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zbekistan – Khiva

12월 01, 2018

히바(Khiva)


2003년 10월 8일-9일

기원전 2000년경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하여 호레즘 인이 터전을 잡았던 곳.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호레즘 왕국은 동서교역의 중계지로 번창하여 한때는 수도인 쿤야 우루겐치의 인구가 1백5십만을 넘었었다.

바로 그 왕국의 두 번째 수도 히바!

Khorezm 왕국은 1,210년 사마르칸트로 천도할 때까지 히바를 수도로 하여 번창하였다
히바는 엷은 벽돌색 모래에 메말라 보이는 풀들이 덮고 있는 붉은 사막이라는 “키질쿰” 사막의 한가운데 아무다리야 강 하류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다.
지금도 남쪽과 서쪽에서는 모래바람이 계속 불어오고 있다.



중국 장안에서 출발한 대상들은 우루무치를 거쳐 북쪽으로 카자흐스탄 쪽으로 텐산 산맥을 넘어 오투라를 거쳐 시르다리아 강을 건너 히바로 들어오거나, 카슈가르를 거처 텐산 산맥을 넘어 사마르칸트, 부하라를 거쳐 히바에 도착한다.

부하라에서 히바까지는 키질쿰(붉은) 사막을 500km나 통과해야 한다.

이러한 악조건을 극복해 가면서 동서에 문물을 실어 나르는 대상들과 함께 번영을 구가한 Khorezm 왕국은 13세기에 몽골초원을 통일한 칭기즈칸이 대상로의 안전확보를 위해 협력하자는 제의를 뭉개버리고 사신들을 처형함으로써 칭기즈 칸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다.

실크로드의 동서양의 접점에 있는 히바는 한동안 번영을 구가하며 화려하게 인류문화의 한 장을 장식하였으나 그에 못지않은 수난의 역사도 함께하고 있었다.

티무르제국이 멸망한 후 3개의 한국(汗國)으로 분할되었던 호레즘 지역에 “샤이바니 왕조”의 한 왕후인 “일바르스”가 1,512년 우루겐치를 수도로 독립왕국을 건설하고 히바 汗國을 세웠다.

17세기에는 히바로 수도를 옮겨 번성하였고 1,920년 러시아에 멸망할 때까지도 실크로드 통로 중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곳이었다.

이른 아침 우리 일행은 부하라를 출발했다.

붉은 사막이라는 곳에 대하여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고!

부하라 시내를 벗어나니 사막에서 자라는 키가 작고 억세고 메말라 보이는 풀들이 자라고 있는 끝없는 벌판이 펼쳐진다.

부하라에서 히바까지는 500km.

자동차로 7시간이 예정되어 있다.

점심은 중간에 먹을 곳이 없으니 히바에 도착해서 먹어야 한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남은 음식들(빵과 계란, 식수)을 준비하고, 비상식량인 소주와 마른오징어를 꺼내 싣고 계속 달린다.




사막에 무슨 용도인지 도로 양쪽에 일렬로 갈대 같은 풀을 심은 흔적이 계속되어 있다.

아무리 달려도 똑같은 풍경이다.
2시간 반을 달렸다..
도로가 고갯길이 없고 지루할 정도로 직선 이어서 생각보다 빠르게 거리를 좁혀 갔다.
도중에 사람도 없는데 낙타 일곱 여덟 마리가 도로 양옆에서 한가로이 메마른 풀을 뜯는 모습을 보며 이곳이 사막이구나 하는 생각에 모두 내려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야생낙타(?)

인적없는 사막 한가운데 낙타 몇마리가 풀을 뜯는다.

시간도 어지간히 되었다 싶어서 여기서 간식을 하자고 제안했더니 일행 중 한 분이 사막이 나오면 거기서 하자고 한다.

누구인가
“이곳이 사막이잖아” 하니까. ”
이거 말고 모래사막 말이야”
“모래사막이 안 나오면 어쩌지?”
“안 나오면 그만이지”

한 삼십 분을 더 달렸다.
오른쪽에 모래 언덕이 보인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내렸다.

모래 언덕을 올라가 보니 언덕 넘어는 먼저와 똑같은 풍경이다.
모래 언덕은 기껏해야 테니스 코트 두면 정도의 넓이이다.
沙漠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모래벌판이나 모래언덕을 연상한다.
Desert를 沙漠으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답게 모래만 펼쳐져 있는 말 그대로의 사막은 얼마 안된다.



히바 가는 길
 거기에서 간식을 즐기며 기념사진도 찍었다.
지금까지 달려온 사막은 엷은 벽돌색 모래에 메말라 보이는 풀들이 깔려 있는, 더러는 은은한 향기를 뿜는 연한 보라색 꽃이 피어 있는 그런 풍경이다.
준비해온 빵, 계란, 식수는 거의 찾는 사람이 없다.
마른오징어와 소주를 들며 사막의 정취를 흠뻑 느꼈다.






오징어 안주에 소주 한잔!
뙤약볕 아래서 웬 소주?



그 메말라 보이던 풀들이 자세히 보니 모두 파르스름하게 살아 있다.
어떤 것은 잎사귀에 듬뿍 물을 머금고 있다.
나는 사막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저 간접적으로 본 사하라 사막이나 애리조나 사막 정도이다.
이번에 본 붉은 사막 건너에는 검은 사막이 있단다.



아무다리야 강
 아랄 해로 흘러든다.




사막에 핀 꽃. 향기가 은은하다.
무슨 향수의 원료로 쓴단다.

인구가 23만이나 되는 우르겐치를 지나 30km,
히바에 도착한 안내인은 해가 기울기 시작한 시간에 우리를 히바성 서문으로 데려간다.
아마도 히바성 외형을 보여 주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성곽의 축성형태가 특이하다.
비스듬히 올라가기 시작한 기초는 어느 정도 올라가면 다른 성들처럼 직벽으로 올라간다.
일정한 간격으로 밑 부분은 넓고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둥그스름한 기둥이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히바성 외벽
 다시 동문 쪽으로 오다가 중간 문으로 들어와 히바성 내의 도시 “이촌 킬라”의 골목에 있는 호텔로 데려간다.
호텔 식당에 점심이 준비되어 있다.
오랜시간 차를 타고 오니 모두 오후에는 관광은 쉬고 내일 하잔다.
가이드가 와 있었다.
우리가 오후는 쉬겠다고 했더니 낙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우리는 내일 만나면 되지 않겠나 생각하면서 쉬었다.




우리가 투숙한 호텔
 城 안쪽 이촌 킬라에 있다.
두어 시간 쉬고 나니 피로가 풀린다.
다섯 시 가까이 되었다.
성곽의 규모로 보아 두 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
히바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으니 오늘은 사진을 찍어 놓고 내일은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겉모습만 보며 한 바퀴 돌았다.



여인들

히바성 내벽
 우리가 점심을 늦게 먹은 관계로 저녁을 7시에 하자니까 자꾸 6시에 하란다.
저녁상에 맥주 2병을 시켰더니 보드카 1병을 더 가져오면서 선물이란다.
저녁 식탁은 정원에 준비되었다.
밝은 달밤에 낭만적인 분위기에 싸여 저녁 식사를 즐겼다.
나중에 보니 그날이 호텔 주인의 생일이고 식당에는 손님을 초대할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악사와 가무를 하는 사람들도 초대되고.
우리에게 준 보드카도 주인이 자기 생일을 자축하는 뜻에서 준 것 같다.
무엇인가 선물은 주어야 하겠는데 줄 것이 없다.



잔칫상

춤추는 무희




얼큰한 기분에 휘영청 밝은 달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서넛이 무작정 대문을 나섰다.
좁은 골목을 나와 성벽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우리 모두의 입에서 아!………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정경에 더는 말을 잇지 못한다.
말라서 회색빛 도는 흙벽돌에 회색빛 흙으로 치대어 바른 성곽, 회색빛 벽돌집, 흙길이 수분이 없는 공기 때문에 유리알 처럼 빛나는 달빛을 받아 부드럽고 은은하기 그지없는, 이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기분으로 마냥 걷기만 한다.
그 옛날 누구인가 대동강가 부벽루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다가 붓을 들고는 …….했다는 이야기가 불현듯 생각이 난다.



히바의 보름달
 한참을 걸었다.
어느 메드레사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불빛이 흘러나온다.
들어가 보니 까페다.
높은 천정에 넓은 홀의 분위기가 이국적이다.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손님은 별로 없다.
시원한 맥주 한잔을 하고 일어섰다.
호텔에 돌아오니 잔치가 무르익었다.
이슬람교도들이지만 맥주와 보드카도 제법 마신다.
그러나 떠들썩하지는 않다.
손님들이 나와서 악사와 무희들에게 팁을 주면서 주인공의 볼에 키스해 주라는 요구를 한다.
차분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아침에 가이드가 왔다.
어제 왔던 젊은 남자가 아니고 중년의 아주머니다.
가이드들이 안내를 맡는 순서가 날짜별로 되어 있는 모양이다.
어제 우리가 관광을 안 한다고 할 때 실망하는 표정을 지은 이유를 이해할 것 같다.
가이드가 우리를 서문 밖으로 데리고 간다.
서문 밖에는 대수학에서 “알고리즘”(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 이론을 발견한 우르겐치 출신의 수학자 “알 콰리즈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쪽 벽에는 실크로드 교통도가 그려져 있는데 동쪽으로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의 평양, 경주, 부산에서 끝난다.경주 왕릉의 부장품에서 서역의 무기와 생활용품이 발견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대수학의 거두 “알 콰리즈미” 동상
 대수학에서 알고리즘 이론을 창시한 우르겐치 출신의 수학자.



살크로드 교통도
 히바성은 둘레가 2.3km이고 동, 서, 남, 북에 문이 있다.
동서 간의 거리는 400m, 남북 간의 거리는 700m이고 동서 문을 잇는 거리가 메인 스트리트이고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히바성안에는(이촌 킬라) 현재 두 개의 왕궁, 6개의 모스크, 43개의 메드레사(학교), 그리고 몇 개의 마오솔레움(묘지) 건물을 가지고 있고, 16세기부터 19세기에 지어진 많은 건축물을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곽은 부하라성과 같은 외형이 특이한 축성 형태를 갖추고 있고 흙벽돌로 쌓고 짚과 흙을 이겨서 겉에 발라 축성하여 수많은 세월을 늠름한 모습으로 굳건히 이겨 내고 있다.
서문을 들어서면서 눈에 확 띄는 것이 미완성 미나렛(칼타 미노르 미나렛)이다.
짙은 청색 타일로 감싸 돌린 아름다운 이 미나렛은 20여m 쌓아 올라가다 중지되었다.
부하라를 바라볼 수 있게 120m을 쌓아 올리도록 설계된 이 미나렛이 중단된 사연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는 있었다.
추진하던 왕이 죽은 후 다음 왕이 건축을 포기했다는 이야기와, 설계자가 완공 후에 부하라가 안 보이면 처벌 받을까 봐 중도에 도망을 쳤다는 설 등등.

이 미나렛이 완성되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미완성 미나렛


길거리 기념품 상에서


부하라 성에는 여러 개의 미나렛이 있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은 이슬롬 후자 메드레사에 있는 첨탑이다.
푸른색 타일을 주로 사용하여 색동옷처럼 층층이 넓고 좁은 띠를 둘러 올린 외관이 아름답고 높이도 부하라의 칼리얀 첨탑보다 10m가 높은 56m이다.
그리고 일반 첨탑의 기능에 전망대와 야간에는 사막의 등대 기능까지 하고 있단다.



멀리서 본 이슬롬 후자 메드레사와 미나렛

첨탑의 아름다운 문양과 색조

여인들

아이들
 이지방은 이슬람에 정복되기 전에는 조로아스터교와 불교를 믿고 있었다.
그래서 “현장”이 이곳에 대한 기록에서 이곳 사람들은 불을 숭배한다고 썼던 모양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태양, 불 ,공기, 땅을 신성시하고, 인체는 불결한 것으로 여겨서 사람이 죽으면 땅속에 묻지 않고 밖에 두어 육탈된 후 지상의 석관에 뼈만 보관한단다.
오래된 조로아스터교인 들의 무덤이 현재도 남아 있다.



조로아스타교도의 무덤
 地上 屋外에 있다.

주마마스지드(모스크)는 10세기에 처음 건축된 이슬람 사원이다.
주마는 금요일이라는 뜻이다.
시슬람교도들이 사원에 나와서 기도드리는 날이다.
이 사원은 212개의 나무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평면 지붕의 사원이다.
13세기 칭기즈칸이 이곳을 침략했을 때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지만 이 주마 모스크만은 온전했단다.
기둥이 많아서 마구간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14세기 말 티무르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으나 18세기에 대화재로 많이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고 1990년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복원작업을 하였단다.




주마 마스짓
 천 년 된 기둥은 두세 개 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기둥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오래 보존되도록 목화씨 기름을 듬뿍 먹여 놓아 묵직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조를 띄고 있다.
원래는 지붕에 여러 개의 창문을 내어서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아름다운 색조와 분위기를 보여주어 왔었는데,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할 때 중앙의 창문만 남기고 모두 막아버려서 지금은 옛날의 분위기를 볼 수 없단다.
가이드가 20년 전에 보았던 그 황홀했던 분위기를 지금도 기억하면서 미친 짓을 했다고 못내 아쉬워한다.



주마 마스짓

13세기 우르겐치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레슬러였던 “파라본 마무드”는 이슬람교리에 따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을 쫓아 내는 이슬람 악습을 타파하여 여자들의 권익을 확보해 준 지도자로 지금도 이곳 이슬람인들이 가장 존경하며 聖人으로 받드는 인물이다.




파라본 마무드 마오솔레움(묘역)
 그가 사망한 후에도 참배자가 많아 지금의 마오슬레움을 지어 그 안에 石棺을 모셔 놓았다.
세밀하고 아름다운 터키석 색깔의 타일로 화려하게 치장한 석관은 정말 아름답다.
석관을 모셔 놓은 그 건물 안을 성역화시켜놓고 있다.
영묘 건물에 들어서면서 우측에 양탄자를 깔아 놓은 기도하는 장소가 있고 그 정면 벽에 얼굴에 검은 수염이 나고 레슬러 복장을 한 건장한 사내의 그림이 걸려 있다.
파라본 마무드다.
이곳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참배하고 기도하러 몰려들고 있다.
관를 모신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넓은 방에는 명망 있는 성직자가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해 주고 있다.
축복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닭이나 빵 등 간단한 먹을거리를 가져오거나 약간의 돈을 헌금하여 사례한다.




파라븐 마무드

성자에게서 축복을 받고 있는 모자
 마오솔레옴 뜰 한가운데 우물은 신비한 샘물로 여겨져 다녀가는 사람들이 꼭 한 모금씩 마시고 간다.
이곳에 와서 기도하고 이 물을 마시면 불임 여성도 아기를 낳을 수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란다.



신비의 우물
 할례를 받기 전에 축복을 받으려고 예쁜 옷을 치려입고 엄마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아온 아이들을 만났다. 이곳에서는 사내아이들은 세 살, 다섯 살,일곱 살에 할례를 받는단다.



할례를 받으러 가는 어린이

술탄이 되어보는 기분으로


우리는 히바 성을 서문으로 들어가서 동문 쪽으로 관광을 진행했다.
히바성은 외성과 내성이 있다는데 내성은 뚜렷한 구분이 안 된다.
왕궁은 규모가 꽤 크다.
외벽이 성처럼 높게 올라가 외부와 완벽히 차단되어 있다.
왕궁 정문을 들어서자 첫 번째 궁정이 나온다.
들어서면서 바로 왼쪽에 왕이 사는 곳이 있다.
그 옆으로 연이어 4개의 사는 곳이 있는데 이것이 네 명의 정비의 사는 곳이란다.
사는 곳 중앙 앞쪽에는 조각이 아름다운 나무 기둥이 하나씩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그 맞은편 이 층에 여러 개의 사는 곳이 있는데 궁녀들의 사는 곳이란다.
왕이 사는 곳은 지붕이 다른 것보다 약간 앞으로 나오고 높다.
기둥도 당연히 굵다.
모든 천장에는 각기 다른 문양의 단청이 되어 있다.
궁녀들이 사는 곳 천장에도 단청이 되어 있다.
궁녀들은 나이가 12세에서 15가 적령이고 16세가 넘으면 출궁 당한단다.
18세면 완전히 처녀로서는 퇴물 취급당했단다.
이 왕궁에는 3개의 궁전과 정원이 있는데 다른 하나는 전시실로 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공개다.




왕궁의 주춧돌
 문양이 조로아스타교 문양이다.



왕이 거소 천장
 다른 곳보다 약간 높고 앞으로 나왔다.



천장의 단청

옥좌

궁정의 겔
 추울 때는 겔에서 불을 때며 생활한단다.
오른쪽에서 설명하고 있는 여자가 가이드이다.
서문으로 들어서서 왼편에 있는 “쿠크나 아르크”는 구왕궁으로 규모는 작으나 통치 권력을 행사했던 곳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다.
왕궁 입구 왼쪽에 감옥이 있다.
죄수들을 10일간 가두어 두고 조사를 하는 곳이다.
조사가 끝나면 왕궁 앞 광장에서 사람들이 보는 데서 죄질에 따라 처벌을 한다.
간통한 남자는 거꾸로 생매장하고, 여자는 고양이와 함께 자루에 넣어 고양이가 물고 할퀴는 괴로움을 당하게 한다는 등등.



아르크(城, 구 왕궁)
 왕궁 안에는 주조소도 있다.
금화, 은화, 동전을 만들던 곳이다.
출입구는 하나뿐이고 좁다.
만들어 쓰던 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러시아 점령 후에 발행된 지폐는 적절한 종이가 없어서 실크 천에 인쇄한 화폐도 전시되어 있다.



실크에 인쇄한 돈
 왕의 정전 앞뜰에는 1m 정도 높이 단을 쌓아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추울 때 겔을 짓고 살기 위한 곳이란다.
본 건물에는 천장이 높고 앞이 개방되어 있어 난방할 수가 없어서 겔로 옮겨와 불을 지피면서 살았단다.
우리는 히바 성을 서문으로 들어가서 동문 쪽으로 관광을 진행했다.
이 도로가 메인 스트리트 이다.
서문은 솟을대문 식으로 지어져 있는데 동문은 긴 터널식으로 건축되어 있고, 터널 안 양편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
대상들의 숙소로 쓰였단다.
동문 밖에는 광장이 있고 한쪽에 모스크와 터키식 목욕탕이 있다.
목욕탕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민속춤 공연장에서




동문은 부하라를 향해 있다.
부하라에서 출발한 대상들은 500km의 붉은 사막을 2주일간의 여행 끝에 히바의 동문 밖에 도착한다.
도착해서는 진귀한 물건들을 풀어놓고 한바탕 난장을 벌리고 나서는 시내를 통과해서 서문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서문을 나서서 가면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고 카스피 해를 따라 내려가다가 시리아나 터키를 향해 간다.
장사하고도 세금을 떼어먹은 사람은 귀 떼기를 나무기둥에 못질하여 세워놓는 형벌을 받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모욕을 주었단다.
또한 이곳 광장에서는 노예시장도 섰는데 1920년 러시아의 침략이 있기 직전까지도 노예거래가 있었단다.노예로 끌려 온 사람 중에는 페르시아인 이 제일 많았고 러시아인과 독일인들도 있었단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니 지금도 동문 밖 광장에서 대상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특유의 향료 냄새가 풍겨 오는 듯 하다.




골목 풍경

해 질 무렵


히바 주변에는 300여 개의 마을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파밀 고원에서 발원한 아무다리야 강은 급경사를 흘러내리면서 많은 양의 토사를 싣고 와 히바 근처의 평야 지대에 와서는 물 흐름이 느려지면서 토사들을 쌓아 놓아 물길을 바꾸며 아랄 해로 흘러들어갔다.
BC 2,000년경부터 이 지역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강가에 정착촌을 만들었다.
토사가 쌓여 물길이 바뀌면 살던 마을을 떠나 다시 물 가까운 곳에 마을을 만들기를 수백 번.
버려진 마을들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온 모래에 묻혀 천년, 이 천년을 잠자다가 최근에 발굴되기 시작했다.
비가 많지 않고 극도로 건조한 키질쿰 사막은 옛 마을의 유물들이 온전히 보존되는데 기여하고 있단다.
이렇게 보존되고 있는 마을이 300여 개나 된단다.
히바는 1968년까지는 외부와의 접촉을 금지하고 있었다.
외로운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그 옛날에는 키질쿰 사막의 한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였지만 오가는 대상들과 더불어 영화를 누렸던 히바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고, 920년 완전히 멸망하고 1924년 히바한국의 영토가 우즈베키스탄에 편입되면서 자존의 희망을 잃은 히바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히바시내 풍경
 역사는 그렇게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인지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면서 히바도 얼굴을 감추고 있던 베일을 벗고 세상에 얼굴을 보여야 할 때가 되어 옴을 알고 준비했다.
외부인의 영접 준비를 끝내고 1968년부터 개방되었다.
히바인 들은 다소 무뚝뚝하고 방어적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사람들은 사근사근하지는 않지만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한다.
저항적이거나 도전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없다.
아이들이 무엇이든지 도와달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애걸하지 않는다.
아침이면 자기 집 앞을 쓸고 물을 뿌린다.
길거리에는 그들이 즐기는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버린 껍질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시로 청소를 한다.
담배꽁초를 버릴 수가 없다.
선조가 대대로 살아온 곳을 앞으로 어떻게 가꾸어 가야 할지를 모두가 아는 것 같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48세인데 결혼을 한 지가 3-4년 된단다.
아직 아이는 없고. 일본에 가서 1년 반 동안 일본어를 공부했단다.
영어가 유창하다.
자기가 가이드생활을 하면서 한국사람을 두번째 만나는 것이란다.
몇 년 전 국제회의에 참석차 온 북한사람들이 처음이고 두 번째가 우리란다.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단다.
북한사람들은 자기가 보기에 못사는 것 같은데 “칸”처럼 거만하게 행동하더란다.
우루겐치가 사는 곳인 가이드가 공항으로 가는 우리 차에 편승했다.
우즈베키스탄과 가까운 나라들인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등은 같은 문화권이기 때문에 관광객이 별로 오지 않는단다.
문호를 개방하면서 1970년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다녀갔고,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인들이 주로 다녀간단다.
가이드가 우르겐치 공항 가는 대로변에서 내리면서 넌지시 얘기한다.
다시 히바를 오려거든 자기에게 연락하라고, 지금 우리가 보고 가는 것은 히바의 극히 적은 부분뿐이라고!





면적 : 447,400km2.
인구 : 약 2839만명 (2012)
종족구성 : 우즈베크인 80%,러시아닌 5.5%,타지크인 5%,
카자흐인3%,카리칼팍인 2%, 타타르족 1.5%. 고려인 0.8%.
종교 : 이슬람 76%, 동방정교 1%, 유대교 및 기타 5%.
언어 : 우즈베크어, 러시아어.
화폐 : 슘(1$:1,637Soum)(2011년)
1인당 GDP: 1,529$(2009년)
수도 : 타슈켄트 (Tashkent)

略史

기원전 2000년경 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하고 BC 6세기 페르시아에 속했다.
BC 4세[기에는 알렉산더대왕에게 정복당했고, AD 8세기에는 아랍의 침공으로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이 때부터 사마르칸트, 부하라, 타슈켄트, 코칸트 등이 종교의 중심지로, 동 서간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8세기 중엽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군 고선지의 침공을 받았으나 격퇴하고, 11세기에는 셀주크 투르크에 속했다.
13세기에는 몽골 사신을 살해하여 칭기즈칸의 침략을 받아 초토화되었고, 16세기 초까지는 티무르제국의 중심 도시였다.
16세기 이후 부하라, 히바, 코칸트汗國이 건국되고 번성기를 누렸다.
19세기 들어 제정러시아가 진출하여
1868년에 부하라한국, 1873년에 히바한국, 1876년에 코칸트한국을 병합했다.
1917년에 공산화되고,
1918년 4월 투루크스탄자치공화국이 되었다.
1920년 부하라와 히바지역이 독립인민공화국이 되었다가
1924년 투르크멘공화국에 병합되었다.
1924년 우즈베크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고,
1925년 5월 소련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829년 타지키스탄이 분리되고,
1936년 러시아에서 카라칼타키아자치공화국이 편입되었다.
1980년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환경문제가 노출되고, 민족주의 운동과 이슬람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1990년 3월 25일 대통령제가 도입되고,
1990년 6월 20일 국가 주권을 선포하고,
소련연방의 해체 분위기를 타고 1991년 9월 완전히 독립했다.
1991년 8월 구소련의 보수파가 구테타를 시도했으나 진압되고 ,
1991년 12월 직선 대통령에 카이모프가 당선되었다.
1992년 대통령중심의 민주 공화제를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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