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rdan – Petra – Jerash

11월 17, 2018

요르단(2) – 페트라(나바테이안의 걸작 도시), 제라시



2005년 5월 27일(금)

와디럼 사막 한가운데 베드윈의 천막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빵과 요구르트로 아침 식사 후 07시50분에 마을로 나갔다.

08시에 페트라로 가는 버스가 있단다.
마을에서는 아침 8시에 아카바로 가는 버스가 출발했다.
페트라를 가는 버스는 8시20분에 왔다.
요금은 3디날. 엄청나게 비싸다.
암만에서 와디럼 까지도 3.5디날인데 그 1/3도 안 되는 거리를 이렇게 달라니 독점노선의 횡포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이들이 낙타 여행하라고 조른다.
이른 아침인데 여자들은 양 떼를 몰고 나간다.

와디럼을 출발한 버스가 페트라 거점도시인 와디무사에 10시20분 도착.
걸어서 5분 거리에 페트라 입구가 있다.

와디무사에서 암만으로 가는 버스를 알아보니 금요일에는 공공버스가 다니지를 않는단다.
그러면 Mann까지 다른 차로 나가서 거기에서 암만으로 가야 한다.

빨간 장밋빛 도시 Petra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BC 3세기경 아랍왕조인 나바테안 왕조의 수도였던 페트라는 절벽을 깎아 만든 신비의 도시이다.
깊은 협곡에 있어 구불구불한 바위틈을 통과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회색과 황색의 띠가 둘린 사암을 파서 만든 신전과 수도원, 원형극장, 주거 터, 묘지 등등 깊은 협곡까지 다양한 건축물 들이 들어차 있다.

그러나 1,000여 년 이상 잊혀 있던 이 도시가 1812년에 발견되고 1980년까지 여러 베두윈족 들이 살았으나 그 후 이주 조처가 내려졌다.
인디아나 존스와 마지막 십자군의 촬영장소로 유명해 졌다.

가장 유명한 유적은 Khazneh로 바위틈을 지나 들어가면 아름답게 조각된 정면이 보인다.


페트라 입구

협곡

입구
 협곡 틈새로 보이는 장미빛 건축물.
아침 해가 비칠때 가장 아름답다.



카즈네

카즈네 – 장밋빛 궁전(?)



카즈네 앞 광장
 낙타나 조랑말을 타고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걸었다.




조각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

수도원

원형극장

수도원

동굴

신전


열주 도로

로마양식의 건물

신전

관광객 수송용 말들

동굴묘지

와디(乾川)

와디 옆 언덕에 동굴 주거 터

3시간 남짓 페트라를 돌아보고 나왔다.
이 도시도 무역 통로에 있어 한때 번영을 구가했지만 영원한 번영은 없는지 이제는 폐허로 남아 있다.

14시 50분에 택시로 Mann으로 달려가서 Bus로 18시에 암만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오는데 여자들은 다른 남자와 나란히 앉히지 않고 별도의 좌석을 만들어 준다.

시내에 있는 로마 원형극장을 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AD 2세기에 세워진 이 극장은 6,000명이 관람할 수 있는 규모란다.



5월5월28일(토)

오늘은 암만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져 있는 잘 보존된 로마시대의 도시 Jerash를 들러서 시리아로 넘어갈 계획이다.

시리아는 우리나라와 미수교국이라서 도착 비자를 받는데 상당히 까다롭다는 얘기를 듣고 왔기 때문에 조금 일찍 국경에 도착하기로하고 08:00에 버스를 탔다.
08시 44분에 제라시 도착.
버스 터미널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유적이 있다.

Jerash는 폼페이 황제 시절 중동 전역에 걸쳐 10개의 상업 동맹이던 Decapolis에 속해 있던 곳이다.
3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기독교인과 이슬람인들의 계속적인 침입과 747년의 지진으로 쇠퇴해 갔다.
1920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으나 아직도 초기 단계(10% 남짓)다.



제라쉬. 타원형의 광장. 마차경주장(?)

개선문 – 지금은 남문

남문에 들어서서

남문

열주광장

열주 광장에서 열주 도로로



극장


열주도로

신전입구

아르테미스 신전

제우스 신전


북문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함께 팔레스타인이라는 지역에 속해 있어서 이스라엘 역사와 겹친다.



<略史>
BC1000년경 이스라엘의 다윗왕과 솔로몬왕 시절에는 동부 대부분이 이스라엘에 속했다.

그 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BC 300년 이후 아랍어를 쓰는 나바테아인들이 동남부에 왕국을 세웠고 BC 63년경 로마에 정복되었다.
7세기경에는 이슬람교도인 아랍이 점령했다.
11세기에는 십자군의 영향을 받았고,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관할에 들어갔다.

1920년 영국의 통치하에 들었으며 1927년 입헌국가로 독립했으나 1948년까지 영국의 위임 통치가 계속되었다.
1970년-71년간 팔레스타인 게릴라들과 전투가 격렬했으나 정부군이 승리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은 쫓겨났다.

JORDAN은 서남아시아에 있는 국가다.
요르단 강 동쪽에 있으며 남북으로 460km, 동서로 355km 뻗어 있다.
북쪽은 시리아, 북동쪽은 이라크, 남동쪽과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 서쪽은 이스라엘과 경계를 하고 있다.

아카바 만에 19km의 해안선을 끼고 있다.
웨스트뱅크로 알려진 요르단 강 서쪽 지역도 1949년부터 이스라엘군에 점령당한 1967년까지는 요르단 영토였다.







국가명 : JORDAN.
면적 : 92,300평방km.
인구 : 651만.(2012년)
종족구성 : 아랍인 98%.
수도 : Amman.
언어 : 아랍어.
종교 : 이슬람교(수니파) 90%, 가톨릭10%.
통화 : 요르단 디날.(1$ : 0.7디날)
1인당 국민소득 : us$4,542(2011년)
주요산업 : 광물, 관광, 농업.



<신(新) 세계 7대 불가사의>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그리스인들이 경이롭게 여겼던 7가지 건축물을 이르는 말이다.

BC2세기 경 비잔티움의 수학자 필론(Philon)에 의하면 고대 7대 불가사의는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 像, 로도스 섬의 크로이소스 巨像, 에페소스의 아르미테스 신전,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왕 陵墓,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燈臺인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기자의 피라미드 뿐이다.

1999년 스위스의 영화제작자 베른하르트 베버는 새천년을 기념하는 新 세계 7대 불가사의(New 7 Womders)를 설정하기 위해 재단을 세우고 유네스코의 도움을 받아 총 21개의 후보를 선정한 뒤 1억 명이 참여한 전 세계적인 투표를 실시했다.

2007년 1월 1일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발표됐는데 중국의 만리장성, 페루의 마추픽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거대 예수상, 멕시코의 치첸이트사,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인도의 타지마할,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가 선정됐다.

페트라(Petra)는 요르단 남서부에 있는 고대 유적으로 “바위”라는 뜻이다.
바위산을 깎아 그 안에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이며, 빨간색과 보라색 바위 협곡 사이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붉은 장밋빛 도시”라고도 불린다.

페트라는 BC300년 경 나바테안인들이 건설한 것이다.
이후 페트라는 향료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으나 6세기경 지진이 일어나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7세기 이슬람의 침입 이후 페트라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으며
1812년 스위스의 작가이자 탐험가 부르크하르트(Burckhardt)에 의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사해와 사해문서>

요르댠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死海(Dead Sea)는 이름 그대로 “죽은 호수”다.
사해는 전 세계에서 해수면 아래로 가장 낮은 호수로 해수면보다 400m가량 낮다.

이렇게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사해로 흘러들어오는 물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게 된다.
게다가 사해는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날씨는 무덥고 (최고 51도 C) 강우량은 적기(연평균 50 – 60mm) 때문에 물이 보충되는 속도보다 증발하는 속도가 빨라 날이 갈수록 염도가 높아지고 있다.

보통 바다의 염분이 3.4 – 3.7%인데 비해 사해의 염분은 28 – 32%에 이르기 때문에 사해에는 세균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생물도 살지 못하며, 간혹 물고기들이 홍수로 요르단 강에서 사해로 들어온다 해도 사해에 도착하는 즉시 죽어버리고 만다.

또한 사해는 염도가 높아 사람의 몸이 쉽게 떠오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해는 1947년 사해문서 발견으로 다시 한 번 유명해졌다.
사해 문서는 쿰란을 비롯한 사해 부근의 동굴에서 발견된 성서 사본들로, 베두윈 양치기 소년이 잃어버린 양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사해문서는 BC3세기부터 AD68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성서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해 문서의 발견은 근대 고고학 발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히는데, 이 문서들의 발견으로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가 재구 되었으며 성서가 쓰인 시기도 AD70년 이전으로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서진근 편저 UN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유향과 몰약>

아라비아 반도의 남서부 지역은 여름 계절풍이 불어와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이 풍부해서 땅이 기름졌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행복한 아라비아)라고 불렸다.

이 지역의 특산물로는 유향(乳香)과 몰약(沒藥)을 비롯한 방향(芳香) 물질들이 유명했다. 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 물품들은 어디에 쓰였을까?

유향은 유향나무(Boswellia sacra)에서 추출한 수액을 말린 제품이고, 몰약은 콤미포라 미르라(Commiphora myrrha) 나무에서 추출한 방향성 수지이다.

두 물품 모두 기원전 3500년경부터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 수출되어 사용된 사실이 알려져 있다.

중동과 지중해 지역으로 이동하는 낙타 대상(隊商)의 운송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도 이 물품들이었다.

심지어 로마 제국에서는 이런 향을 수입하는 금액이 너무나 커서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나머지 로마 제국이 향의 연기 속에 사라져갔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향 제품들은 고대 세계 최고의 사치품에 속했으며, 역사가들은 이 무역을 오늘날의 코카인 무역에 비교하기도 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 향이 중요했을까?
사람들이 잔뜩 몰려 살고 있지만 위생 시설은 형편없던 고대도시의 사정을 상상해 보면 그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하수나 분뇨 처리 시설이 없었던 당시 사회는 현대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악취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따로 지도를 볼 필요 없이 냄새를 통해 어떤 지역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관공서와 극장, 비릿한 냄새가 공기 중에 꽉 차 있는 도축장, 형언하기 힘든 악취의 공동묘지…. 이런 것들이 눈과 귀, 그리고 코에 잡히는 고대도시의 풍경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토록 향을 찾았던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더 나아가서 향은 일반적인 사치품을 넘어 종교적인 물품으로 격상되었다.

몰약은 영생(永生)의 준비를 위해 미라를 만드는 데에도 쓰였고, 유향은 종교 제의(祭儀)에 필수품이었다.

유향을 태우면 미묘한 연기가 천천히 원을 그리며 하늘로 올라간다.

고대인들의 상상 속에 이 연기는 하늘에 닿아 좋은 냄새와 아름다운 형상으로 신들에게까지 즐거움을 선사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가 먼 과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의 사고를 넘는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중에서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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