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k Road – Rawalpindi

11월 28, 2018

실크로드 대장정(20) – 라왈핀디(Rawalpindi )



8월 22일(월)

이번 여행에서 가장 험난했던 여정이 시작된다.

길깃에서 인더스 강 상류로 올라가는 스카루드까지의 길이 너무나 험하고 기사들의 운전이 난폭해서
비행기로 나오려고 까지 생각했던 코스를 버스로 23시간 이상을 가자니 단단히 마음을 먹고 터미널로 갔다.

8시 출발과 10시 출발이 있는데 늦어서 10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예약했기 때문에 9시 30분에 터미널에 도착.

버스 기사가 10시 정각에 나타나더니 엔진 일부를 떼서 어디론가 가버린다.

11시가 되니까 나타나서 엔진을 붙이고 출발했다.
약 30여 분 달리다가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고 있는데 승객들과 기사가 승강이하더니 시내로 되돌아간다.
아마도 고쳐서 달고 출발한 부품에 이상이 있는 것을 승객 중 누군가가 알아챈 모양이다.

정비소에 들러서 한참을 수리하더니 13시 35분에 다시 출발.
검문소에서 외국인 등록을 하고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간다.


인더스 강을 따라서
스카루드에서 길깃으로 나가면서.
그 험난한 길을 힘차게 달린다.
한참을 달리는데 별안간 앞이 안 보인다.
10여 분간 모래 폭풍이 몰아친다.
운전사가 차를세우고 실내등을 켜고 기다린다.
도로에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가 수 센티는 쌓였다.
산사태는 아닌데 계곡 전체가 앞이 보이지를 않는다.

몇 킬로를 달리니 정상적인 날씨가 된다.
스카루드에서 길깃으로 나오는 도중 왼쪽으로 보이는 설산은 훈자에서 보던 라카포쉬 峰이다.
또 눈 덮인 봉우리 꼭대기만 보이는 산은 낭가파르바트 峰이다.
K2봉이 보이지 않는것이 아쉽다.



라카포쉬봉(7,788m)
훈자에서도 보이던 산이다.
스카루드에서 길깃으로 나가는 도중에 보인다.



낭가파르바트봉(8,126m)
8,000m 이상 14좌 중에서 11번째로 높은산이다.
스카루드에서 길깃으로 나가는 도중에 보인다.



강가 풍경
한참을 가다가 오른쪽 뒷바퀴가 터졌다.
30분 걸려 바꿔 끼우고 한참을 달려서 길깃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남쪽) 카라코럼 하이웨이로 들어섰다.



1차펑크
스카루드에서 길깃으로 나오다가 뒷바퀴가 터졌다.



자동차 수리를 기다리는 승객들
표정이 그냥 밝기만하다.

버스 맨 뒷좌석 창문 가에 앉은 나는 비포장길을 달리면서 차가 튀어 오를 때마다
위의 짐 싣는 선반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나도 모르게 어이쿠 소리를 낸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파키스탄 군인이라는 젊은이가 자기는 이런 차를 많이 타봐서 머리를 부딪치지 않으니 자리를 바꾸잔다.
참 고마운 젊은이다.
그런 환경에서 훈련되서인지 그 군인은 튀어 오르지를 않는다
자리를 바꾸어준 젊은이. 장가든지 9개월인데 집사람이 임신 중이라고 좋아하고 있다.




함께 타고 있는 군인과
자리를 바꿔줘서 고생을 많이 덜었다.
장가든 지 9개월 됐는데 부인이 아기를 가졌다고 무척 좋아한다.

19시 50분 휴게소에 도착.
볶음밥으로 저녁을 먹고나니 별빛이 아름답다.

21시에 출발했으나
21시 20분 Diamar Chilas로 넘어가는 검문소에서 무장게릴라들이 나타나는 위험지역이라 야간 통행을 못한다고 내일 새벽에 가란다.
집도 절도 없는 고개에서 滿車인 버스에서 잠을 자야 한다.
카슈미르 지역은 분쟁지역으로 정정이 불안하다.
맨 뒷좌석에 앉은 나로서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뒤척이다가 밖으로 나오니 현지인들은 여기저기서 땅바닥에 누어 잠을 자고 있다.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를 따라가 보니 김중석 이사가 내 옆에 앉아 있던 파키스탄 군인과 버스 지붕 위에 누워서 얘기하고 있다.
나도 지붕 위로 올라갔다.
버스 위에도 짐을 잔뜩 실어서 앞과 뒤에 좁은 공간밖에는 없는데 뒤에는 누군가가 자고 있다.
김 이사 옆에 억지로 누워 잠을 청했다.
등이 아프면 뒤쪽 짐에 기대어 자다가 일어나기를 수십 번.

아침이 밝아 온다.
5시가 되니 검문소에서 출발 허가를 한다.

도로에는 낙석투성이다.

버스가 출발한 지 1시간여 만인 6시 35분에 또 바퀴가 터졌다.



산골마을

2차 펑크
버스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출발한지 1시간 만에 바퀴가 또 터졌다.
07시 05분에 Chilas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아침 식사.
어제 제시간에 출발했다면 이 지역을 초저녁에 통과할 수 있었을 텐데.
카라코럼 하이웨이는 이처럼 산 허리를 잘라 만든 정말로 High Way 이다.



카라코람 하이웨이

카라코람 하이웨이
8월 23일(화)

07시 40분에 출발했는데 10시 37분에 우측 뒷바퀴 두 개가 동시에 파열되었다.
이제는 갈아 끼울 바퀴마저 없다.
조금 큰 동네를 찾아가서 수리해 오는 동안 점심시간이 되었다.

Chillas를 지나면서부터 사람들의 표정이 어둡고 날카롭다.

산세가 다소 약해지고, 주변 수목은 열대성으로(유칼리, 바나나 등)

16:45 인더스강 작별(Biarajo) 들판과 야산 계곡으로 들어간다.
18:15 야산지대 끝나고, 넓은 평야 지대로.
22시 30분, 라왈핀디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스카루드를 출발해서 33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
아랫배가 튀어나온 교통경찰관이 무슨 이유인지 승객들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
25분 정도 차내에서 대기하다 내렸다.

라왈핀디는 이슬라마바드와 14km 떨어져 있다.
1959년부터 1970년까지 파키스탄의 임시 수도였다.
펀자브지방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통로와 카슈미르지역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교차하는 곳으로 교통 전략상의 요지다.
파키스탄의 육군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이슬라마바드와 붙어 있어서 모든 시외버스는 이곳에서 출발한다.
한밤중에 도착한 버스터미널 근처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질서와 비위생적 환경이다.
터미널 주변에는 잠잘만한 호텔이 없다.

택시를 타고 시내 중심가로 가는데 택시비는 부르는게 값이다.
아무리 깍아도 기본요금의 몇 곱은 주었다.
시내에 들어가 호텔을 찾는 데 방이 없다.
지금이 선거철 인데 이곳 지방 장관이 재선되어 축하행사 때문에 시내가 만원이란다.
축포와 불꽃이 터지고 요란하다.

시내의 한 호텔 지배인이 변두리의 호텔을 소개해 주었는데 엄청나게 바가지를 썼다.
24시 20분, Holiday Inn (2000Rps/D) 입실.
호텔 관리가 엉망이다.



8월 24일(수)

07:00 기상. 아침 식사 .
어제 밤의 개운치 않은 느낌 때문에 빨리 이슬라마바드로 가기로 했다.
가는데 검문이 심하다.
외국인은 더욱 세밀히 검사한다.

오전에 라왈핀디 시장 구경을 하고 이슬라마바드로 가기로 했다.
13:00 호텔 정산하고 이슬라마바드로 출발했다.



라왈핀디 거리풍경

라왈핀디 거리풍경

시장으로 들어가는 길



시장에서




생과일 주스가게



반찬가게
각종 채소를 장아찌처럼 무쳐놓고 판다.




간이식당

시장에서



하얀 턱수염을 기른 영감이 나이 60세란다.







13:00 호텔 정산. 이슬라마바드로
13:35 이슬마마바드 에 도착해서 호리데이 인으로 갔다.
더블 룸을 us$ 230을 내란다.
us$ 113으로 깍았다.
그런데 5명이니 방을 세개써야한단다.

앰버서더호텔로 갔다. 더블 룸이 2,500루피다(약us$40)
19:30 Crown Plaza Dragon city 중국식 식당에서 실크로드 육로완주 기념 만찬을 가졌다.
바닷가재, 양고기, 닭고기 요리로 푸짐하게.
다섯이 먹고 우리나라 돈으로 40,000원 정도다..



<부토 전 총리 암살>

2007년 12월 27일 선거 운동 중 피살된 부토(Benazir Vhutt0) 전 청리는 파키스탄의 유력가인 Bhutto家 출신으로,
35세의 나이로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사람이다.

부토는 1953년 파키스탄 남부의 카라치(Karachi)에서 태어나 미국 하버드대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부토의 아버지인 룰피카르 부토는 파키스탄의 대통령과 총리를 지냈으나 1977년 지하 울하크의 군사 구테타로 실각하고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부토는 아버지가 창당한 PPP(파키스탄 인민당)을 이끌고 반정부 운동을 벌렸다.

부토는 1988년 지아 울하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 실시된 총선에서 승리하여 이슬라권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부토는 부정부패와 권력남용, 족벌주의 등을 이유로 1990년 총리직에서 해임됐고,
1993년 두 번째 총리직에 올랐으나 3년 만에 경제정책실패와 부패혐의로 또 다시 총리직에서 해임됐다.

부토의 뒤를 이어 샤리프(Nawaz Sharif)가 총리로 임명 되었으나 샤리프는 1999년 무샤라프(Pervez Musharraf)의 군사 쿠데타로 해임됐다.

부토는 해외로 망명했고, 무샤라프는 민정이양 약속을 어기고 대통령에 취임, 2004년 재선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오래된 독재와 親美노선 선택으로 무샤리프 대통령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2007년 3월 초더리 대법원장 사임을 둘러싸고 반정브 시위가 일어났고, 7월 정부군의 랄 마스지드(붉은 사원) 무력 진압으로100여 명이 사망하자전국에서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일어났다.

이 때 부토가 야당의 중심 인물로 귀국하게 된 것이다.
정권교체를 원하던 많은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부토를 반겼으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친미 성향을 가진 부토의 귀국을 반대했다.

부토가 2007년 10월 18일 귀국하자 공항에서는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나 139명이 사망했다.
다행히 부토는 무사했으나 테러위협은 계속됐다.
결국 부토는 12월 27일 라왈핀디(RAWALPINDI)에서 2008년 1월 열릴 총선을 앞두고 유세운동을 하던 중 테러로 사망하고 말았다.

테러 용의자로 알카에다 등 이슬람 반군이 지목되고 있으며, 시민들은 무샤라프 대통령도 의심하고 있다.
부토의 지지자들은 전국적으로 폭동을 일으켰으며, 2008년 1월 8일 열리기로 예정됐던 총선은 6주 후로 연기됐다.

총선에서는 부토가 이끌던 PPP가 무샤라프의 여당을 누르고 대승을 거뒀으며,
부토위 남편 지르다리(Asif Ali Zardari)는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서진근 편저 193개국 UN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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