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ippines – Baguio – Batac- Vigan

11월 18, 2018

Baguio- Batac-Vigan



2010년 7월 4일(일) 맑음

Banaue->산상 휴양도시 Baguio
08시 35분, Hotel Banaue.
09시,도중에 민속 전망대, 고풍스러운 목각을 팔던 곳인데 우리나라 서낭당 분위기가 나는 조형물들이 있다..
09시 26분, Lanawe Bridge까지 내려와 철교에서 다시 등판 시작,
09시 55분, Lamut 강, 다리 통과 산지 끝.

바기오 쪽으로 들어서서는 계속 계곡을 따라 달린다.
산허리를 돌아서니 댐이 보인다.
계속 올라가다
14시에 Baguio 도착(해발 1,500m, 연평균기온이 17.9도),

스페인 식민지 시절 금광개발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후 20세기 초부터는 미국인들이 피서지로 개발,

2차대전 전에는 여름 수도,지금도 3월부터 5월까지는 행정수도가 옮겨 온단다.
인구 30만, 마닐라 250km. 한국인 어학연수 중심지. 대학 6개, 학원 10개, 필리핀에서 영어발음이 가장 정확한 편이란다,

월 하숙비 50~60만 원.
산 능선 따라 자리 잡은 숲 속 도시라 산만하고 교통 혼잡하여 공기는 별로 좋지 않다.

14시 10분, 한국식당 칠천각 점심(온통 한국 학생들).
15시 30분, 호텔 Baguio Palace 입실 휴식.
18시 35분, Mine Park View point 조망(최초 광산개발지역)
19시 40분, 칠천각 돼지족발, 짬뽕 국물, 된장찌개. 한국식 맛과 분위기 저녁 식사.

휴양지라고 하지만 1,500m 고지대이므로 장기간 거주 시에는 많은 부작용이 있단다.
식당을 하는 젊은 한국인도 기압차이로 말미암아 건강상 문제가 있단다.
노후를 즐기려 이곳에 온 사람들은 골프 외에는 할 일이 없고 외지로 드나들기 불편해서 권할만한 곳은 못 된단다.


바기오 씨티의 대통령 집무실
 3월부터 5월까지는 행정부가 옮겨 온단다.



바기오 씨티의 뷰 포인트(Mine Park View Poit)
 최초의 광산이 있던 곳을 보는 장소.
지금은 공원과 주택지가 되었다.


기념품 가게

바기오 대성당


바기오 시내를 빠져나오며.
중심가는 매연으로 공기가 탁하다.
휴양지 들은 시내를 벗어나 산중에 들어가 있다.



트라이시클
 시골 택시로 대중교통 수단이다.
지역마다 색깔이 다르다.



7월 5일(월)

Baguio까지 온 김에 마르코스의 고향 Batac까지 가보기로 했다.
국내에 있을 때 누군가가 마르코스고향이 경치가 좋다는 말을 들었었다.

08시 20분, 호텔 출발해서 급경사 산간 도로를 내려간다.
1시간여 달리니 평지가 나온다.
어제 올라간 코스와 다른 길이다.

12시 50분,Vigan에 도착해서 Vigan Max’s 식당에서 꼬리곰탕으로 점심.

15시, Batac(마닐라 471 km)시에 있는 마르코스 기념관에 도착했다.
마르코스가 살던 규모가 큰 저택 옆에 시신을 안치시켰다고 한다.
그 옆으로는 사진 갤러리..

마르코스가 살던 저택은 폐가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는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고향 Batac 시 대성당.
바기오에서 6시간 걸려서 왔다.


마르코스 박물관으로…


마르코스 박물관


이멜다 초상화

마르코스 흉상
 흉상 뒤 Hall에 미라(?)로 만든 마르코스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독재자들은 자기도취에 사는가?



포토 갤러리



마르코스와 이멜다의 기록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국 왕자와…..

전두환 대통령과

마르코스가 살던 고향 저택
 지금은 폐가가 되었다.



이멜다와 그 가족들
 이멜다와 그 아들은 상원의원이 되었단다.



Batac 입구에 있는 스페인 지배 초기에 세워진 성당



15시 30분, Batac 출발해서 ,Vigan으로 돌아왔다..
비간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 온 분위기다.

유네스코는 이 마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18시 15분, Hotel Gordion에 투숙했다.
옛 스페인인의 저택을 호텔로 고쳐서 영업하는 고풍스러운 호텔이다.




Vigan에서 우리가 묵은 호텔

Vigan에서 우리가 묵은 호텔
 옛 스페인 시절의 저택을 고쳐서 호텔로 운영.
침대 2개에 1,400 페소.





Vigan 출신 여류시인 동상

스페인 지배 시절의 주택가

스페인 지배 시절의 주택가

대성당과 종탑

성당 내부

종탑 꼭대기의 장식물

소공원의 리살 동상
 7월 6일(화)

08시 20분, Vigan 시내관광. 중앙 광장, Cathedral.
08시 40분,Vigan을 출발해서 마닐라로, 마닐라까지는 420km .
11시간부터 13시간 정도 걸린단다.

마닐라 도착 1시간 30분 전, 수빅 만(해군기지) 가는 로드 사인이 보인다.
그때 열대지방 특유의 스콜이 쏟아진다.
20여 분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18시, 마닐라 Executive Plaza 호텔 도착.
3박 4일간 하루 평균 8시간 이상 밴을 타고 달렸다.

우선 사우나와 안마를 해서 피로를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몇일 전에 갔던 극장식당.

저녁 식사로 돼지 바비큐 반마리와 해물 찜 1접시, 맥주 1병씩.
20시 30분부터 쇼를 공연한다.
쇼 내용이 필리핀 분위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옛 성당 유적



마닐라에서 디너쇼




뱀부 댄스

탱고

병사들의 춤

민속춤


국적 없는 춤

손님들을 분장시켜 함께 추는 춤
 우리나라 젊은이가 능숙하게 춤을 춘다.



한창 월드컵 축구로 전 세계가 흥분하고 있는 때인데 필리핀은 조용하다.
오로지 농구란다.
나이 먹은 택시기사는 신동파를 아느냐고 물으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원 핸드 슛 동작을 한다.

필리핀은 60년도 초까지 우리나라에 장충체육관을 지어주었고 막사이사이상을 제정해서 수상자를 뽑으며 아시아에서 선진국으로 군림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준하 씨 등 일곱 분이 그 상의 수상자로 선정되는 등 아시아에서 대단한 선진국 역할을 했던 나라다.

그랬던 나라를 방문한 소감은 깜깜하다는 표현밖에 할 말이 없다.



7월 7일(수)

마니라 灣을 걸어서 쇼핑몰 ASIA로 갔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이란다.
미국의 쇼핑 몰 구조를 그대로 따왔다.
엄청난 규모에 고급 진열품들이 즐비하지만 손님들은 별로 많지 않다.
남 걱정이지만 수지가 맞을까?

11시에 택시 2대로 공항으로 갔다.
한 대당 250페소.
6박 7일간의 필리핀 여행을 끝낸다.



마닐라 灣 풍경

쇼핑몰 ASIA
 아시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이란다.
미국의 쇼핑몰을 그대로 본떴다.
규모가 대단하다.
슈퍼마켓도 있다.



쇼핑몰 2층

한국 앤틱 가구점
 필리핀인이 경영하는 가게다.


슈퍼마켓



면적 : 300,000km2.
인구 : 9,797만 명(2009년)
종족구성 :타갈로그족 28%, 세부아노족 13%, 일로카노어족 9%,
바시아족 8%, 힐리가이노일리고족 7.5%, 비콩족 6%,
와라이족 3%, 외국인 기타 25%.
종교 : 가톨릭 83%. 개신교 9%, 이슬람교 5%.
언어 : 타갈로그어,
영어 외 8개 주요 부족어.
화폐 : 필리핀 페소(1$ : 46.83페소(2009년 10월)
1인당 GDP : 1,866$(2008년)



<막사이사이>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는 필리핀의 전 대통령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후크발라하프(Huk balahap) 반란을 진압하여 유명해졌으며,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막사이사이 賞이 제정되었다.

막사이사이는 1907년 Luzon 섬에서 기능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대항해 게릴라군을 이끌었으며,
미군이 필리핀을 탈환한 후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필리핀 독립 후 하원의원이 되었고 1950년에는 카리노대통령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후크발라하프는 원래 루손을 거점으로 하던 反일본 게릴라 단체였으나 1940년대 말에는 공산주의 단체로 변질했다.

후크발라하프가 루손 섬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자 당시 대통령이던 카리노는 막사이사이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해 후크발라하프 진압을 명령했다.

막사이사이는 농민들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여 농민들을 정부 편으로 끌어들이고, 부패한 군대를 개혁했다.
농민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후쿠발라하프는 급속히 약화됐다.

막사이사이는 게릴라들을 소탕하는 데 성공했으나 , 카리노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여 장관직에서 해임당했다.

막사이사이는 1953년 선거에 출마해 카리노 대통령을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막사이사이는 후쿠발라하프를 진압한 공적과 청렴한 성품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막사이사이는 미국의 맹방으로 反 공산주의 정책을 펴, ‘태평양의 아이젠하워’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막사이사이는 1957년 3월 17일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세부 섬 근처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듬해 막사이사이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막사이사이賞을 제정하게 되었으며, 막사이사이 재단에서 해마다 언론문화와 지역사회 발전, 공공사업, 국제 협력 등의 부분에서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

한국인으로는 1962년 장준하를 시작으로 김활란, 김용기, 오웅진 신부, 법륜 스님, 윤혜란, 김선태 목사 등이 수상했다.
(서진근 편저 UN회원국 다이제스트 중에서)

You Might Also Like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