(?)
오른쪽 안으로 들어가면 한창 발굴 복원 중인 현장이 보이는데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발굴 복원 현장
돌아 나오려는데 어린아이가 “파노라마”라고 하면서 따라온다.
자꾸만 출구 오른쪽 뒤편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파노라마라고 한다.
무엇인지 있는 것 같아서 흥정하자니까 1인당 $3이란다.
그냥 나오려니까 $2로 떨이지고 그래도 반응이 없으니까 1인당 $1까지 내려간다.
엄 회장님이 12명에 $3이라니까 O. K.
우리를 데리고 뒤편에 있는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문 앞으로 가더니 경비원을 불러온다.
경비원이 열쇠를 들고 나타나자 엄 회장님이 $2만 하잔다.
그래도 O. K.
들어가 보니 부하라 왕궁의 발굴 현장이다.
시작은 했지만 비용조달 문제로 중단된 상태인 것 같다.
성벽 위에서는 부하라 올드타운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파노라마라고 했던 것 같다.
돌아 나오니 문에서 경비원이 기다리고 있다.
$2를 주니 즐거운 기색이다.
안됐다 싶어서 얼른 $1를 더 주니 환하게 웃는다.




성벽 위의 발굴현장
공식적으로는 외부인에게 공개금지 구역




성벽 위

城 위에서 본 舊 시가지
멀리 칼리얀 미나렛이 우뚝 솟아 있다..

16세기 부하라 한국(汗國)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이슬람 성직자 양성기관으로 또한 이름을 떨쳤단다.
지금 남아 있는 큼직한 건물들도 대다수가 메드레사 (수도원 검 학교) 건물이다.
지금은 용도가 달라진 곳이 많지만.
한낮에 칼리얀 미나렛 꼭대기에서 바라본 부하라의 올드타운은 왕궁과 모스크, 메드레사를 빼놓고는 모두 회갈색이었다.
해가 기우는 시간에 부하라 성의 성벽에서 바라본 올드타운은 갈색이다.
거의 모두가 흙벽돌과 흙으로 지은 건물들은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변하면서 부드럽게 모두를 감싸 안는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

부하라의 夕陽
아침에 제일 먼저 들렀던 메드레사 건물은 관광식당이다.
오늘 일정이 조금 일찍 끝나서 민속공연을 보기로 하고 예약하기 위해 가이드를 보냈다.
예약하되 12명이니 1인당 $5인 것을 조금 깎아 보라고 했더니 돌아와서는 도저히 흥정이 안 된단다.
할 수 없이 $5을 내고 보려고 갔다.
그런데 滿員이란다.
예약이 없으면 구경도 안된단다.
들어가 보니 관광객으로 가득하다.
관객이 많으니까 호기심이 더 발동한다.
서서라도 보겠다고 하니까 그것도 안된단다.
돌아서는 수밖에는 없다.
되돌아 나오는데 다시 부른다.
한쪽 구석에 7-8석을 마련해 준다.

모자라지만 비비고 앉았다.
민속 쇼라기보다는 의상 발표회다.
의상도 화려하지만 모델들의 미모가 의상의 화려함을 압도해 버렸다.
원래 우즈베크족이 대다수이고 그 외의 100여 종족이 섞여 사는 나라지만 너무나 뛰어난 몸매와 미모를 지녔다.
러시아 쪽 종족이 아닌가 생각된다.



디너쇼




동행한 조영선 회장님이 사마르칸트에서 출발할 때부터 컨디션이 안 좋았다.
부하라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연락해서 낮에 의사가 왕진했다.
상태가 많이 좋아진 듯 했으나 저녁 식사에 나오시지를 않는다.
방안에서 기척이 없다.
들어가 보니 침대가 흔들릴 정도로 떨고 있다.
해열제를 너무 많이 먹은 것 같단다.
페트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서 이불 속에 넣어 달란다.
처음에는 하나만 준비시켰다.
하나를 더 하란다.
하나는 끌어안고 하나는 발밑에 넣으라고.
엄 회장님이 얘기를 들으시더니 김태천 사장더러 가서 마사지하란다.
3분도 안 되어서 나왔다.
차도가 없단다.
엄 회장님이 뛰어들어가시더니 한참 후에 나오시면서 괞찬을 꺼야.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의사를 다시 불렀다.
만일 약물 과다복용(투약)에 문제가 있다면 의사가 가장 잘 처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금 후에 의사가 도착했다.
의사가 방 안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식사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예쁘게 화장한 조 회장님이 아침 식사 테이블에 나오셨다.
어제 의사가 방에 들어오더니 끌어안고 알라신에게 기도를 하더란다.
그러면서 염려 말고 히바에 갈 준비를 하라고.
본인의 의지와 의사가 온 힘을 다한 처방이 여행 분위기를 다시 살려주었다.
히바는 또 어떤 분위기일까?
언제나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떠날 때는 첫 데이트 때처럼 마음이 설렌다.



<실크로드>

실크로드란 중국의 시안(西安에서 이스탄불 또는 지중해 연안까지 연결하던 고대의 東-西 무역로다.
실크로드란 용어는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이 처음 사용했는데, 이 길을 통해 중국의 비단이 서아시아와 유럽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중국의 비단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방에 전해지면서 베네치아의 유리 같은 서방의 물건들도 동양에 전해졌다.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동-서 문명의 교류도 함께 이루어졌다.
불교와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등이 중국에 전달되었으며 중국의 주철(鑄鐵), 양잠, 제지법 등은 서방에 전달되었다.
실크로드는 크게 3가지 주요 도로로 나뉘는데, 천산북로(天山北路), 천산남로(天山南路), 서역남로(西域南路)이다.
천산북로는 “하미”를 거쳐 선산산맥 북쪽 기슭을 지나는 길이다.
천산남로는 “하미”에서 천산산맥 남쪽을 지나는 길로, 쿠처(庫車,Kucha), 카슈가르(喀什,Kashgar)를 지난다.
서역남로는 둔황(敦煌,Dunhuang)에서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을 통과해 호탄(和田,Khotan)을 지나는 길이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중동부에 위치한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주요 도로들이 만나는 곳으로,
“실크로드의 십자로”라고 불렸던 곳이다.
이곳에서 부하라(Bukhara)를 거쳐 흑해 남부나 지중해 동부의 도시까지도 갈 수 있지만, 대부분의상인들은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중간지점의 도시에서 만나 필요한 물건들을 구한 뒤 돌아갔다.
육상의 실크로드 외에도 “광저우”(廣州)에서 스리랑카를 지나 인도양을 건너 “시리아”에 도달하는 해상 실크로드도 있었다.
(서진근 편저 UN 회원국 다이제스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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