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and – Warszwa

11월 16, 2018

폴란드(Poland) – 바르샤바(Warszwa)



2013년 6월 9일(일)

08시 45분 프라하 구 시청사 앞 광장 부근을 한 번 더 돌아보고
11시 35분 기차탑승.
바르샤바를 향해 달리는 벌판이 끝이….
군데군데 물이 넘친 흔적이 보인다.

바르샤바에 가까워지면서 5일 부다페스트에서 헤어진 김기명 교수와 김종옥 사장과 약속은 안했지만
바르샤바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5시경 전화했다.
김종옥 사장이 받는다.
바르샤바에서 리투아니아로 가는 교통편을 찾지 못해 폴란드의 발트 해 쪽 항구도시 그단스크로 30분 전에 출발했단다.
조금 일찍 전화했더라면 만날 수 있었을 것인데 아쉽게 됐다.
그단스크로 가면 발트 3국으로 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독일로 가서 베를린과 포츠담을 들러보라고 했다.

19시 40분, 바르샤바 중앙역에 도착했다.빌니우스행 기차는 아침 7시 22분에 한 번 있단다.
도착시각은 18시 16분.

우선 택시를 타고 역에서 제일 가까운 Hotel ibis로 갔다.
방 2인실 2개, 1인실 1개를 133유로에 들었다.
호텔에서 택시로 10여 분 거리에(에로졸림스키) 버스터미널이 있어서 다녀왔다.
빌니우 가는 버스가 19시에 2대, 21시에 1대 있단다.

라면으로 저녁식사하고 쉬었다.



6월 10일(월)

폴란드는 중부 유럽 평원지대에 있는 나라로, 오랫동안 외세의 시달림을 받은 점과 약간의 소수민족이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가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폴란드인으로 이루어진 단일민족 국가라는 점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나라 중 하나로 이 기간 동안 국민의 20%가 죽임을 당했으며, 그중 절반은 폴란드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다.
1918년 11월 11일 독립했다.

08시 30분 아침식사하고 버스터미널 가서 19시에 출발하는 버스표 확보하고 관광에 나섰다.
10시 10분에 호텔 체크아웃하고 짐 보관시키고 20번 트램타고 Old Town으로 갔다.
바르샤바는 세 번째 방문이다.

바르샤바는 제2차대전 때 독일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1944년 바르샤바 시민의 봉기에 화가 난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85%가 파괴됐단다.
그러나 바르샤바 시민들은 5년만에 완전히 복구하여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 10대 문화유산에도 선정되었다.

구도시의 복구에는 설계도, 사진, 화가들의 그림, 시민들의 기억력까지 총동원해서 복구해서 바닥 돌까지도 중세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놓는 데 성공했다.

왕궁 앞 잠코비 광장을 시작으로 골목길을 따라 Old Town Market Square, Barvica(말발굽 성벽), 대성당, 대통령 궁, 바르샤바대학을 지나 코페르니쿠스 동상이 있는 광장까지 아름다운 거리를 감상했다.


구시가지를 향하여

구시가지 잠코비 광장을 배경으로.

왕궁(Royal Palace)


잠코비 광장과 왕궁, 지그문트 3세 동상, Old Town. (빌려온 사진)



뒤로 노란색의 바실리카 성당이 보인다.

성당내부

Old Town Market Square



Monument of Warzaw Mermaid(인어 像) 바라샤바의 수호신이란다.



Barvacan(말발굽 모양의 성벽)
 유럽에 세 곳밖에 없단다.



폴란드 전통 음식점에서.

성당

라지빌로프 궁전(현재 대통령 궁)
 데모를 하는데 애교스럽다.



성당

과학기술 센타(?)

코레르니쿠스 동상
 1473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1491년부터 당시 폴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대학에서 4년간 공부.

수학자, 철학자, 천문학자였으며 교황의 비서관을 지낸 성직자였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지동설을 주장했다.

같은 시대의 마틴 루터와 칼뱅은 코페르니쿠스를 맹렬히 비난했다.
1616년에 교황청에서 금서로 지정했다가 19세기 초에 풀렸다.






성 십자가 성당

바르샤바 대학

공원에서

쇼팽 기념물


2010년 8월 2일(토)

06시 20분, Berin Gesund Brunnen 역 출발,
12시 55분 폴란드의 수도 Warszawa 중앙역에 도착했다.

폴란드는 두 번째 방문이다.
2001년에 바르샤바에서 Rent a car를 해서 남쪽으로 내려가 1596년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기기 전까지 수도였던 古都 Krakow를 보고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빠져나간 적이 있다.

그래서 반나절 동안 중세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舊 시가지를 중심으로 보고 리투아니아로 넘어 가기로 했다.

빌니우스(리투아니아 수도)행 야간 버스표(23시)를 예약하고 기차역 보관함에 짐을 맡기고 기차역 건너편 지하광장에 있는 식당 AKASHIA에서 얼큰한 해물 가락국수로 점심을 했다.
이곳은 김재학이라는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바르샤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과학과 문화의 궁전이라는 거대한 빌딩이다.

높이가 234m나 되는 이 건물은 스탈린이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연방 여러 나라를 동원해서 지은 건물이기 때문에 폴란드 시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작가는 산문에 “저 빌딩이 보이지 않는 주택 구함”이라는 광고를 내서 비꼬기도 했단다.

건물 광장에는 이 건물을 지을 때 관계한 나라들의 인물상들이 세워져 있다.
그중에는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은 북한 여인의 동상도 있다.



과학과 문화의 궁전
 소련의 스탈린이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소련연방 여러 나라의 지원으로 건축한 빌딩.
비르샤바 모든 지역에서 보이는 이 건물을 미워한 어느 작가는 “저 건물이 보이지 않는 집 구함”이라는 광고를 하여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건물 광장에는 건축에 참가한 나라들의 인물상이 세워져 있는데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은 북한여성 동상도 있다.



AKASHIA 식당
 중앙역 건너편 지하광장에서 한국인 김재학 씨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여기서 얼큰한 해물 가락국수로 점심을 했다.
16시, 버스 502번을 타고 바르샤바 공원으로 갔다.
정원에는 장미가 한창 피어 있고 호수와 숲, 그리고 조각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공원에는 많은 시민이 나와 있다.

그 공원 한가운데 분수대 뒤로 쇼팽 동상이 있다.
나는 쇼팽을 좋아한다.
그래선지 어딘가 음산해 보이기도 하는 쇼팽의 동상이 역동적이고 멋있어 보여 앞뒤로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쇼팽의 조각상을 보면서 쇼팽이 조국을 떠날 때 조국의 흙을 한 줌 싸서 가지고 갔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공원에서




공원의 쇼팽 동상


1810년 폴란드 태생의 쇼팽은 20세에 대 음악가의 꿈을 안고 세계로 나섭니다.
빈을 거쳐 도착한 프랑스 파리는 순진한 시골 청년에게는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건강도, 마음도 심약하기만 한 쇼팽에게는 도전의 나날이었고, 27세엔 건강 때문에 약혼녀로부터 버림받게 되고, 쇼팽은 드디어, 여성해방 운동가 “조르주 상드”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6년 연상의 기혼녀 “상드”와 9년간의 열애 동안 지병인 폐결핵이, 그의 명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지요. “상드”의 지극한 보살핌에도…

2년 동안 덫을 놓아 쇼팽을 차지했던 “상드”는 이별의 편지 한 통으로 “쇼팽”을 버렸고, 그녀는 죽기 2주 전까지도, “내 가슴은 언제나 붉은색이었다” 라고 말했답니다.

건강 악화와 배신의 충격으로,,그렇게 천재 음악가는 갔습니다.
그의 나이 39세!

내 심장은 조국 폴란드에,자기 장례식 때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쇼팽의 누나 “루트비카”는1849년 10월 30일,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흐르고 있는 장례식장 “마들렌” 성당을 뒤로 한 채, 그의 심장과 “조르쥬 상드”의 편지 등을 가지고, 그가 평생 그리도 사랑했던 조국 “폴란드”로 향했습니다.

-초 립-
(빌려 온 글)
중부유럽 평야 지대에 위치한 폴란드는 오랜 세월 외세에 시달림을 받았고 폴란드어를 쓰는 폴란드인으로 이루어진 단일민족이라는 점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세계 제2차대전 때에는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나라다.
인구의 20%가 죽임을 당했다(그중 절반은 폴란드에 살던 유대인).

2001년도에 바르샤바에 갔을 때 남편은 대학교수이고 부인은 중학교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는 집에 초대받아서 저녁을 먹은 일이 있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폴란드인의 희생이 유대인 전체 숫자보다 더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아우슈비츠를 가본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의외의 대답이 나온다.

어린애들이 자라면서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어린 나이에 그 비참한것부터 보여주면 원한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이 되므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란다.

역사적인 사건이므로 자란 후 비교판단력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것이 좋지 어려서부터 적개심을 키우게 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단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현실과 비교해 보면서……..

공원을 나와 구시가지로 갔다.
7년 전에 왔을 때보다 많이 복원되었다.
바르샤바는 1596년 폴란드의 수도가 되었다.
남부 크라쿠프에서 수도를 옮긴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에서 열 번째 안에 드는 도시였으나 2차대전이 끝나자 도시의 85%가 파괴되었다.
1944년 바르샤바 시민들은 독일에 항거하여 시민봉기를 일으켰다.
화가 난 히틀러는 “바르샤바”라는 지명만 남기고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단다.
그래서 이 도시가 잿더미가 됐다.

전쟁이 끝나고 5년 만에 바르샤바는 완벽하게 재건됐다.
설계도, 사진, 화가들의 그림과 사람들의 기억까지 동원해서 교회, 왕궁, 시장광장, 성곽(바르바칸) 등이 다시 건설되었다.
중세의 우아하고 기품있는 건물과 장소들이 아주 치밀하게 복원되었다.
건물의 장식 하나 까지 똑같이 만들었다.
심지어 벽돌에 금이 간 것까지 똑같이 복원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렇게 치밀하게 원형대로 복원해서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고 세계 10대 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Old Town 입구 잠코비 광장으로 가는 길


우측으로 왕궁(Royal Palace)이 보이고 그 앞이 잠코비 광장이다.
광장 한가운데 기둥 위 동상은 지그문트 3세 像이다.




Old Town Market Square(rhkdwkd)으로 가는 길.
길드 하우스(?)
바르샤바의 Old Town은 2차대전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옛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재건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랐다.



Old Town Market(구시가 광장)



Barbican(말발굽 모양의 성벽)

뀌리 박물관
 대성당 결혼식을 보고 바르샤바대학을 거쳐 과학기술센터로 갔다.

과학기슬센터 앞 광장에는 코페르니쿠스의 동상이 있다.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이고 성직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마틴 루터와 칼뱅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동상 앞마당에는 태양계의 천문도가 만들어져 있다.



대성당 앞에서 신혼부부를 기다리는 마차

신혼부부의 출발

길가의 조각상

대주교 동상


코페르니쿠스 동상
 과학기술센터 앞 광장에 있다.
그 주변 바닥에 태양을 도는 행성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코페르니쿠스.(1473 – 1543)

1473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1491년부터 당시 폻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대학에서 4년간 공부.
수학자, 철학자, 천문학자였으며 교황의 비서관을 지낸 성직자였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지동설을 주장했다.
같은 시대의 마틴 루터와 칼뱅은 코페르니쿠스를 맹렬히 비난했다.
1616년에 교황청에서 금서로 지정했다가 19세기 초에 풀렸다.



태양계 천문도

태양

Venus.(금성)

Mercury(水星)

Earth(지구)

Moon(달)





면적 : 312,685km2
인구 : 3848만 명(2009년)
수도 : 바르샤바
종족구성 : 폴란드인 97%, 독일인 0.4%,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종교 : 가톨릭 90%, 동방정교 1%.
언어 : 폴란드어.
화폐 : 즈워티(1$ : 2.87즈워티 – 2009년 10월)
1인당 GDP : 13,799$.

<아우슈비츠>

폴란드 남부에는 폴란드어로 오슈비엥침(Oswiechim), 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Auschwitz)라고 부르는 도시가 있다.

가장 악명 높은 나치의 강제수용소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홀로코스트(Holocaust,유대인대학살)의  상징이 되었다.

1940년 4월 히믈러(Heinrich Himmler – 나치 친위대인 SS 책임자)는 아우슈비츠에 첫 번째 수용소를 건설을 명령하고 폴란드와 독일의 정치범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설은 흔히 “아우슈비츠 1호”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라고 불리는 것은 1941년 10월 아우슈비츠 인근의 비르케나우(Birkenau)에 건설된 “아우슈비츠 2호”다.

이 시설은 숙소, 1회에 2천 명을 살상할 수 있는 가스실, 시체보관실, 화장터 등이 체계적으로 건설, 운용되어 “살인공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유대인들은 화물차에 실려 이곳에 도착 후 환자와 어린이, 노약자는 즉결 사형되고 젊고 신체 건강한 사람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한 후 굶주림, 혹은 과로로 사망했다.

후에는 가스실을 통해서 함 번에 수백 명씩 죽어 나갔으며, 의학용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대개 유대인이나 집시, 슬라브인이었으며, 나치에 반대한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살해된 유대인은 57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중 150만 명 정도가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는 한 번에 10만 명까지 수감할 수 있는 거대한 수용소이었으나 1945년 1월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포로들은 7,650명뿐이었다.
<서진근 편저 UN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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