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chi

11월 27, 2018

북인도 – 산치(산치大塔)



12월 29일
엘로라 석굴군을 돌아보고 밤 기차로 Bhopal로 출발했다.
Bhopal은 마디아프라데시 州의 州都로 11세기에 건설된 도시다.
두 개의 호수가 있는 이 도시는 라자스탄의 부호들이 몰려 사는 도시다.
인구 160만 명에 모슬렘이 40%다.
보팔에 온 것은 산치에 있는 아소카 왕의 大塔을 보기 위해서다.

이 Bhopal에서 산치까지는 약 48km이다.
이 작은 마을에는 아소카 왕의 불탑(스투파)이 거의 온전히 남아있어 이 지역을 석가모니가 방문한 적은 없지만, 불교 유적지의 하나로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곳에 불탑과 수도원(僧院)이 모여 불교문화가 번성하였다.
넓은 초지로 된 완만한 언덕 위에 20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온 거대한 스투파가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소카 왕은 인도 통일전쟁을 치르며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것을 뉘우치고 불교에 귀의하여 석가모니를 기리는 불탑을 여러 곳에 세웠다. 그리고 왕자와 공주를 남북 쪽으로 보내 불교를 전파하는데 애썼다.

이곳의 대탑은 아소카 왕 때 기초를 만들고 기원전 2-1세기경에 완공했다.
지름이 36.5m, 높이가 16.4m인 반구형의 스투파는 동,서,남,북에 석조 문을 세우고 석가모니의 생애와 민중이 사는 모습을 세밀하게 조각해 놓았다. 인도 초기 불교미술의 보고다.

석가모니는 열반할 때 자기의 형상을 믿지 말고 자기의 설법을 믿으라고 했기 때문에 석가모니의 형상은 없고 연꽃(탄생) ,白馬(출가), 보리수(고행=해탈), 족적(생애), 바퀴(법륜=설법)를 조각해서 석가모니의 행적을 나타내었다.



보팔 시내 개천가  빈민촌의 아침




통행 요금 징수소
 보팔에서 산치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가로막대로 막고 통행료를 받는다.



산치

고고학 박물관 가는 길 안내

산치 대탑 입구에 있는 거대한 인도 소나무

고고학 박물관
 중앙에 산치 대탑이 보인다.
입장료

산치 대탑

산치 대탑.(제1 스투파)
 제1스투파에 봉안된 사리함은 샤리푸트라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샤리푸트라는 석가모니의 제자로 부처가 입멸한 뒤 6개월 만에 영면에 들었다.
샤리푸트라는 특히 소승불교를 닦은 수행자로서 존경 받는 인물이다.



石門(토라나)
 스투파는 돌로 담장을 두르고 네 군데 석문을 만들어 세웠다.



石門(토라나)






석문




네개의 석문에는 기둥과 가로대에 석가모니의 前生과 一生, 그리고 민중의 생활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

석가모니는 열반에 들 때 자신의 형상을 믿지 말고 설법을 믿으라는 유언을 남겨 부처님의 像은 새기지 않고 연꽃(탄생), 白馬(출가), 보리수(고행과 해탈), 足跡(생애), 바퀴(法輪=설법)으로 표현해 놓았다.



石門의 彫刻















스투파에 기대어 앉은 부처님

스투파에 기대어 앉은 부처님

제3 스투파
 토라나(스투파 출입문)이 하나만 남았다.





대탑과 수도원(僧院) 사이에 있는 작은 스투파와 좌대들.



수도원 터

고고학자들

수도원 뒤쪽에 있는 인도양식과 다른 석조건물

입구로 나오는 도중 만난 화가 지망생들

산치 대탑을 배경으로.

가이드 모녀
우리 일행을 안내한 가이드는 브라만이다.
가이드라는 직업도 고급 직업이라서 부라만 계급이 독차지 한다.
딸이 산치 대탑을 못 보았다고 함께 데리고 왔단다.
우리의 요청으로 노래 한 곡을 뽑았다.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가 있다.
세습적 계급제도인 카스트 제도는 크게 최상위 지배계급인 브라만(약 5%), 무사계급인 크샤트리아(약 25-30%), 상인 계급인 바이샤(약 40%), 천민계급인 수드라(약 20%)라기 있으며 그아래 불같촉 천민이라는 계층이 약간 있다.

<탑塔>

‘탑파(塔婆)’의 준말이다.

탑파는 인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스투파(率堵婆)라고 하는데, 이를 의역(意譯)하여 방분(方墳) 또는 고현처(高顯處)라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탑이라고 부르는데, 스투파는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 Sanskrit)의 stupa의 소리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며, 탑파는 파리어(巴梨語, Pali)의 thupa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stupa는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土石)을 쌓아 올린 불신골(佛身骨, 眞身舍利)을 봉안하는 묘(墓)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탑파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리랑카에서 탑을 다가바(dagaba) 또는 다고바(dagoba)라 부르고 있는 것은 다투가르바(dhatugarba), 곧 ‘사리봉장(舍利奉藏)의 장소’라는 말을 약하여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미안마(Myanmar)에서는 탑을 파고다(pagoda)라 부르고 있으며, 구미인(歐美人) 역시 파고다라고 부른다.

세간에서는 흔히 홀쭉한 고층건물을 탑이라고 부르는 일이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타워(tower) 같은 것이지 스투파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찰에 건립된 탑은 엄밀하게 말하여 ‘탑파’ 또는 ‘불탑’이라 표현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가 구시나가라(Kusinagara)의 사라쌍수(沙羅雙樹) 밑에서 열반한 후 그의 제자들은 유해를 당시 사회의 풍속에 따라 다비(茶毘 : 火葬)하였다.

이때 인도의 여덟 나라에서 그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이 일어나게 되자 도로나(徒盧那)의 의견에 따라 불타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 주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하였다. 사리신앙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불탑 역시 이때에 기원한다.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지 100년이 지나 대인도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Maurya)왕조의 제3대 아소카왕(Asoka, 서기전 273∼232)은 불사리를 안치한 8대탑을 발굴하여 불사리를 다시 8만4000으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신심 깊은 아소카왕이 일시에 많은 탑을 건립함으로써 넓은 지역에 불교를 크게 전파시켰음을 알 수 있다.

서기전 3세기 아소카왕 때의 불교 중심지였던 산치(Sanchi)에는 지금도 ‘산치탑’이라 하여 거대한 불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산치탑’은 거대할 뿐만 아니라 4대 탑문(塔門)과 주위 난간 조각들이 아릅답고 또한 가장 오래된 불탑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세계 제일의 탑파이다.

이와 같이, 탑을 세우는 의식은 인도에서 비롯되어 8기의 탑을 쌓았는데, 최초의 탑은 반구형(半球形)을 이루어 마치 분묘(墳墓)와 같은 모양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탑은 본래 원분형(圓墳形)을 이루고 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밑에 높은 기단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상륜(相輪)의 수효가 늘어나는 한편 주위에 돌난간을 둘러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놓게 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96.1.5, 한국학중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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