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uhan
11월 15, 2018中國南方文化探訪 (12) – 武漢(黃鶴樓, 古琴臺)
2008년 4월 7일(월) 맑음
09시 30분 악양 츨발.
12시 20분 무한에 도착.
호텔은 길 건너 嘉葉賓館에 198위안.
武漢은 湖北省의 성도이다.
장강과 漢水가 만나는 합류점에 있으며 “武漢三鎭”이라고 하는 漢口, 武昌, 漢陽 세 지구가 합쳐 무한이 되었다. 중경, 남경과 함께 중국의 3대 “아궁이”라고 불리는 몹시 더운 지역이다.
예로부터 우한삼진이라하여 교통, 상업의 중심지이며 “三國誌”의 중심 무대였다.
1858년 톈진[天津]조약에 의해서 개항장(開港場)이 되고, 서구열강의 조계지(租界地)가 되었다.
4월 초인데도 후덥지근하고 시내에 매연이 너무 심하다.
길거리는 공사하느라고 파헤쳐져 있어 엉망이다.
도시의 인상이 깔끔하지가 않다.
택시로 황학루로 갔다. 11위안.
황학루 입장료 50위안.
양쯔 강이 내려다보이는 蛇山 위에 날아갈 듯 서 있는 누각이 멋지다.
장강 제1교도 눈 아래 보인다.
그러나 이 황학루도 삼국시대인 223년에 처음 세워진 후 몇 차례 소실과 재건을 거듭해 오다가 1985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황학루로 올라가는 입구 바위에 당나라 때 시인 최호의 시가 새겨져 있고 그 앞에 “이백”이 최호의 시를 읽고 이보다 더 좋은 시는 지을 수가 없다고 붓을 꺾어 버렸다는 자리에 “각필대”가 있다.
黃鶴樓公園 |
최호 동상 |
최호의 詩 |
=최호의 詩=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사람은 황학을을 타고 떠나니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이곳에는 텅 빈 황학루만 남았네,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부반)
황학은 가버린 후 다시 돌아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은 천 년을 유유히 흐르네,
晴川曆曆漢陽樹
맑은 강물에는 漢陽의 나무들이 역력하고
春草처처鸚鵡洲(춘초처처앵무주)
앵무주에는 봄풀만 무성하구나.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날은 저무는데 고향은 어느 쪽인가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강 위에 자욱한 안개 물결은 더욱 시름겹게 하네.
각필정 안내판 |
이백이 붓을 꺾어 버렸다는 자리에 세운 각필정 |
최호의 詩를 읽고 이백은 황학루에 오른 감흥은 더는 읊기를 사양하고 말지만 얼마 후 친구 맹호연을 떠나 보내면서 읊은 시가 있다.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맹호연을 광릉으로 떠나보내며…..
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옛 친구는 이 황학루에서 이별을 고하고
煙花三月下陽州(연화삼월하양주)
꽃피는 삼월에 양주로 내려갔다.
孤帆遠影碧空진(고범원영벽공진)
외로운 돛단배 먼 그림자는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
唯見長空天際流(유견장공천제류)
보이는 것은 아득히 하늘에 닿는 장강뿐이어라.
이백의 글씨 |
황학루 원경 |
황학루로 들어서며 |
황학루 전경 |
황학루 앞 거북이와 학 |
황학루 로비 벽화 |
황학루에서 본 공원 경치 |
장강 제1교 |
공원에 있는 악비 동상 |
씩씩한 악비 뒤에는 지친 말이…..
자는 붕거(鵬擧)이며 상주 탕음현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지만 금(金)나라 군사의 침입으로 북송(北宋)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다. 북송이 망하고 남송때가 되자 무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그의 군대는 악가군(岳家軍)이라는 정병(精兵)으로,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 등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강[淮河], 친링[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하지만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주전파(主戰派)인 군벌과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39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진회가 죽은 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다. 1914년 이후에는 관우(關羽)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다. 학자로서도 뛰어났으며, 저서 《악충무왕집(岳忠武王集)》이 있다. (두산백과)
황학루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경관을 감상하고 내려오면서 각 층에 전시물을 보는 것이 좋다.
황학루를 둘러보고 16시 50분에 택시로 장강 제1교를 건너 古琴臺로 갔다.
입장료 15위안을 내고 들어갔다.
전시실에는 유백아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종자기가 숨어서 엿듣는 장면, 유백아와 종자기가 대화하는 장면, 유백아가 종자기 무덤을 찾아간 장면을 만들어 놓았다.
유백아와 종자기에 관한 얘기에서 “知音”(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유백아는 유복한 집안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잘 탔는데 공부 또한 잘해서 漢 나라 수도 장안에 올라가 과거에 급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무한에서 배를 기다리며 히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때가 추석쯤이라 달이 휘영청 밝자 거문고를 타고 싶어서 한 곡 타는데 갑자기 줄이 하나 끊어졌다.
누군가가 엿들으면 거문고 줄이 끊어진다는 속설이 있어서 주변을 살펴보니 초라한 차림의 나무꾼이 엿듣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유백아가 “내가 탄 곡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나 듣는가?” 하니,
나무꾼이 “우뚝 태산이 제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高山)” 라고 답한다.
유백아는 높은 산을 생각하며 연주하고 있었기에 놀란다.
유백아는 “이번에 타는 곡이 어떤 내용인지 알아맞혀 보시오” 하면서 달빛 아래 유유히 흐르는 한수를 보면서 연주를 했다.
그러자 “유유히 흐르는 큰 강을 보는 것 같습니다(流水).”하니,
유백아는 진실로 자기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知音)을 만나 감격하고 통성명을 하고 의형제를 맺으니 그가 종자기이다.
금의환향하는 길이라서 내년 이맘때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다음 해 그곳으로 돌아와 3일을 기다려도 종자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찾다가 어느 노인을 만나 종자기가 병으로 죽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 노인이 종자기의 부친이었다.
유백아는 종자기의 무덤을 찾아가 통곡하고 거문고를 타 준다.
그리고는 자기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졌음을 한탄하며 거문고를 던져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금 대(古琴臺) |
고금 대 정원 |
유백아는 배에 앉아 거문고를 타고 종자기는 숨어서 감상하고 있다.
유백아는 배에 앉아 거문고를 타고 종자기는 숨어서 감상하고 있다.
종자기의 무덤을 찾아가 조상하고 거문고를 버린다.
17시 20분 택시로 東湖를 찾았다.
항주에는 西湖가 있고 무한에는 東湖가 있다고 비교하지만 동호는
일부에 고층 아파트와 건물에 둘러싸여 운치가 많이 떨어진다.
주변에 고층건물군이 경관을 망쳐 버렸다.
18시40분에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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