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k Road – DunHuang

11월 28, 2018

실크로드 대장정(9) – 둔황(敦煌), – 莫高堀, 西千佛洞, 陽關, 玉門關, 漢 長城
 


8월 4일

날씨가 끄물거린다.  자위관에서 09시에 둔황 가는 버스에 올랐다. 오른편으로 정상에 눈을 이고 있는 기련산맥을 따라 서쪽으로 달린다. 기련산맥은 자위관에서 130km이다.

끝없는 사막이다. 낙타 풀만 띄엄띄엄 난 사막에 기름을 퍼 올리는 채굴기가 돌아간다. 들판에는 풍력발전기가 100여 기 이상 돌아간다.


둔황으로 가는 길
 고속도로가 공사 중이라 비포장이 많다.




고속도로 변 사막에 풍력발전기가 돌어 간다.



2시간 30분 달려서 玉門市에 도착했다.  계속 달려 6시간 만에 安西市에 도착했다.  안서를 지나니 계속되는 사막이다. 가랑비가 비친다. 안서에서 둔황까지는 122km이다.



안서를 지나 둔황으로 가는 도로

둔황 시내로 들어가고 있다.
 18시경 오아시스 지대에 진입하고 19시에 둔황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는 포장 중이라서 비포장도로가 오래 시간이 많이 걸렸다.

둔황에 버스터미날이 두 군데 있다. 한 곳은 자위관에서 오는 차가 서고 또 한 곳은 주취안에서 오는 버스가 서는 곳이다.
주취안에서 오는 버스터미널이 훨씬 붐빈다.
여기서 다른 도시로 출발하는 버스도 많다.
이곳에 기차표 예매소도 있다.
바로 길 건너에 있는 호텔에 130위안에 들었다.
터미널 주변에는 다양한 호텔이 있다.
둔황은 간쑤 성 서쪽 끝자락의 오아시스 도시다.
한 무제가 BC 111년에 세운 河西四郡 중 하나로 서역에 대한 최전선의 군사거점으로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원왕조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때에는 즉각 西夏나 吐藩  등 이민족에게 점령당하는 등 흥망의 역사를 거듭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오가면서 다양한 문화가 꽃피웠던 실크로드의 교차점이었다.
그 흔적이 둔황을 중심으로 유명한 莫高堀, 西千佛洞, 서북쪽에 玉門關, 남서쪽에 陽關 등이 있고 볼거리로는 鳴沙山과 月牙泉이 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다 한국 남학생 몇을 만났다.
내일 막고굴을 간다기에 합류하기로 했다.
한국어 가이드를 사는 비용을 절략하기 위해서다.
아침에 학생들이 나오지 않아서 우리끼리 출발했는데 막고굴을 보고 나오다가 만났다.

늦잠을 자서 약속을 못 지켰단다.
莫高窟은 둔황 동남쪽 25km 지점에 있다.
명사 산 동쪽 끝 절벽에 366년 약존(樂尊)이라는 승려가 시작해서 북위, 수, 당, 서하, 원 나라 때까지 492개가 넘는 석굴에 불상과 벽화를 조성하고  많은 서책을 보관해 왔다.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은 27개이며 그것도 관람자에게 선택권이 없고 가이드가 키를 가지고 열어주는 것만 보게 된다.
10여 곳 내외만 보여주는데 우리에게는 8곳을 보여주었다.
대단한 작품들이다.
어두운 석굴 속을 무엇으로 밝혀가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채색 작품을 만들었는지 경탄하지 안\을 수 없다.
그러나 훼손이 너무 심해서 안타깝다.

가이드에게 팁을 주면 좋은 곳을 보여준다는데 우리는 그냥 나왔다.
내부촬영이 철저히 금지돼서 카메라도 맡겨놓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도 볼만한 가치는 있다.



막고굴 앞에서

막고굴

막고굴 안내원


층층이 난간을 만들고 굴을 조성했다. 안내원이 보여주는 굴만 볼 수 있다. 막고굴은 산 전체가 자갈이 많이 섞인 沙岩지대다. 굴을 파고 벽에다 조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상들은 나무와 마른풀로 틀을 만들고 겉에 흙을 입혀서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회반죽을 발라 채색했다. 벽화도 마찬가지로 벽에 회반죽을 바르고 그림을 그렸다.




실내에서 촬영이 금지돼서 다른 분이 올린 사진을 빌려 왔다.

동굴 안의 작품들은 돌을 조각한 것이 아니고 나무와 마른풀로 틀을 만들고 흙을 발라 형상을 만들고 회반죽을 바른 후 채색을 한 것이다.

대단한 작품들이다.




막고굴 앞은 물은 말라있지만 개울이다. 그 밑으로 많은 굴이 있는데 불상을 조성하려다 중단된듯하다.

막고굴에서 작업하던 인부들의 숙소였을 것이란 얘기도 있다. 이 엄청난 문화재는 1차로 도굴당하고 2차로 외국인들에게 도둑맞고 3차로 홍위병들에게 수난당했다. 막고굴 옆 강변의 토굴들은 작업자들의 숙소로 쓰였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敦皇 古城
 막고굴을 나와 둔황 시내를 벗어나 서천불동으로 가는 벌판에 둔황 고성이라는 것을 새로 지어놓았다.



둔황 고성 성문
 둔황고성은 1987년 일본소설 “둔황”을 영화로 제작하면서 지은 종합촬영 세트장이다.

그냥 지나쳤다.



둔황 고성
 서천불동은 둔황에서 35km 거리다.
막고굴과 마주 보고 있는 형국이다.
역시 개울가 절벽에 굴을 파고 불상과 벽화를 그렸다.



西 千佛洞
 여기도 개울가 벼랑을 이용해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성했다.



서천불동
 제7 굴의 열반상 뒤에 있는 벽화의 인물상 중에 우리나라의 갓을 쓴 인물상도 보인다.
막고굴보다 규모가 훨씬 작다.


8월 5일

오늘은 玉門關과 陽關, 명사 산, 월아 천을 보기로 했다.
玉門關은 둔황에서 서쪽으로 105km 지점에 있다.
텐산북로로 연결되는 길이다.
옛날에 이 문을 통해서 玉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옥문관이라 부른다.
옥문관은 한 무제 때 제일 서쪽에 세운 요새다.
옥문관은 고비탄 사막의 한가운데 있다.



玉門關

옥문관

옥문관은 서안을 출발한 상인들이 하서회랑을 거쳐 둔황으로 들어오고 신장웨이얼지구의 북쪽을 향해 가는 길의 시작점이다.

옥문관 밖으로 나가면 서쪽으로 계속해서 한 나라 때 쌓은 토성이 지금도 남아있다.



옥문관 유적

漢 長城
 옥문관 밖 서쪽으로 한 나라 때 쌓은 토성이 계속 뻗어 있다.




망루(?) , 유적으로 보이는 흙더미 뒤로 계속 토성이 뻗어있다.



토성은 흙과 마른풀을 섞어서 쌓았다.

마른플을 섞어 쌓은 토성
 옥문관에서 동쪽으로 15분 정도 달리면 강을 따라 이어져 온 한 장성이 河倉城 이라는 요새를 만들어 놓았는데 아마도 군량미 창고가 아니었나 추측된단다.





옥문관 밖 초원의 양 떼- 옥문관을 나와 하창성 쪽으로가는데  많은 양 떼가 풀을 뜯는 초원이 보인다.



河倉城
 옥문관에서 동쪽으로 개울을 따라 15분가량 달리면 요새 터가 보인다.
아마도 군량미 저장고였을 것이란다.
陽關은 둔황에서 서남쪽으로 78km 지점에 있다.
양관의 유일한 유적은 다 망가진 봉화대 흔적뿐이다.
한 나라 때 서쪽으로 나가는 상인들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외적 침입 시 봉화를 올리던 요새가 있던 곳이다.
양관은 신장웨이얼지구 남쪽을 통과하는 길의 시작점이다.
이문을 통해 나가면 누란을 거쳐 서역남로를 따라 호탄을 지나 카슈로 나갔을 것이다.
언덕 위에 다 허물어진 봉화대 흔적만 남은 양관은 영화 세트장처럼 성곽을 새로 쌓고  양관 박물관이라는 현판을 붙여놓고 입장료를 받는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반초 기마상이 떡 버티고 있다.
성문 현판에 西通樓蘭이라는 글이 보인다.



陽關으로 가는 길


양관에는 산등성이에 봉화 터만 남아있다.
그런데 새로 성벽을 쌓고 관문을 만들어 입장료를 받는다.
안에는 반초의 기마상과  몇 점 유물이 진열돼 있다.



관문 안으로 들어와서

반초 기마상


멀리 산등성이에 봉화대 터가 보인다.
그 외의 시설들은 모두 새로 만든 것이다.
영화촬영 세트장처럼 꾸몄다.

옥문관과 양관을 다녀와서 명사 산으로 가니 시간이 너무 늦었다.
입장은 못하고 사진만 몇장 찍었다.

명사 산은 원래 모래만 쌓인 산이 아니다.

양관에서 둔황으로 들어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나무 한 그루 없는 바위산의 연속인데 둔황에 가까워질수록 구릉에 고운 모래가 쌓여가더나 둔황 시내에 거의 다 들어와서는 산 전체를 모래가 뒤덮었다.

신기한 현상이다.




양관에서 둔황으로 들어오면서 보이는 명사 산줄기.
바위산에 모래가 쌓여가는 것이 보인다.



鳴沙 山



月牙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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