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ia – Tbilisi – Mtskheta – Gori

11월 18, 2018

그루지아 – 트빌리시, 므츠헤타, 고리, 코카서스산맥



2003년 9월 7일(토)

22시45분에 이스탄불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 새벽 02시30분(시차 2시간)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간단히 비자를 준다. 비자 피 $40.

제일 늦게 짐을 찾아 나오니 다이애나라는 아가씨가 짐 찾는 데까지 들어와서 안내를 자청한다.
봉고차를 타고 올드타운 가까운 호텔을 찾아가자고 해서 갔는데 계속 빈방이 없다.
세 번째 찾아간 집(민박집 수준)에 더블 $50에 얻었다.
새벽 4시30분이 돼서야 눈을 붙였다.

5세기 이전 그루지아(자기들은 조지아라고 부른다)는 트빌리시에서 약간 북쪽의 므츠헤타에 수도를 정한 왕국이었으나 5세기 중반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겼다.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를 연결하는 통로로 번영을 누렸으나 그만큼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11-12세기 타마라 여왕 치세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었다.
15세기에 다시 페르시아에 점령당했고 러시아의 협조를 얻어 페르시아와 터키를 물리쳤으나 1801년 러시아에 병합되었다.
1918년 러시아에서 독립하고 1936년 소비에트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1500년 이상을 외세에 시달리면서도 국가의 면면을 이어온 그루지야의 트빌리시는 소련연방 중에서도 古都에 속하며 국민의 애국심은 매우 강하다.
*.트빌리시

현재 그루지야의 수도로 1500년 된 古都이다.
“따듯하다”라는 뜻인데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수도를 므츠헤타에서 이리로 옮겼단다. .
이 도시는 러시아와 페르시아, 중앙아시아와 소아시아를 잇는 무역로로 번성했으면서 그만큼 외세의 시달림도 끊임없이 받았던 도시이다.

우리 묵는 곳은 고풍스러운 개인 주택을 호텔로 사용하는 집인데 도시 중심지인 레닌 광장에서 3분 거리에 있다.
3일간 있기로 하니 여유가 생긴다.
그동안 밀렸던 빨래를 하고 나니 개운하다.
이 정도면 집에 갈 때까지 OK.

2시에 렌터카 기사가 새 차를 가지고 왔다.
16인승 신형 벤츠 밴이다.
그루지야 근교와 코카서스 군용도로 2일,
아르메니아의 예레반과 관광지 3일 합쳐서 5일간 풀 옵션으로 1일 $130에 계약했다.

2시30분부터 4시간 동안 Old City를 걸었다.
레닌 광장 – 푸시킨 거리를 따라 오른쪽으로 – 쿨라강변 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으로 콜로니언 시절의 건물들( 이 목조건물들은 페르시아풍 건물로 조각과 베란다가 아름답다.) – 강변에서 강 오른쪽을 따라가면 시오니 사원,- 강 건너 바위절벽 위의 메테히 사원, – 다시 강을 건너와 터키식 목욕탕(지금은 휴게실 겸 레스토랑) – 므츠타민다 산 위에 그루지야의 어머니 상 등등.

저녁은 강남익 회장님이 당신이 내신다며 기사에게 부탁해서 가장 그루지야 전통음식점엘 갔다.
상당한 시설과 거기에 걸맞은 음식과 서비스가 좋았다.
음식들은 상당히 품위가 있고 맛도 일품이다. 8명이 $120.


트빌리시 올드 타운에 우리가 묵는 호텔

레닌광장의 깃발

페르시아풍의 목조건물

페르시아풍의 건물

강변으로 내려가는 길가의 조각


종(鐘)

조영선 여사님

건물 벽 그림

群舞
 은근히 엉덩이에 손을 대고 돌아간다.




므츠타 민다 산 정상에 있는 그루지야의 어머니상.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포도주를 들고 있다.



메테히 사원



사원내부




사원에서 바라본 시내 풍경


터키식 목욕탕

터키식 목욕탕


지금은 휴게실 겸 레스토랑으로 이용한다.



터키식 목욕탕 내부
 6개의 방중에서 1개만 목욕탕으로 이용되고 나머지는 까페로 영업한다.
목욕탕에는 유황냄새가 많이 난다.





노점 과일장수 아줌마에게서 과일을 사 먹는다.
메테히 사원을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다리를 건너자 과일장수가 있었다.



과일장수가 가지고 있는 저울
 꽤 많은 나라를 다녀 보았지만 아직도 저울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 되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뿐인 것 같다. 동유럽 노점상도, 부탄의 시장 아줌마도 모두 저울을 사용한다.




유대교회

동방정교회
 올드타운을 돌아보고 레닌광장으로 되돌아와서 루스타밸리 거리를 따라가 이베리아 호텔까지 걸었다.
신도시 쪽이다.  육중한 유럽양식의 건물들이 양편에 즐비하다.

트빌리시 최고급인 이 호텔은 흑해 연안의 아파지아 지역 주민 중 그루지아파의 난민들이 쫓겨와 점거했단다. 신도시 중심부의 고급 호텔이 완전히 난민촌이 되었다.




레닌광장에서 루스타밸리 거리를 가는 코너의 건물
 건축양식이 유럽 양식이다.



가로수 밑에서 쉬는 모녀



대로변 조형물



유럽풍 빌딩들

이베리아 호텔
 난민촌이 되었다.
몇 년 전에는 트빌리시 최고의 1급 호텔이었는데 정치적인 사연이 얽혀 난민들이 점거해 버렸다.



이베리아 호텔 앞 광장의 분수와 조각상
 돌아와서 현지사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어서 교통비를 현장에 가서 확인해 보았다.
시외버스 터미널을 찾아가는데 아무리 물어봐도 찾을 길이 없다.
우연히 친절한 사람을 만나서 물어보니 자기는 경찰인데 휴무라서 사복으로 어디엔가 간다면서 현장까지 안내해 준다
.
정상적으로 영업소가 있는 터미널은 없었다.
택시나 밴 등이 각자 손님을 끄는데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어렴풋이 판단해 보니 우리가 흥정해 놓은 가격이 제일 타당성이 있다.
돌아와서 바로 계약을 확정했다.




트빌리시 전 수도인 므츠헤타의 스베티 쵸벨리 교회.
4세기에 최초로 짓고 11세기에 중건한 오소독스 교회.



교회를 들어가기 위해 정문으로
 오늘이 일요일이다.
대통령이 므츠헤타교회로 예배를 보러 오신단다.
도로변에서부터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 경계가 철저하다.



사제들
 성문을 들어서니 우측 한 곳에 검은 옷을 입은 사제들이 모여 있다.



사제들
 입구에 붉은 옷의 사제들(?)이 모여 있다.




성당 앞 정원에 놓인 鍾


므츠헤타에서 나와 그루지야 군용도로를 따라가다가 오른쪽 산정에 있는 주벨리 사원.




교회 안에서



주벨리 사원의 내부




주벨리 사원에서 내려다본 므츠헤타
 아그라비아 강과 또 하나의 강이 만나는 합수 머리에 므츠헤타 市가 있다.
중앙에 4세기에 세워진 스베티 초벨리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므츠헤타

므츠헤타에서 나와서 스탈린의 고향 Gori로 가는 도로변의 과일가게


리를 태우고 다니는 기사와 공항에서부터 우리를 안내하는 다이애나. (30세)
모스크바대학에 유학한 인텔리다.
경찰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아기 엄마다.


*. Gori 는 스탈린의 고향이다.
트빌리시에서 북쪽으로 군용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므츠헤타가 나오고 더 가다가 왼쪽으로 조금 들어가서 Gori가 있다.
스탈린은 1879년에 Gori에서 태어나서 1953년에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가난한 신기료 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교회에서 교육을 받았다.
레닌의 추종자가 되어 1922년-1953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다.





스탈린 생가

스탈린 생가 보호 건물
 생가를 보호하기 위해 그 위에 큰 건물을 지었다.



스탈린 생가
 방 두 개에 부엌 하나.



스탈린 전용 객차
 객차에는 스탈린의 집무실 겸 침실,
목욕탕(쇠 솥) 응접실이 있고 부인실은 없다.
첫째 부인과 사별 후 상당기간 독신으로 살았단다.
비서실, 경호원 실이 있다.




시청 앞 광장에 동상


Uplistsikhe는 고리에서 나오다가 다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가 강가에 있는 유적이다.



사암지대에 석굴을 파고 주거, 행정, 종교, 시장 등 기능을 갖춘 도시.
산아래 강가의 벌판에도 주거지가 몰려 있다.
11세기경에 가장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통로 중의 하나.
번성기에는 2만여 명이 살았단다.
13세기에 몽골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사암을 파고 만든 주거지



강변의 주거 터


아그라비강 언덕 위의 아나누리 교회

군용도로를 따라 고개를 오르는 대로변 노점상
노점상


점심 준비
 노점상들이 있는 언덕 중간 간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샤시리크 준비



코카서스산맥

코카서스산맥 고개위로

야생화

군용도로 꼭대기의 들꽃
 아나누리 교회를 지나 도로공사 중인 군용도로를 계속 가면 해발 1,014m에 위치한 휴양지 파사나우리가 있다.
계속 올라가면 회전 전망대, 산꼭대기 2,389m 지점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이 그루지야와 코카서스의 분계선이다.

여기서부터 고갯길을 내려가면 카즈베기라는 코카서스 산중 마을이 나온다.
푸시킨도 이곳에서 3년을 살면서 쯔민다 사메바 사원을 세웠단다.
여기서 코카서스산맥의 최고봉인 만년설을 이고 있는 카즈베크 산을 볼 수가 있는데 오늘은 날이 흐려서 봉우리가 제대로 보이지를 않는다.



언덕 위의 석회 침전물

석회 침전물

쯔민다 사메바 교회
 코카서스 산맥 어느 언덕위에 언덕 위에 자그마한 교회다.
푸시킨이 지었단다.




봉화대

카즈베기 마을
 코카서스 산중 마을로 푸시킨도 이 마을에서 3년을 살면서 교회도 지었단다.
이곳에서 코카서스산맥에서 가장 높은 5,014m의 카즈베크 산 정상이 보이는데 오늘은 날이 흐려서 보이지를 않는다.

그루지야의 군용도로는 1799년 제정러시아 때 러시아가 개통시켰다.
그 2년 후 1801년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병합해버렸다.

최근(2008년8월26일 신문기사) 그루지야는 러시아와 불편한 관계가 되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여기에는 소련 붕괴 후 독립한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등 국가들에 이어 카프카스 산중의 50여 소수민족들의 독립 투쟁과 러시아의 경제적 이해가 얽혀 국제적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9월13일(금)

하루 여유가 있다.
어제 얘기들은 데이비드 칼리지를 가기로 했다.
1시간 30분 정도 초원지대를 달려 초원 한가운데 솟아있는 돌산에 도착했다.
6세기경에 만든 수도원이다. 지금도 수도승들이 있다.
산 위에는 8세기경에 돌산에 굴을 파고 수도하던 장소가 지금도 수십 개가 있다.
수도원 입구에 도착하니 독일인 관광객들이 버스로 한 차 와 있다.
다비드(데이비드?) 칼리지를 가는데 몽골 초원 같은 곳을 지난다.
이러한 들판 한가운데 바위산이 우뚝 솟아 있고 이 산기슭에 수십 개의 동굴을 파고 수도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다비드 칼리지 가는 길

독일인 관광객들


수도원에 들어서자 오른쪽에 바위 위에서 골을 파서 물을 끌어 집수정으로 모아 들이는 시설을 해 놓았다.



들꽃

수도사들이 수도하던 동굴들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한다.



수도원


산 위의 동굴을 향하여

수도원 전경


산 위에서 본 들판



동굴




최후의 만찬



나이 70세에도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임혜숙 할머니

정상



들꽃들





면적 : 69,700km2.
인구 : 457만 명(2012년)
종족구성 : 그루지야인 70%, 아르메니아인 8%, 러시아인 6%.
아제르바이잔인 6%, 오세티아인 4%, 압하지야인 2%.
종교 : 그루지야 정교 65%, 이슬람교 11%, 러시아 정교 10%.
언어 : 그루지야어 71%, 러시아어 9%, 아르메니아어 7%,
아제르바이잔어 6%, 기타 7%.
화폐 : 라리(1$=1.81 라리)(2009연)
1인당 GDP : $3,098(2011년)
수도 : 티빌리시(108만 명)



<그루지야의 분쟁>

오랜 역사와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는 그루지야는 근대 들어 약 100년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특히 스탈린 치하에서는 억압적인 정책 아래 있었다.
그루지야 국민은 러시아에서 분리, 독립하여 자치 국가 건설을 바라게 되었으며, 결국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그루지야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루지야의 민족 운동은 그루지야 내 소수민족들을 자극하게 되었다.
북부의 남오세티야 자치공화국과 흑해에 인접한 압하스 자치공화국이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오세티야 자치공화국은 그루지야 정부가 그루지야어를 쓰도록 강요하는 등 강압적인 그루지야화 정책을 펴자 분리, 독립하여 러시아 내의 북오세티야 자치공화국과 통합할 것을 주장하며 분쟁을 일으켰다.
1991년 11월 남오세티야 자치주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자 분쟁은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유럽안보협력기구(OSEC)에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여 분쟁을 중재했다.

그러니 압하스 자치공화국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1992년 7월 압하스 자치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자 그루지야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압하스 자치공화국의 수도 수후미에 있는 국회의사당에 침입하였고, 압하스에도 이에 무력으로 맞섰다.
전투는 그루지야 서부 전역으로 확산됐고, 정전협정은 번번이 무시되고 전투가 계속됐다.

2년여에 걸친 그루지야와 압하스 자치공화국의 내전으로 2만여 명이 사망하고 2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결국 러시아와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즉시 전투중지와 군대 철수를 요구하고 경제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고, 러시아의 설득으로 1994년 4월 14일 휴전협정이 조인됐으며 일단 전면적인 전투는 중단 되었다.

세바르드나제 대통령과 러시아의 노력으로 내전은 어렵게 마무리 되었으나, 2004년 장미 혁명이 일어나자 그루지야 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친러시아 성향의 세바르드나제 대통령이 물러나고 반러시아, 친미 성향의 사카슈빌리가 대통령에 취임해 그루지야 전체의 통일을 국가과제로 내세운 것이다.
이에 남오세티야 자치공화국과 압하스 자치공화국에서는 다시 반 그루지야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결국 2008년 8월 8일 남오세티야를 진압하려는 그루지야와, 남오세티야 독립을 지지하는 러시아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다.
8월 12일 프랑스의 중재로 휴전 협정이 맺어졌으나, 러시아가 이후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그루지야와 러시아 간 관계는 또 다시 악화됐다.
(서진근 편저 192 UN 회원국 다이제스트 중에서)



<스탈린>

레닌의 후계자로 소련공산당의 대원수를 지낸 스탈린은 개인의 자유를 전혀 허용치 않는 전체주의와 강력한 러시아화정책으로 유명하다.
스탈린은 공산당 이념이 아닌 다른 이념을 지닌 정치활동, 문화활동, 각 지방의 민족운동을 강력하게 억압했다.
그루지야 역시 스탈린 치하에서 억압적인 독재정치를 경험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스탈린 자신이 바로 그루지야 출생이라는 것이다.

스탈린은 1879년 12월 21일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서쪽으로 70km 떠러진 Gori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하는 스탈(Stal)에서 딴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본명은 그루지야어로 요시프 주가슈빌리(Joseb Dzhugashvili)이다.

스탈린의 아버지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었고, 자주 술에 취해 아들을 구타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어 스탈린이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스탈린은 신학교에서 마르크스의 저서를 읽다가 1899년 퇴학당하고 정치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스탈린은 소련의 국가통제위원이 되고 이어 당 서기장이 되었으며, 레닌의 후계자로 반세기 동안 소련의 독재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신격화 했지만, 그가 죽고 소련이 해체 된 이후, 능력은 있지만 잔인하고 난폭했던 독재자로 평가받고 있다.
(서진근 편저 192 UN 회원국 다이제스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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