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k Road – Xian

11월 28, 2018

실크로드 대장정(3) – 시안(西安-1)



2005년 7월 30일(토)

07시 30분, 시안(西안)驛에 도착했다.
광장으로 나오니 앞에 성벽이 가로로 벋어있고 통행로가 몇 군데 뚫려있다.

제일 우측 통행문을 나가서 직진하다 보면 오른쪽으로 상덕빈관이 있다.
이 빈관에서 김중석 이사를 만나기로 해서 4인실을 160위안에 투숙했다.

이른 아침이라 곡 바로 1일 투어를 따라나섰다.
진시황릉, 병마용, 화청지와 몇 군데 더 있다.


西安驛

서안역 앞 성벽
 西安은 중국 산시 성(陝西省)의 省都다.

북쪽으로는 渭 河가 동쪽으로 흐르고 남쪽에는 終南山이 솟아있는 關中盆地 중앙부에 있다.
이 도시는 기원 전 周 나라 武王이 세운 鎬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漢 나라에서 唐 나라 때까지 1,000여 년 동안 都邑으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로 오랫동안 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그러니 唐나라가 망하면서 그에 따른 병란으로 파괴되고 쇠퇴하였다. 가장 번영을 누렸던 唐代에는 성벽이 東西 9.5km, 南北으로 8.5km의 규모에 100만이 넘는 대 성곽도시로 서방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BC.11세기에 세워진 이 도시는 아테네, 카이로, 로마와 함께 世界 四大古都로 불린다.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며 종착점이었던 도시다.
지금의 서안 성벽은 명나라 때 축성한것으로 규모가 많이 줄었다. 진시황, 한 무제, 당 태종이 남긴 흔적들이 발굴 재조명되면서 세계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관광도시로 다시 태어나는 곳.

현대사에서는 장쉐량(張學良)이 남경에서 督戰을 위해 찾아온 장제스(張介石)을 연금하고 국공합작을 설득한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진시황릉과 진시황 병마용.
西安 시내에서 동북쪽 30km에 있는 진시황릉은 작은 동산만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보던 무덤이었는데 지금은 담장을 치고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가 되었다.



진시황릉
 어지간한 동산만하다.
관광객이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황제릉 낭의 비석


황제릉에서 북동쪽 1.5km 지점에 兵馬俑坑이 있다.
옛날에 있던 순장제도를 陶俑으로 대체하여 묘지를 지키게 한 곳이 발굴되었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발견했다.
1호 갱은 발굴했고 2호 갱과 3 호갱은 아직도 발굴 중이다.
병마용의 도용들은 머리, 몸통, 팔다리가 각각 따로 제작된 후 결합하였다.
무사들의 얼굴이 제각기 다른 모슴을 하고 있으며 발굴 당시에는 채색되어 있었으나 헷볓에 노출되자 바로 채색이 날아갔단다.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부장품



陶俑들









채색이 남아있는 도용
 처음 발굴했을 때는 모든 도용이 채색된 상태였단다.





華淸池
西安 市 동쪽 교외 驪山 부근에 있는 온천이다.
2,700여 년 전 西周시대부터 온천이 발견되어 역대 왕조의 별궁 내지는 휴양지로 이용됐으며, 唐 玄宗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꽃피었던 곳이다. 1936년에는 張學良이 자기의 상관인 張介石을 연금하고 국공합작을 설득한 서안 사건의 현장으로 유명하다.



華淸宮


화청지

화청지와 양귀비 석상
 실제로는 상당히 풍만한 체격이었다는데 아주 날씬한 8등신으로 만들었다.



욕실 건물
 화청궁에는 욕실 건물이 셋이 있다.




목욕탕


오간청
  장제스가 장쉐량에의해 연금되있던 건물



장제스 집무실

반파유적박물관 정원

주거터인듯…

묘지

주거터

발굴품

1일 투어를 따라나서니 몇 군데 불필요한 곳을 데려간다. 개인이 만든 기념품 판매소를 00 박물관이라며 입장료를 물고 들여보내고는 기념품 가게를 들러 나오게 한다. 또 00 민속촌이라는 곳을 데려갔는데 관광식당가이다. 또 鴻門宴遺止라는 곳을 데려갔는데 돈 받는 입구만 거창하게 성벽과 성문을 축조해 놓고 안에는 초입에 석상 몇 개를 세웠을 뿐 허허벌판인 곳이었다. 물론 쓸데없는 곳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처음 계약할 때 차비와 입장료를 한꺼번에 내라는 것은 교통비는 내고 입장료는 가서 내겠다고 계약을 한 것이 다행이었다.




鴻門宴遺址


허허벌판 언덕 위에 거창한 성문과 성벽을 쌓아놓고 입장료를 받는다. 들어가 보면 입구에 석상 몇 개 세워 놓은 것이 전부다.



성안의 조형물들
 茂陵博物館

서안 북서쪽 渭河 강가에 前漢 때 11대 황제 중 9명의 황제 능묘가 東西 50km에 걸쳐 있다. 제일 서쪽에 한 무제의 능이 있고 그 옆에 藿去病의 묘가 있다. 곽거병의 묘는 무릉박물관이되어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무릉박물관

곽거병 묘비

곽거병 묘비 뒤 전망대


전망대에 올라서면 멀리 한나라 황제들의 능묘가 점점이 눈에 들어 온다.

藿去病(BC 140-117) 은 무제의 위황후의 언니 위소아의 아들로 18세에 侍中이 되고 외삼촌 衛靑으루따라 흉노토벌에 큰 공을 세워 君 候에 봉해졌다. BC120년에 표기장군이 되어 흉노를 기련산맥 너머로 퇴치하는 혁혁한 공을 세워 한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24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한 무제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한 무제 능 바로 옆에 묘지를 만들어 주었다.

乾陵

건릉은 당나라 3대 황제 고종과 그의 비 茂側天((524-705)의 묘다. 무측천은 14세 때 궁중에 들어가 당태종의 궁녀로 있었고 그때 황태자의 눈에 들어 관심을 끌었다. 당태종 말년에 비구니가 되었다가 고종이 즉위하자 고종은 옛정을 못 잊어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여 총애했다. 당태종이 죽으면 함께 순장될까 두려워 사정을 해서 여승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고종은 말년에 병이 들자 무측천이 실권 쥐고 권력을 행사했고, 고종이 죽자 본인이 황제의 위에 올라 성신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도 周라고 고쳤다.그러다가 82세로 죽기 전에 스스로 천자칭호를 폐하고 側天大聖皇后로 물러나고 아들 고종에게 이씨 왕조를 물려주었다.



건릉 입구 도로변의 석상들

도로변의 석상


묘역 입구에 다다르면 변방 61개국 사신들이 읍하고 서 있는 석상들이 있다.

이 사신 상은 고종의 장례에 참석한 나라의 사신 상으로 석상 뒷면에 나라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비바람에 깎여 잘 보이지 않는다. 사신 상의 머리가 모두 잘려나갔다. 홍위병들이 모두 잘라버렸단다.

황제의 나라에 문상 온 사신들이 황릉에 예를 드리는 모습으로 서 있는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안아 목을 잘라버렸을까? 중앙청 건물을 헐어버린 사람이나 광화문의 글씨를 떼어내야 한다는 사람들이 생각나게 한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망가진 역사적 작품은 재생시킬 수가 없지 않은가? 안타깝다.



無字碑




무측천의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아무 글씨도 없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무 측천은 자기의 공로가 지대하여 글로써 다 쓸 수가 없어 무자비를 세웠다는 설과 시비공과는 후세사람들이 하는것이지 굳이 미리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唐 高宗과 茂 측천의 합장묘다. 아직까지 도굴되지 않았단다.
발굴을 미루고 있다.




묘지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한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있다.



永泰 公主 墓

건릉 둉쪽에 영태 공주 묘와 장덕 태자 묘가 있다. 둘 다 도굴되었고 지금은 묘지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永泰 公主 墓로 들어가는 입구
 영태 공주는 중종 이현의 7번째 딸이며 당 고종과 무 측천의 손녀다. 할머니 무측천의 남성편력을 비판했다고 해서 17세(701년) 때 남편 무연기와함께 살해되었다. 아버지 이현이 중종으로 즉위한 후 건릉 동남쪽에 합장했다.




영태 공주 묘실로 들어가는 벽면의 벽화


영태 공 주묘 입구 벽면에는 많은 벽화가 있다.  진본은 아니지만 唐 나라 궁중 생활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1일 투어를 끝내고 상덕빈관으로 돌아와 19시 20분에 김중석 이사와 합류하여 4명이 되었다.



西安 事件

西安 事件은 1936년 12월 중국국민당의 元首 張介石이 자신의 부하 張學良과 楊虎城 등에 의해 서안에 감금되었던 사건이다.

1931년 류타오후(柳條湖) 사건(만주사변) 으로 일본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된 뒤에도 장제스가 “중국공산당을 섬멸하기 전 까지는 일본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고 일본에 저항하기보다는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 주력하자 중국공산당 뿐아니라 중국국민당 내에서도 반발이 일어났다.

중국국민당 내에서 장제스의 노선에 반대한 대표적 인물이 장쉐량으로, 장쉐량은 만주의 중국 북부를 지배하던 군벌 장줘린(張作霖)의 맏아들이다.

장쉐량은 일본군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세워지자 중국에서 일본을 몰아내기를 염원하고 있었으나 장제스가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자 1936년 12월 12일 자신의 사령부를 방문한 장제스를 체포 , 감금하고 국민당의 노선 변경을 요구했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8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했는데 중요한 골자는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장제스는 장쉐량의 요구를 수락하고 1936년 12월 25일 감금에서 풀려났다.

공산당은 장쉐량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으므로 곧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國共合作이 이루어졌다.

(서진근 펀저  UN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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