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nama

11월 21, 2018

파나마(Panama) – 파나마 운하 The Panama Canal



2007년 7월 23일(월)

16시 30분, San Jose를 이륙한 비행기는 18시 20분(시차 +1시간)
석양이 내려앉는 파나마 시티에 착륙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20시 10분에 도착한 올드 타운의 호텔은(us $27.5) 생각보다 깨끗하지 않다.

중미 마지막 여행지라서 조금 좋은 호텔을 잡으려고 했는데 택시 기사가 좋은 호텔을 소개한다기에 따리 왔더니 낭패다.
늦은 밤에 호텔을 찾으러 다니기도 귀찮아 그대로 묵기로 했다.


7월 24일(화)

우리가 파나마에 온 주목적은 파나마 운하를 보기 위해서다.
갑문이 열리는 시간에 대기 위해 서둘러 Miraflores Locks로 갔다.
08시에 도착하니 9시부터 개방이라고 기다리란다.

09시가 조금 지나 갑문 전망대에 올랐다.
9시 30분부터 갑문이 개방된다.

파나마운하는 1529년 꼬르떼스의 건의로 에스파냐의 국왕 카를로스 5세에 의해 계획되었으나,
그 실행은 1879년에 수에즈운하를 개통시킨 프랑스의 “레셉스”가 주식회사를 만들어 1881년에 작업을 시작했다.
기초계획이 잘 못돼서 설계를 변경했고,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인부들이 죽어 나가 공사가 지연되다가 9년 만에 공사를 중단했다.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으나 공사는 진행하지 않고 미국 회사에 4,000만 달러에 공사권을 넘겨 줬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미국은 1914년 8월 15일에 완공시키고 최초로 81,237t급 퀸 엘리자베스 호를 통과시켰다.

파나마운하는 세 곳에 갑문이 설치되어 있다.
바다와 호수, 호수와 호수 사이의 표고 차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태평양 연안의 “발보아 항”에서 미라플로레스 호수로 들어가는 갑문이다.

엄청난 양의 컨테이너를 실은 중국 화물선 2척이 통과한다.
앞뒤에서 8 輛의 예인 차량이 인도한다.
이 운하는 여기로 들어와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데 8시간이 걸린다.

이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은 연평균 15,000척이나 된다고 한다.


비행기 착륙 직전에 찍은 파나마시 모습

아메리카 브릿지가 보이는 풍경

발보아 항의 석양

운하 개통기념 동판

공사할 때 사용한 차량


미라플로레스 호수로 가기 위해 갑문 쪽으로 들어 오는 화물선



선박 예인 차량
 

앞에 4대, 뒤에서 4대가 갑문으로 유도 예인한다.




열리는 갑문


닫히는 갑문

갑문 통과


전시관을 관람하고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번성했던 Old Town 까스꼬 비에호(산 펠리뻬지구)로 갔다.

프랑스 공원에서 출발해서 국립극장과 대통령 관저, 까데드랄 등을 돌아보았다.

프랑스 공원에는 운하를 처음 시작한 레셉스의 동상과 몇몇 기념물이 있고, 국립극장 앞에는 남미 독립투쟁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동상이 있다.



프랑스 광장
 스페인 식민지시대 중심가.



프랑스 광장


프랑스 광장에 세워진 파나마 운하를 시작한 “Lesseps의 동상



광장에 세워진 기념동상

기념탑 위의 조각

기념품 좌판

대통령 관저

시몬 볼리바르 동상

까데드랄

스페인 식민지시대 건축물들

스페인 식민지시대 건축물들


꼴로니얼 건축물 골목


구시가 해변에서 멀리 아메리카 브리지 너머로 보이는 신시가지


12시 30분,
고층빌딩이 즐비한 신시가지로 나와 그럴듯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파나마여행 기념으로 파나마모자를 사러 나섰다.

좋은 것을 산다며 백화점으로 명품 거리로 찾아다녔으나 없다.

몇 곳을 들러 물어물어 찾아간 잡화점 집단지역에 딱 한집에 있다.
아무리 보아도 물건이 기대에 못 미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파나마에는 파나마모자가 없었다.



파나마시의 신시가지




한여름 태양이 이글거리는 거리를 2시간여 돌아다니니 대단히 피곤하다.
14시 50분 호텔에 도착해서 한숨 자고 멕시코와 중미 7개국 여행의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내일은 미국으로 떠난다.

그 유명한 플로리다 마이애미 비치도 보고,
미국 최남단, 카리브 해로 돌출한 도시,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만년에 쿠바의 아바나에서 돌아와 살다가 자살한 곳,
“키웨스트”를 렌터카로 돌아볼 생각이다.

파나마는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에 있으며,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로 유명하다.
파나마는 운하에서 나오는 수익 덕분에 다른 중앙아메리카 국가에 비교하면 국민소득이 높다.
파나마는 16세기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가 됐으며,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콜롬비아와 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콜롬비아에서 이탈하고 자하는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미국의 간섭으로 1903년 11월 3일 독립했다.



면적 : 78,299km2.
인구 : 351만 명.(2012년)
종족 구성 : 메스띠조+물라토 60%. 흑인 13%. 백인 11%. 인디언 10%
종교 : 카돌릭 : 85%. 개신교 15%.
언어 : 스페인어.
화폐(발보아) : 1$ : 1B 고정
인당 GDP : 8,421$(2012년)
수도 : 파나마시티. 83만 명.


<파나마 운하>

파나마 운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총 길이 81.6km의 인공 수로다.
연간 1만 2천 부터 1만 5천 척의 배가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며, 이에 따른 수익은 한 해에 6억 7천만 달러에 이른다.

파나마 운하에 대한 권리는 1999년까지 미국이 가지고 있었으나, 2000년 이후는 파나마가 가지고 있다.

처음 파나마 운하를 계획한 것은 프랑스였다.
하지만 계획 부실, 폭동, 질병, 미국의 간섭 등으로 공사에 착수한 지 10년 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프랑스가 떠나자 미국이 프랑스 대신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콜롬비아로 부터 운하건설에 필요한 지역을 사들이려 했지만, 콜롬비아 의회가 이 안을 부결시키자 콜롬비아의 한 주로 남아있던 파나마의 독립운동을 부추겼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파나마 분리주의자들은 1903년 11월 3일 파나마를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시켰다.
그리고 그로부터 15일 뒤 미국은 파나마로부터 운하 건설권과 운하 주변에 대한 영구소유권을 얻어냈다.

1914년 8월 15일 운하가 개통된 이래 운하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파나마 사이 충돌이 벌어지곤 했다.
1964년 파나마의 학생, 군중이 미군과 충돌을 벌여 23명이 사망했으며, 두 나라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기도 했다.

1977년 파나마 운하에 대한 권리를 파나마로 넘기는 내용의 새로운 파나마 운하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에 의하여 미국이 가지고 있던 파나마 운하에 대한 권리는 1999년 12월 31일로 종결되었으며, 2000년 이후 파나마 운하에 대한 권리는 파나마가 가지게 되었다.
<서진근 편저 UN 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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