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eyang

11월 15, 2018

中國南方文化探訪 (11) – 웨양(岳陽) = 岳陽樓, 洞庭湖, 屈原嗣堂



2008년 4월 5일(비)

09시 40분, 長沙의 동부터미널.
예약된 버스가 취소되고 10시 1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51위안)
좌석표는 무용지물. 다행히 승객이 적어서 좌석에 앉아서 갔다.

12시 10분, 악양 터미널에 도착. 길 건너 호텔 和一賓館. 180위안.
武昌 가는 버스표 확보(09시 30분, 100위안)하고 택시(8위안)로 악양루로 갔다.



웨양(岳陽)은 2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도시로 삼국시대인 기원전 210년 직할시로 지정되었으며, 송나라 때 6km가 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도시가 되면서 웨양이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악양(岳陽)은 湖南省 북쪽에 있는 도시로 서쪽으로는 동정호와 붙어 있고 북쪽으로는 양쯔 강과 접해 있다. 양쯔 강 중류에 있는 이 도시는 상류에 사천지방이 있고 하류에는 무한, 상해 등 대도시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다. 唐 나라 때부터 明代까지는 강남의 곡물 집산지로, 운송의 중계지로 번성했다

지금은 배편뿐만 아니라 京廣철도가 지나고 고속도로도 뚫려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동정호는 양쯔 강과 이어져 있다.

洞庭湖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로 “天下一표水”라고 부른다.
호숫가 언덕 위에는 삼국시대 吳 나라 대장군 魯肅이 수군을 훈련하며 감독하던 망루가 있던 자리에 716년 당나라 때 南樓를 창건한 것을 시작으로 5개 왕조가 누각을 지어 왔고 지금의 것은 淸代의 것을 모방해 1984년에 복원한 “岳陽樓” 다.


岳陽樓 正門
 기둥에 “洞庭天下水, 岳陽天下樓”



입구에 들어서면 “唐,宋,元,明,淸”의 五朝樓閣 미니어쳐가 세워져 있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멀리 악양루가 보인다.


五朝樓館
 당, 송, 원, 명, 청나라때 세운 누각들을 미니어쳐로 지어 정원에 전시해 놓았다.



누각들






魯肅(172년-217년)의 흉상
 노숙은 원래 안후이 성 定遠 사람이다.
삼국시대 오나라에서 주유와 함께 손권을 도와 나라의 기틀을 다진 명신이다.
노숙은 동정호에서 수군을 훈련시켜 강한 수군을 바탕으로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조조의 백만대군을 물리치는 기초를 쌓았다.
이때 수군훈련을 독려하기 위해 동정호 언덕 위에 망루를 지은 것이 이 자리에 누각을 짓게 되는 효시가 되었다.


詩碑廻廊
 오조루관을 지나 악양루로 올라가는 길 양편에 이곳을 다녀간 시인 묵객들의 글을 새긴 비석들을 모아 진열한 회랑이 있다.


악양루로 가는 길

악양루



당의 개원년간(713~714)에 지방 장관이었던 장설(張說)이 당대의 여러 재사(才士)와 더불어 누상(樓上)에서 시를 읊고 즐긴 곳으로 유명함.
화재로 여러 번 소실되고 역대 왕조에서 다시 지었다.
청대에 지은 것도 청대 말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84년에 복원하였다.
높이 21.35m의 3층 누각이다.

무한의 “황학루”, 남창의 “등왕각”과 함께 강남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악양루에서 내려다본 동정호




악양루에서
 악양루에는 두보, 한유, 맹호연, 백거이 등등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다녀갔다.
다녀간 이들이 남긴 글과 인물초상을 모아놓았다.










악양루 바로 옆에 자그마한 정자가 하나 있다.
이름 하여 “三醉亭”
그 안에는 “중국 八仙” 중 한 분인 여동빈 像이 그려져 있다.

여동빈에 대해서는 중국에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 때인 797년에 태어나 종리권에 사사하고 종리권의 스승인 고죽진군에게서 도가의 비전을 전수받고, 여산에 들어가 화룡진인에게서 검법을 배워 강호에서 좋은 일 하며 노닐다가 100세가 지나서 무한의 황학루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했다는 신선이다.


三醉亭

여동빈 소개

여동빈 그림과 시

여동빈이 악양루에 올라 읊었다는 詩,
<自詠 = 스스로 읊노라>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팔방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은 흩어지고 둥근 달만 중천에 외로이 떠 있네.

망망한 우주에 사람은 많고도 많은데,

사내대장부라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200년 뒤 송나라 때 등자경이 파릉군 태수가 되어 악양루를 보수하고 잔치를 열었을 때 여동빈이 나타나 술을 마시고 시 한 수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단다.
잔치에서 여동빈이 읊은 詩
朝遊東海暮蒼梧
아침에 동해에서 놀다가 날이 저물어 창오군 ( 광서성)으로 간다.

袖裏靑蛇膽氣粗
소매 속에 들어 있는 短劍(靑蛇)은 담력과 기력이 더욱 호쾌하다.

三醉岳陽人不識
악양루에서 세 번 크게 취했으나, 악양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구나.

郎吟飛過洞庭湖
낭랑히 시를 읊으면서 동정호를 날아서 지나갔다.
이 시를 보고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고 등자경이 성명을 물으니 성은 “여”요 이름은 “양”이라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제야 여동빈이 다녀간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악양루 옆에 삼취 정을 지었단다.
지금의 삼취 정은 청나라 건륭 40년(1775년)에 세워진 것이란다.

동정호반에는 漁具를 파는 가게와 생선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시장이 있고, 그 옆길로 조금 들어가면 당나라 때 세운 慈氏 塔이 있다.


慈氏 塔



慈氏 塔은 唐의 開元 年間(713-741년)에 세워진 8각 7층 塼塔으로 화려했던 옛 시절은 가고 빈민촌 한가운데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남아 탑신에 잡초와 잡목이 자라고 있는 초라한 모습이다.
악양루와 자씨탑 중간에 노숙의 묘가 있다는데 지나쳐 버렸다.



택시로 호텔로 돌아오는데 월마트가 보인다.
대단한 규모의 매장 1층에는 음식과 음식재료가 진열되어 있고 공산품은 2층에 진열되어 있다.



4월 6일(일) 흐림

장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멱라 강”이 흐르고 그 강 언덕 위에 屈子祠가 있다.

08시 40분 버스로 멱라시로 출발해서,
10시 30분 멱라시에 도착했다.

택시를 전세해서 屈子祠를 찾아간다.
시 외곽으로 나가 멱라 강 제방을 따라 한참을 내려간다.
멱라 강변은 끝없는 초원이다.

수많은 소가 방목되고 있다.
나루터에 도착하니 작은 목제 여객선이 도강해 준다.
건너편 하류에서는 모래와 자갈 채취선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강물이 제법 도도히 흐른다.
장마라도 지면 대단한 수량이겠다.
강변의 초원들도 강물이 범람하면 물속에 잠기는지 그 넓은 초원에 경작지가 없다.


멱라 강

멱라 강변의 초원

수많은 소를 방목하고 있다.

강을 건너서 우측으로 강 언덕을 따라가면 屈原의 위패를 을 모신 屈子祠와 굴원 비림이 나온다.


屈子祠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실린 굴원에 대한 내용

굴원 사당

굴원 영정

굴원 동상

굴원 약력


굴자사를 방문한 역대의 문인들




屈原은 전국시대 말(BC340년 – BC278년) 초나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탁월하여 역사에 달통하니 초나라 회왕의 신임을 얻어 일찍 발탁되었다.

26세 젊은 굴원이 부국강병을 위해 憲令을 제정하고 있던 것을 상관 대부 늑상이 시기하여 참소함으로써 왕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이 시기에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울분을 토한 시가 “離騷(이소)”라는 장편 詩다.

초나라는 장의의 꼬임에 빠진 親秦 派와 굴원을 중심으로 하여 제나라와 힘을 합쳐(합종)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파로 갈려 다투었으나 굴원은 친진 파에 밀려 귀양을 갔다.

그 후 초나라 회왕은 장의의 꾐에 빠져 진나라에 입궐해서 유폐되어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경양 왕이 되니 굴원을 다시 불렀다.
그러나 경양 왕의 동생으로 영윤이 된 “자란”의 모함으로 양쯔 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이때 “漁父辭”를 지었다.

경양 왕이 늦게나마 깨닫고 친 진정책을 버리고 각국에 사자를 보내어 반진동맹을 맺으려 하였으나 이미 진나라는 장수 白起를 보내어 수도를 함락시켰다.

굴원은 이 소식을 듣고 실망한 나머지 “亂辭”를 짓고 62세 되던 해 음력 5월 5일에 돌을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충신의 몸을 물고기가 먹을까 봐 송편을 빚어 멱라수에 던져 넣고 제사를 지냈다.

중국사람들은 굴원의 충절과 재주를 흠모하여 굴원이 멱라수에 투신하여 죽은 날인 음력 5월 5일을 端五節이라 하여 그를 추모하는 祭日로 정했다.

매년 이날이 되면 강남 지방의 사람들은 굴원에 제사를 지내고 갈댓잎으로 싼 종쯔(綜子)를 물고기에게 던져주고 龍船競走를 벌인다.

단오절에 송편을 만드는 일은 전국적으로 퍼져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이러한 풍습은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동남아 일대에도 널리 퍼져 있다.

굴원의 우국충정과 한을 담은 많은 詩, 賦, 辭는 중국 고전문학의 원조로 후세의 문필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漢나라 때 사람 劉向은 굴원의 “離騷”와 25편의 “賦” 및 후인의 작품에 자작 1편을 덧붙여 16권으로 “楚辭”를 편집하였다.

굴자사 옆에 비림이 조성되어 있다.
굴원의 글들과 수많은 방문객이 남긴 글 들을 돌에 새겨 진열해 놓았다.


굴원 碑林

비림 안에 비석을 진열한 건물

진열된 비석들
 굴원의 글과 방문한 문인들의 글들을 새겨 진열하였다.
굴원은 초나라가 秦나라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지경에 이르고 돌이킬 수 없는 위태로운 형국이 되자 이를 비관하여 “亂辭”를 짓고 몸에 돌을 묶고 이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굴자사 앞마당에서 내려다본 멱라강

헷볕이 따뜻한 봄날 오후,
무심한 漁翁들이 멱라 강가에서 한가로이 고기를 낚고 있다.
중국사람들은 전국시대의 충신 굴원을 너무 경모해 지금까지 단오에 제사를 지내고 용선경주를 하는 등 이날을 기리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강릉 단오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신청하자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다. 비록 연원은 달리하지만 단오일 행사라는 의미에서 생각하는 모양이다.
10시 30분에 멱라시에서 택시를 전세해서 굴자사와 굴원 비림을 둘러보고 12시 10분에 돌아왔다.
도선료 포함해서 120위안.

12시 20분 악양행 마이크로버스 출발(18위안)

멱라시에서 악양으로 돌아 오는 버스가 가관이다.
16명 정원 버스에 31명을 때운다.

태우는 것이 아니라 구겨 넣는다.
승차하는 문으로 더 태울 수가 없으니까 마지막 1명은 운전석을 통해서 태운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14시 30분 악양에 도착.
월마트에 들러 시장을 봐다가 저녁은 조기찜을 해서 자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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