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bia – Beograd
11월 19, 2018세르비아(Serbia) – 베오그라드(Beograd = Belgr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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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오그라드역에 도착해서 |
08시 베오그라드 역에 도착했다.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의 수도다.
오스트리아에서 흘러드는 사바 강이 도나우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강변 언덕 위에 쌓은 칼레메그단이라고 부르는 城壁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다.
역전 식당에서 소고기 수프와 빵으로 식사하면서 시내 관광 계획.
일단 트램을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나서 갈 곳을 정하기로 하고 2번 트램을 타고 한 바퀴 돌았다.
베오그라드는 19세기 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마다 파괴가 거듭되어 온 역사 때문에
고대·중세의 유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우선 2번 트램이 도는 방향으로 관광을 시작했다.
10시 25분, 2번 트램을 타고 한 정거장 가서 오른쪽 대로를 따라 올라가면 왼편으로 사바 성당이 보인다.
1935년에 건축을 시작한 이 정교회는 세계 최대의 정교회로 짓고 있는데 세르비아의 수호성인이었던 성 사바((1175 – 1235) 대주교를 기리기 위해 성금을 모아가며 짓는 교회란다.
완공되면 12,000명이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단다.
내부에는 아직도 공사 중이고 이콘(icon)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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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바 성당(Hram Svetog Sa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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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내부 |
성당에 전시중인 이콘(icon)
이콘(icon)은 주로 동방정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畵像이다.
이콘이라는 명칭은 그리스어에서 “像”이라는 뜻의 icon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반 그림뿐 아니라 모자이크, 象牙, 板, 금속판의 부조도 있고 직물로 된 것도 있다.
그리스정교 문화권이 확대하면서 각지에 보급되었다..
특히 러시아에서 독특한 기법이 발달하였다.
사바 정교회를 보고 중앙공원으로 가는 도중 폭우와 콩알보다 큰 우박을 만났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비를 피할 겸 점심을 일찍 먹기로 하고 베오그라드의 명동이라는 크네즈미하일로 거리로 갔다.
거기에 페이킹 이라는 중국 음식점이 있다.
크네즈미하일로 거리는 차 없는 거리(Old Town)로 유럽풍의 멋진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고급 상점들과 카페들이 늘어선 거리다.
중간 골목 안에 있는 중식당 페이킹(북경)에서 비를 피할 겸 이른 점심을 먹었다.(이대학 사장이 내셨다.)
크네즈미하일로 거리
아름다운 건물과 상점들이 늘어선 차없는 거리다.
점심 후 10여 분 거리에 있는 칼레메그단으로 걸어갔다.
칼레메그단이 있는 자리는 1세기 로마가 지배할 시절부터 城이나 요새가 있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요새는 많은 부분이 1740년대에 세워졌으며
붉은 성벽은 아직도 오래된 베오그라드 시의 경계선을 나타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세르비아를 돕고 전쟁고아를 보살펴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만든 프링스 정원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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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레메그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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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비아학생들과 강남스타일 |
초등학생인지? 중학생인지?.
“웨어 아유 프롬?”
“프롬 코리아”
“사우스, 노스”
“사우스”
여기서 별안간 아이들이 “와” 소리를 지르며 냅다 손목을 흔들며
“강남 스타일”을 외친다.
역시 강남 스타일은 대단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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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아이들과 신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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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城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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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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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바 강과 다뉴브 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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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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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박물관 |
칼레메그단을 돌아보고 다시 보행자 거리로 돌아와 끝까지 내려가면 우측으로 두 개의 왕궁이 있다.
늦어서 내부는 구경을 못하고 국회의사당과 시청을 돌아보고 18시 기차역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21시 50분 베오그라드에서 출발해 불가리의 소피아를 향했다.
수리중인 국립박물관 앞 공화국광장의 “크네즈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왕의 기마상.
이 왕은 1867년 세르비아를 오스만트뤼크의 지배에서 독립 시키고 수도를 베오그라드로 옮긴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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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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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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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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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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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聖壇 |
기차가 출발하자 승무원이 와서 돈을 내란다.
우리는 6유로씩 주고 침대권을 사서 왔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니 자꾸 설명하는데 의사소통이 안 된다.
옆방에 있던 젊은 여자가 나오더니 통역을 해준다.
우리가 사서 가지고 온 표는 침대칸 좌석을 예약한 표이고 승차표는 기차에서 승무원에게 사야 한단다.
자세히 보니 우리가 사온 푯값이 6유로면 정말 싸다.
승차표(기차표)는 1인당 20.6유로이니 15인분 310유로를 내고 샀다.
세르비아는 남동부 유럽의 발칸반도 중앙부에 있는 나라로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종주국이다.
1918년 12월 남부 슬라브계 다민족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일명 베오그라드 왕국)의 일원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구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의 하나였다.
1992년 구유고슬라비아연방 해체 시 몬테네그로와 신유고연방을 결성하였고, 또다시 2006년 6월 3일 몬테네그로가 분리되어 연방이 해체되면서 세르비아공화국이 되었으며, 2008년 2월 17일에는 자치주로 있던 코소보가 분리, 독립하였다.
면적 : 77,474km2
인구 : 728만 명(2012년)
종족구성 : 세르비아인 83%, 헝가리인 4%, 보스니아인 2$, 집시 1%.
종교 : 세르비아정교 65%, 이슬람교 19%, 가톨릭 4%.
언어 : 세르비아어, 알바니아어(코소보 지역)
화폐 : 디나르(1유로 : 183Din)(2013년.5월 30일)
1인당 GDP: $6,268(2011년)
수도 : 베오그라드.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은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6개국이 모여 결성한 연방 공화국으로 1945년부터 1992년까지 존속했다.
유고슬라비아(Yugoslavia)란 “남 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이며, 수도는 종주국인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발칸반도에 세르비아 – 크로아티아 – 슬로베니아 왕국이 세워졌고, 이 왕국은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국명을 변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이 발칸반도를 점령했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무너졌다.
티토(Josip Broz Tito)는 공산주의 유격대(파르티잔)을 이끌고 발칸 지역을 해방시켰으며, 1945년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6개 공화국이 연방을 이룬 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결성했다.
유고슬라비아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그 영향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먼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1991년 6월 25일 독립했다.
공업이 발달하고 문화적으로 차이를 보였던 슬로베니아는 사실상 독립을 묵인받아 내전에 크게 휩쓸리지 않은 반면, 민족 무제로 세르비아와 대립하던 크로아티아는 유혈 충돌이 계속 이어졌다.
마케도니아는 내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1991년 11월 7일 독립했으나, 1992년 3월 2일 독립한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는 민족 – 종교 분쟁으로 내전이 일어나 1995년까지 2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1995년 평화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마무리됐으나, 세르비아 내부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던 코소보에서는 내전이 계속 이어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하자 1992년 4월 27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만으로 이루어진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했다.
신 유고슬라비아는 2003년 국명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변경했고, 2006년 몬테네그로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과거 유고슬라비아의 종주국이었던 세르비아는 홀로 남게 되었다.
(서진근 편저 UN 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티토와 티토주의>
티토(Josip Broz Tito, 1892 – 1980)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티토주의(Tito ism)라 불리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를 창시했다.
티토의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슬로베니아인이었다.
티토는 현재 크로아티아의 수도인 자그레브 근처의 쿰로베츠(Kumrovec)에서 태어났으나 세르비아에서 주로 활동했다.
1948년 티토는 소련의 획일적이고 경직된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각 나라의 실정에 맞는 공산주의를 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National Communism) 를 창시했다.
티토는 경제에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도입시키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당조직에 대해서도 민주화, 자유화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이 주축이 된 냉전 블록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비동맹 외교정책을 시행했는데, 인도의 네루(Jawaharlal Nehru), 이집트의 나세르(Jamal Abd an-Na”ser) 등도 티토와 뜻을 같이했다.
비동맹 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과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티토의 독자노선은 소련 중심의 단일 공산주의 세계를 추구하던 스탈린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스탈린은 코민포름(공산당 정보국)에서 티토가 이끄는 CPY(유고슬라비아 공산당)를 축출하고 다른 국가들이 유고슬라비아의 전례를 따르는 것을 막기 위해 티토 주의자들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에 경제봉쇄, 국경분쟁, 군사침략 등을 실시했다.
그러나 소련의 위협에도 티토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유고슬라비아 국민은 티토를 중심으로 단결했다.
(서진근 편저 UN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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