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nghai – Ningbo
11월 16, 2018中國 南方文化探訪 (1) – 상하이(上海), 푸퉈 산(普陀山), 닝보(寧波)
上海
2008년3월10일중국 남방항공(MU5025편)으로 상해로 날아갔다.
양쯔 강 남쪽의 문화와 경치를 보기 위해서다.
집사람과 친구 둘, 4명이 떠나는 여정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황하문명권을 중심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 성과는 중국 남방에도 나름대로 화려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밝혀내고 있다.
특히 1,972년 長沙의 馬王堆 漢墓 발굴로 남방문화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여정은 상해에서 출발해서 장쑤 성, 저장성, 안후이 성, 푸젠 성, 장시 성, 광동 성, 광시좡족자치구, 후난성 등을 돌아보면서 역사의 현장과 무이산 무이구곡, 계림 이강유람, 형산, 여산, 구화산에 오르기로 했다.
인천에서 중국 남방항공(MU5025)편으로 출발, 상해에 11시15분 도착. 지인이 차를 보내주어 점심 후 상하이박물관으로 갔다. 서예실, 회화실, 소수민족 의상실, 화폐 역사관, 도자기실, 조각품 실 등등.
화폐 역사 실에는 침몰선에서 인양한 유물들을 통해서 기원전부터 유럽과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듯 알렉산더대왕의 흉상이 새겨진 금화 등 고대 화폐들이 다수 진열되어 있다.
舟山群島의 보타산을 가기 위해 페리가 출발하는 “상해 吳淞 객운중심”으로 가서(시내에서 1시간) 19시40분에 승선하여 20시10분에 출발(2등 4인실 침대, 1인 289위안). 실내 협소, 세면대 있음.
동방 명주 위에서 본 상해 시내 |
동방 명주 위에서 본 상해 시내 |
동방 명주 야경 |
옛 조개 지역 “외탄” 야경
豫園夜景 |
전통적인 건축양식으로 지은 상점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전통적인 상하이 요리와 샤오츠를 즐길 수 있는 먹거리 천국이다.
많은 요리점과 레스토랑이 있으며 포장마차도 많다.
푸퉈산(普陀山)
3월11일(화)
06시 중간 기착지 대산항 입항,
07시50분 주산항 입항. 상륙비(보타산 입장료) 1인 165위안,
여객선 터미널 길 건너 3성급 호텔 “海通賓館” 240위안.
여객선 터미널에서 나와 왼쪽으로 5-7분 올라가면 호텔 촌.
여객선 터미널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2-3분 가면 식당 촌.
09시15분 호텔에서 나와 관광 시작. 가장 먼 곳인 혜제사를 가기 위해 09시20분 버스(10위안)로 약 20분.
09시40분 불정산 왕복 케블카 40위안.
10시 불정산 정상(291m) – 혜제사 – 10시30분 케블카를 포기하고 수백 계단 걸어 내려와 법우사. 내려오는 중간에 명나라 장수 후계고가 쓴 “海天佛國” 비석.
법우사 들어서자 앞가림 벽에 구룡조각으로 구룡벽.
법우사 구룡보전 천장에 아홉 마리 용 조각. 중국국보.
법우사를 나와서 해변 “千步沙”.
버스로 13시에 보제선사 도착.
입구에 청 건륭제가 다녀간 기록을 새긴 비석.
법당에 있는 높이 8.8m의 관세음보살상은 중국 10대 불상 중 하나.
13시30분, 법우선사 나와서 우측으로 西天風景區(心子石 등).
버스로 남해 관음 입상.
근래에 새로이 조성된 사원.
인자스럽고 편안한 분위기의 입상이 아름답다.
주변 석조물들 기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여럿이 모여서 한 것보다 가족 단위가 많이 보인다.
불당 안의 벽면 조각들은 화려하고 장중하다.
不肯去觀音殿 – AD916년, 일본 승려 혜악이 산시 성 오대산에서 관세음보살 불상을 얻어 영파를 거쳐서 일본으로 가져가던 도중 보타산 앞바다에 이르러 파도가 높고 장애물이 널려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관음상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배가 닿는 곳에 내리기로 하고 기다리니 보타산 조음동 앞에 배가 닿아 바닷가 紫竹林에 내려놓고 간 것을 마을 사람들이 모셔놓게 되었단다..
새로 신축한 관음전은 건축물 지붕 모양 등이 일본건축물 분위기다.
潮音洞 – 불긍거관음전 바닷가의 바위틈새.
바닷물이 가끔 밀려든다. 낙산사 홍련암에 비할 바는 않된다..
섬 전체가 바위산, 해안선이 아름답다.
중국인 관광객(참배객)이 엄청나다.
섬 전체를 상업지역, 호텔지역, 식당 촌, 주거지역 등 구역별로 잘 정돈되어 있고 수시로 청소하여 청결하다.
화장실도 잘 개량되어 있다.
절강성 보타산은 “관세음보살” 오대산은 “문수보살”, 아미산은 “보현보살”, 구화산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곳으로 중국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이다.
보타산에는 혜제사를 제외하고는 보제선사, 법우선사 등 모든 절이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불정산 혜제사 지붕 |
불정사 부처님 |
불정산 정상에서 본 千步沙, 百步沙 |
海天佛國 |
15세기 후반부터 왜구들이 세력을 떨쳐 이 지역이 피해가 심해지자
중앙정부에서는 자주 군대를 파견해 왜구를 토벌했다.
명나라 때 장군 후계고가 이곳에 와서 왜구를 물리친 후 보타산을 둘러보고 남긴 글씨.
보타산은 “해천불국”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법우사 구룡벽 |
용이 조각되어 있다.
중국에서 문 앞 또는 문 안에 설치하는 고정된 가리개(또는 칸막이).
악귀를 쫓는 역할과 가리개를 겸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기원은 주대(周代) 초기이며 옛날에는 ‘수(樹)’라고 불렀다.
궁전, 묘우(廟宇)등 큰 건축 앞의 조벽은 3필, 5필, 9필 등의 용의 부조도판(浮彫陶板)으로 장식하였다.
九龍寶殿 |
구룡보전 천장에 용 조각 아홉 개가 매달려 있다.
중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보제선사 |
보제사 관음상 |
心字石(폭 7m) |
이렇게 써 놓고 볼거리를 만들어 놓았다.
남해 관음 |
남해 관음(33m) |
실내 벽면 장식 |
관세음보살이 뛰어내릴 때 생긴 발자국이 바위 위에 있단다 |
불긍거관음전 |
건물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일본건축물 분위기이다.
불긍거 관음원의 관세음보살상 |
동굴로 들이치는 파도소리가 대단하다는 조음동.
그러나 낙산사 홍련암에 비할 바가 못 된다.
寧波
3월12일(수)
07시35분 舟山港(보타산)을 출발한 66인승 쾌속정은 1시간
15분 만인 08시50분 大사港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자 자가용 삐끼들이 덤벼든다. 영파행 버스는 없으니 자가용으로 가란다.
그러나 광장으로 나오니 선박회사에서 무료로 태워주는 셔틀버스가 기다린다.
09시15분 버스 출발, 10시55분 영파시 도착. 11시30분 豊貨大酒店.
120위안.
점심 후 12시30분 택시(9+1=10)로 天一閣(明代圖書館). 30위안.
14시30분 택시(40위안)로 東錢湖, 호숫가에 악비왕묘(10위안),
호수 입구에 왕안석 공원,
16시30분 버스(2위안)와 택시(15위안)로 호텔로.
택시를 잡는데 고생했다.
17시40분 호텔 식당에서 훠궈로 저녁. 174위안.
식당에서 훠궈를 주문했는데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을 시켜서 익혀먹느냐 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다른 테블에서 먹는 것을 관찰하고 , 물어보고 시키는데 바로 앞 테블에서 먹던 젊은 여자 둘이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반가워서 맛있는 것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한국사람에게는 이것이 좋겠다면서 몇 가지 추천을 해 준다.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 중 한 여자가 대구에서 1년 정도 직장을 다녔단다.
우리나라에 근무했던 기억이 좋았단다.
이곳은 춘추전국시대 월국(越國) 의 땅이었으며 당(唐)·송(宋) 시대 이후에는 명주(明州)라고 하였던 곳으로, 일본·한국·아라비아·동남아시아와의 무역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특히 명(明)나라 때에 이르러 감합(勘合)무역선의 기착항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왜구의 출몰이 잦아 방위기지를 두기도 하였다.
1840년 아편전쟁 때 영국해군에게 점령되었고,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의해서 개항되었으나,
상하이가 크게 발전한 영향을 받아 상대적으로 쇠퇴하였다. 그러나 이 고장 출신의 상인들이 상하이로 진출하여 저장[浙江] 재벌의 주류를 이루어 재계의 중진이 많다.
현재는 쌀·차·목화·해산물 등을 집산하며, 화문석·자단(紫檀)세공 등의 수공예품과 화학·방적·식품가공 등의 공업도 발달하였다. 부근 일대에 쓰쓰밍산[四明山]·톈닝사[天寧寺] ·톈룽사[天龍寺]·아위왕산[阿育王山] 등의 저명한 불교사적과 명승지가 있다.
(두산백과에서)
舟山港에서 寧派로 가는 66인승 쾌속정. 1시간마다 있다.
전국중점문화재 天一閣 |
명대의 兵部右侍朗 範欽이 모은 장서를 보관하는 장서각.
중국 고대사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30여만 권의 장서가 보존되어 있다.
천일각은 건축물과 정원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옆집 陳氏 家와 담을 헐고 같이 관람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천일각 정문 |
천일각 장서관 본관 |
장서관 입구 전시물 |
누각과 회랑 |
베이징 고궁의 “文淵閣”, 베이징 원명원의 “文源閣”, 瀋陽 古宮의 “文朔閣”, 항주의 “文瀾閣” 등등도 천일각을 모방한 것이란다.
範欽 동상 |
범흠 탄신 500주년(2006년) 기념 등 |
아직도 축하등이 달렸다.
천일각 창건 440주년 기념 등 |
범흠 약력 |
호수 입구에 왕안석 공원이 있다 |
왕안석(1021-1086) 석상 |
중국 송(宋, 960∼1279)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이다.
문필가이자 시인으로서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송(北宋)의 6대 황제인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에게 발탁되어 1069~1076년에 신법(新法)이라고 불리는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시역법(市易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개혁적 정치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수세력의 반발로 실패하고 낙향했다.
3월13일(목)
비가 내린다. 08시에 호텔 앞에서 버스 782번(3위안)을 타고(약 20km.) 阿育王寺(아소카왕사)로 갔다. 5위안.
405년 동진 때 창건된 이 절은 중국 선종 5산 중의 하나란다.
정문을 들어서는데 순백의 동백이 우리를 맞는다.
왼쪽으로 부도들이 줄을 서 있고 연못을 지나 들어가니 八吉祥地, 법당이다.
입구 한편에 스님이 편히 석가무니를 뵙고 있는지 졸고있는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그 장면을 찍으러 갔던 친구가 의외의 선물을 받았다.
스님이 눈을 뜨고 일어서서 맞이하니 임기응변으로 한국에서 아육왕사를 참배하러 왔다고 하니 이 스님은 우리가 모르고 간 진신사리 친견을 목적으로 온 줄 알고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아 왔다.
덕분에 진신사리도 친견하고 천동사로 향했다.
아육왕사에서 나와 조금 걸으면 천동사로 들어가는 버스(2위안)가 있고 버스 종점에서 내리면 택시(자가용)들이 있다. 8위안.
걷기는 조금 멀다.
11시 40분 천동사에.
천동사는 西晉(AD300년) 때 세운 사찰로 중국 선종 5산 가운데 하나다. 5위안.
일본 조동종 高祖 道元의 求法寺.
산으로 둘러싸인 사찰 주변은 대나무밭이 아름답고 아늑하고 편안한 장소에 절을 지었다.
경내에는 옥불전, 明 나라 때 주조된 天僧大銅鍋, 十八羅漢石刻 등이 있다.
13시40분 택시(100위안)로 호텔로. 점심 먹고 샤오싱(소흥) 가는 버스표 구입. 45위안.
阿育王寺(아소카왕사) |
아육왕사 정문을 들어서자 아름답게 핀 백동백이 마중을 해 줍니다 |
부도 |
八吉祥地 정문을 지키며 석가무니 부처님을 뵙고 있는 스님 |
이 스님의 잠자는 모습을 촬영하러 갔다가 의외의 환대를 받았다.
함께 간 친구는 직장에 다닐 때 불교 신도회장을 맡을 정도로 불교를 이해하는 사람인데 사진을 찍으려다 스님이 눈을 뜨고 반기니 임기응변으로 한국에서 아육왕사 참배를 왔다고 하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주지 스님에게 다녀오더니 진신사리를 보여 주겠다며 우리를 사리전으로 안내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舍利殿 |
우리를 안내한 스님이 안에서 사리함을 머리에 이고 나와서 정중하게 제단에 올려 놓는다.
은제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진신사리 함이다.
작은 틈새로 들여다보도록 허락한다.
우리가 들어가니 사리전을 지키는 스님이 안으로 들어가 사리함을 머리에 이고 나와 불단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사리함을 꺼내 은제 받침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조명을 켜고 종을 세 번 치고는 3배를 하고 한 사람씩 친견하란다. 친견이 끝나자 다시 종을 세 번 치고는 삼배를 하란다.
생각지 않았던 귀한 보물을 보았다.
天童寺 |
玉佛殿 |
石刻 十八羅漢 |
이런 석각 18개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남부터미널 근처에 月湖공원이 있다.
月湖가에 늘어진 細柳를 보니 봄빛이 완연하다..
고려청(接賓館)과 高麗使遺止 |
월호공원 한쪽 끝 대로변에 북송시대 고려와 교역 창구였던 명주(영파)가 고려 손님을 맞이하던 고려청(接賓館)과 高麗使遺止가 있다.
북송 때 고려와의 민간교역이 활발해지자 정화 7년(1,117년)에 明州를 창설하고 고려청을 지어 접빈관으로 썼다.
16시30분에 문 닫음.
고려청 내에 장보고와 정화 함대 관련 내용과 청해진항, 대각국사 의천 왕래도 등이 있다.
*.닝보(寧波)는 장강 삼각주의 동남쪽에 있는 해안도시.
동쪽은 동해, 북쪽은 杭州 灣에 면하고 있다.
위도상 30도 근처로 우리나라 제주도 보다 훨씬 남쪽인데 접빈관까지 설치할 정도로 고려와의 교역이 활발했던 항구다.
조선 성종 19년 제주도에서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 나주로 가던 최부가 풍랑을 만나 표류해 닿은 곳이 닝보(표해록)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배를 타고 오면 이곳에 닿기에 알맞은 해류가 이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 승려 혜악도 오대산에서 모셔온 관음보살상을 싣고 일본으로 가려고 닝보항을 출발했다가 보타산 조음동 앞으로 표류했었다.
*.최부의 “표해록”
조선 성종 19년, 제주에서 봉직하던 중 부친상을 당하여 정월 초에 고향 나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43명이 표류하여 영파에 도착한 과정과 영파에서 소주, 항주, 서주, 북경과 압록강을 거쳐 육로로 8,800여 리를 돌아오는 과정에서 보고 느낀 내용을 성종의 명에 의해 저술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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