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garia – Sofia – Plovdiv – Veliko Tarnovo
11월 19, 2018불가리아(Bulgaria) – 소피아(Sofia), 플로브디프, 벨리코 투루노보
2013년 5월 31일(금)
05시 20분, 불가리아 국경에서 패스포트 체크,
07시 40분,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도착.
기차역 바로 옆이 버스터미널이다.
버스터미널 근처에 자그마한 여행사들이 많다.
그중에서 61호 여행사 여사장이 적극적이다.
우리나라 젊은이들과 찍은 단체사진을 걸어놓고 자기선전에 열을 올린다.
61호 여사장의 소개로 Lion Hotel을 43유로에 소개받고 호텔까지 안내받았다.
호텔 위치도 좋아서 걸어서 구시가를 모두 다닐만하다.
볼거리도 많다.
보아냐 교회(유네스코 문화유산)
발칸반도 최대인 알렉산드로네브스키 성당.
성 페트카 지하교회, 레닌광장의 동상, 세네카 유적(발굴 중)
성 소피아 여신, 공산당 본부 등등을 모두 걸어서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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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공산당사(정면 건물) |
이 광장이 구시가 관광의 츨발 점이다.
성 페트카 지하교회, 소피아 여신탑(Pilla), 성 네델리아 교회, 바냐 바시 자미야 모스크 등이 가까이 있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 앞에서 결혼식 뒤풀이 행사를 하는 젊은이들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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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네델리아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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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피아 여신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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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페트카 지하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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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냐 바시 자미야 모스크 |
근처에 온천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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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니콜라이 러시아 정교 교회 |
다섯 개의 금색돔이 아름답다.
구 공산당사에서 알렉산더 네브스키 사원으로 가는 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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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니콜라이 러시아정교회 황금색 돔 |
60m의 금색 돔과 12개의 돔으로 이루어진 네오 비잔틴 양식으로 1882년에 착공하여 40년이 걸려 완공했다.
불가리아 독립의 계기가 된 러시라 – 투루크 전쟁에서 희생된 20만 명의 러시아 병사를 위령하기 위해 건립했단다.
교회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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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자 기념 동상 |
러시아 –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불가리아를 해방시킨 황제다.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린다.
김을라 여사는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 앞에서 소매치기의 공격을 잘 뿌리쳤는데 호텔 앞 슈퍼마켓까지 따라오며 몇 차례 공격을 받았단다.
나는 환전소로 들어가는데 두 명의 예쁜 여자애들이 안내하겠다며 따라붙는다
호텔 옆 슈퍼마켓에 들어가 포도주를 고르는데 이상한 남자가 달라붙어 다른 포도주를 권하며 횡성수설 한다.
그 뒤에는 예쁜 여자애들 둘이 붙어 있다.
먼저 와 있던 집사람이 주의하라고 소리친다.
그 애들에게 가방이 열렸었단다.
공연히 말을 걸거나 친절하게 달라붙는 사람은 무조건 경계하고 멀리 떨어져야 한다.
6월 1일(토)
불가리아 중북부의 벨리코 투루노보로 가는 도중에 불가리아 제2도시 플로브디프를 지난다.
잠시 들러서 가기로 하고 08시 30분 기차에 올랐다.
지정좌석표가 무용지물이다.
좌석표를 보여주고 자리를 달래도 전혀 반응이 없다.
11시에 플로브디프에 도착, 짐 보관소에 짐 맡기고 투루노보행 기차표 사고 택시로 중앙광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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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브디프 역 |
플로브디프는 기원전 19세기에 트라키아인들이 마을을 형성했고 교통의 요지에서 상업으로 번성하여 기원전 4세기에는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이도시를 사랑했던 마케도니아의 왕 필의 이름을 따 필리로폴리스라고 불렀다.
그 후 로마제국이 이곳을 정복하고 세개의 언덕이라는 뜻의 트리몬티움으로 개칭하였고,
크게 번성하여 도시 곳곳에 로마유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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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중인 로마유적 |
거리 양편에는 아름다운 고급 저택들이 늘어서 있고 저택들은 싸롱이나 박물관으로 고친 곳이 많다.
토요일이기도 하지만 어린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아름다운 외관은 지금도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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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광장 분수대에서 기념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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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시가 알렉산드로 바텐베르크 거리의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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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시가 알렉산드로 바텐베르크 거리 |
양쪽으로 아름다운 건물들이은 예전 부호들의 저택이었단다.
부호들의 저택이었던 아르다운 건물들은 박물관으로 쓰는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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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유적이 있는 스탐볼리스키 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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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원형 경기장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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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장 지하통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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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형경기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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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 풍경 |
14시 45분 승차 14시 50분 투루노보를 향하여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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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창 밖 풍경 |
알아보니 유스호스텔은 문을 닫았단다.
가장 좋은 호텔을 찾아가니 방이 없단다.
이재학 사장이 천신만고 끝에 골목 속에 있는 민박집을 찾는 데 성공.
1인 10유로짜리 민박이다.
늦은 저녁을 민박집에서 해결하고 투숙.
벨리코 투르노보는 발칸산맥 동부에 있는 인구 7만의 작은 지방도시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동쪽으로 240km 떨어진 얀트라 강 상류에 있는 古都다.
짜라베츠 언덕, 트라페지차 언덕, 스베타고차 언덕 등 세 개의 언덕에 도시가 만들어졌다.
그중에 짜라페츠 언덕에 구시가가 형성되어 있다.
1185 – 1396년 제2차 불가리아의 수도로 번영했던 古都로 전성기인 아센왕 시절에는 비잔틴 제국을 제압하고
거의 발칸반도 전역을 지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14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볼만한 것은 구도시의 오밀조밀한 골목길과 건물들, 그리고 주위를 구불거리면 흘러가는 인트라 강이 만든 절벽과 강과 절벽을 끼고 건설한 요새와 전통마을 아르바나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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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학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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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라베츠 지역 박물관 쪽 마을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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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경 |
6월 2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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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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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라베츠 지구의 중앙 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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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내 건물 벽화 |
짜레베츠 요새는 천혜의 지형을 이용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것 같다.
요새를 올라가며 내려다보이는 주변 경관은 정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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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레베츠 요새를 배경으로 |
불가리아 제2왕정 때 최고의 부흥기를 맞이하였으나, 139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점령되어 파괴되었다.(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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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城으로 올라가면서 본 산 아랫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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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과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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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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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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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城 아랫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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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왕궁 조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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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
산 정상에 있는 교회 뒷마당에 우물이 있다.
요새를 올라가는데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다.
루마니아에서 출발해서 크로아티아로 가는 팀이란다.
언덕 위로 올라가니 그곳에도 한팀이 있다.
요즘 동유럽 관광코스가 여러 루트로 개발돼서 많은 사람이 동유럽을 찾는단다.
09시 20분, 어제 내린 기차역으로 가서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로 가는 기차표를 살려니까 이곳에서는 팔지 않고 기차로 20분 정도 가서 Gorma 역에서 부쿠레슈티 가는 기차가 있단다.
Gorma에 도착해서 부쿠레슈티 가는 표를 파는 창구를 찾으니 역무원이 국제선 표 파는 창구는 별실에 있다면서 역무원이 거기까지 안내해 준다.
고마운 사람이다.
13시 06분, Gorma 출발.
15시 10분, Ruse에서 기관차 루마니아 차로 교체.
국경인 다뉴브 강을 건너고 16시 45분 여권 검사.
끝없는 대단한 들판을 달린다.
18시 05분 계속 달리는 열차 창밖에 원유시추공이 계속 나타난다.
비옥한 들판에서 원유를 채굴하는 광경을 보며 한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18시 50분, 부쿠레슈티 도착.
19시 30분, ibis 호텔 도착.
20시 호텔 출발해서 시내관광하고 쇼핑몰 식당가에서 양 갈비, 중국음식으로 늦은 저녁.
김을라 여사가 접대.
면적 : 110,912km2.
인구 : 704만 명(2012년)
종족구성 : 불가리아인 84%, 터키인 9%, 집시 5%
종교 : 불가리아 정교 80%, 이슬람교 12%.
언어 : 불가리아어.
화폐 : 레바
1인당 GDP : $7,243(2010년)
수도 : 소피아(Sofia)
<발칸전쟁>
발칸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발칸반도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전쟁이다.
1908년 오스트리아 – 헝가리가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며 발칸반도까지 진출하려 하자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는 러시아의 지원으로 발칸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발칸동맹은 오스트리아 – 헝가리보다 5세기 이상 발칸반도를 지배해온 오스만튀르크에 더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912년 10월 발칸동맹이 오스만튀르크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발칸전쟁이 벌어졌다.
패배를 거듭한 오스만튀르크는 불가리아를 통해 휴전을 요청했고, 1912년 12월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휴전이 이루어진 지 반년 만에 발칸동맹 내에서는 오스만튀르크로부터 얻은 영토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영토분할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가 1913년 6월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함으로써 제2차 발칸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제1차 발칸전쟁에서 얻은 영토를 모두 잃게 되었다.
제2차 발칸전쟁이 끝난 바로 다음 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 헝가리를 비롯한 동맹국들은 불가리아에 동맹국 편에 가담해 싸우면 세르비아 영토의 일부를 떼어준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불가리아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동맹국 편에 가담했으나 전쟁은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고, 불가리아는 지금의 영토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서진근 편저 UN 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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