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duras
11월 23, 2018온두라스 – 떼구시갈빠(수도) 마야유적의 기록실 꼬빤
2007년 7월 11일(수)
온두라스의 수도 “떼구시갈빠”로 가기 위해 TICA(중앙아메리카 국제버스)를 타고 산살바도르를 떠났다.
us $15.
05시 36분에 출발,
08시 25분 국경에 도착해서 출국세 $3을 내고 국경에서 약식 검사를 마치고,
08시 40분 온두라스에 입국했다.
로컬버스로 갈아타고 수도 떼구시갈빠로간다.
온두라스는 “깊은 연못”이라는 항해 용어가 국명이 되었다.
콜럼버스의 마지막 항해(4차 항해) 때 발견되었다.
80%가 산지인 온두라스의 도로사정은 열악하다.
1,000m에서 1,500m를 오르내리는 도로를 달린다.
도로변에는 옥수수밭.
10시 41분에 고속도로 진입해서
11시 10분에 떼구시갈빠에 도착했다.
시내 중심가 “Mac Arthur”에 c-in.(트윈 $50)
시내 관광을 나서는데 프런트에서 소지품을 조심하란다.
거리는 어수선하고 가난이 눈에 보인다.
동해안에 펼쳐진 평야 지대에는 미국자본이 바나나를 주로 한 프랜테이션으로 부를 독점하여 경제는 미국자본에 종속되어 있단다.
7월 12일(목)
08시 30분,
호텔을 나와 시내 박물관 Art College, Merced 광장,
시장 등을 둘러보았다.
신구 도시를 경계 짓는 개천은 50년대 서울의 청계천을 연상시킨다.
중심가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는 농민들이 옥수수를 들고 시위를 한다.
옥수수의 국제가격이 폭등해서 수출가격은 높아졌는데 수매가격은 옛날 그대로란다.
10시에 버스로 도시 외곽에 있는 Placho 공원으로 올라갔다.
서울의 남산 같은 위치에 산정에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입구에 들어서 입장권을 사니 무장한 경비원이 한 명 따라붙어 경호도 해주고 안내도 해준다.
산 위에서는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잘 가꾸어진 정원도 있다.
중국인들이 만든 공자를 모신 공원도 있다.
예수상도 있다.
한무리의 학생들을 만났다.
어린이들은 어디에서 만나도 천진스럽고 유쾌하다.
호텔로 돌아와 바실리카 성당으로 갔으나 시간이 늦어 내부 참관은 못했다.
구도심의 성당이나 광장은 어느 나라보다도 초라하다.
신도시 지역은 밝고 여유로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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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시스코 모라잔 동상 | 
연방해체로 고립되었으나 다시 고국 온두라스로 돌아와 연방 재건을 위해 코스타리카의 독재자 브라울리오 까리요를 물리치고 전쟁에 승리했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한 비운의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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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드타운 중앙에 있는 까데드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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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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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사당 앞 광장의 데모군중 | 
수출가는 올랐으나 수매가가 오르지 않아 항의하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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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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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민 그림 | 
도자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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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cacho공원의 예수상 | 
공원에서 내려다 본 떼구시갈빠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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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원에서 만난 학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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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풍 정원의 공자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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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식 정원 | 
떼구시갈빠 북동쪽 과떼말라와 국경 가까운 곳에 중미 제2의 마야유적 “꼬빤”이 있다.
이곳은 과떼말라의 안띠구아에서(7월 6일) 투어버스로 다녀왔다.
새벽 4시에 12인승 버스로 출발해서,
09시에 과떼말라 국경에 도착,
출국세 $40을 내고 09시15분 온두라스에 입국,
09시 25분에 꼬빤 마을 도착(비포장도로),
09시 45분에 유적지에 입장했다.(입장료 $15)
과떼말라 띠갈은 웅대한 피라미드가 남성적인 맛을 풍긴다면 꼬빤은 차분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유적들은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고 많은 스텔라(비석)와 건축물에는 상형문자를 새겨놓아 역사적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루이나스(유적) 입구에서 예쁜 새들이 마중한다.
유네스코문화유산 표지판을 보고 안으로 들어서면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깊은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아끄로 폴리스”로 향한다.
가는 도중 좌측으로 축구장 서너 개 넓이의 Central Plaza을 지나면 아끄로폴리스에 이른다.
사방 150m의 광장 주변에는 석조건물들이 둘러서 있다.
그중에서도 동쪽에 있는 피라미드 지하에는 묘지가 있다.
지하 묘지를 보려면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그 묘지 입구에는 “알따Q”라고(꼬빤의 유적에는 A,B,C… 로 번호를 붙였다) 번호가 붙은 4각 제단이 있는데 제단 4면에는 한 면에 4명씩 16명의 역대 왕들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이 사각 제단에는 서기 763년이라는 연호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국제과학 아카데미”를 개최한 날짜를 기록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피라미드 뒤쪽(동북쪽)으로는 재규어 계단이 있는 광장이 있고 여기에서는 운동경기가 있었을 것이란다.
그 북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처음 들어올 때 좌측으로 보이던 “쁠라싸 쁠린시빨”이라고 부르는 중앙광장이 있다.
이 광장에는 중앙에 피라미드가 있고 축대 동남쪽에 아끄로폴리스 쪽으로 올라가는 63계단이 있는데 계단의 돌 하나하나 마다 신성문자가 새겨져 있어 “신성문자의 계단”이라고 부른다.
신성문자가 새겨진 돌의 숫자는 2,500여 개나 된다고 한다.
광장의 북쪽에는 8개의 스뗄라(돌기둥)가 있는데 역사의 기록을 위해 만들어졌단다.
스뗄라 앞에는 4각 또는 둥근 모양의 제단이 있다.
이 광장 남쪽에는 마야의 신성도시 들에는 모두 있는 구기 장이 있다.
스뗄라 광장 동남쪽으로 한참을 가면 숲 속에 “세뿔수라”라고 하는 귀족들의 집단 주거지도 나온다.
꼬빤은 마야문명의 중심에 있었다.
763년, 마야권 각지의 천문학자들이 꼬빤에 모여 지난 52년간 생긴 관측결과 오차를 수정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한 일이 있는데 꼬빤에서는 이런 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단다.
이 회의에는 멀리 멕시코의 중앙고원에서도 참가했단다.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그레고리력의 1년 날수는 365.2425일인데, 6-7세기경 마야에서는 1년 날수를 365.2420으로 산출하였다고 한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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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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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빤 – 유네스코문화유산 표지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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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를 향해서 가는 숲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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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크로폴리스 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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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끄로폴리스의 피라미드 | 
별도의 입장료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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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명 왕들의 부조 | 
한 면에 4명 씩 네 면에 16명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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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있는 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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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끄로폴리스 신전 건축물에 있는 조각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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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끄로폴리스 꼭데기에 있는 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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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규어 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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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축 밑의 조각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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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들의 주거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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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기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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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bia 나무와 중앙광장의 피라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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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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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문자 계단 | 
2,500여 개나 된단다.
중앙광장에서 아크로폴리스 광장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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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문자 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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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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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라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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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야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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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목 | 
스텔라
중앙광장에는 제단 주변에 8기의 스텔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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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빤을 나서며 | 
온두라스 지역의이디오들은 스페인의 침략에 끈질기게 대항한 것으로 유명한데, 결국 1537년 대패하여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온두라스는 1838년 11월 15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면적 : 112.090km2.
인구 : 830만 명.(2012년)
종족구성 : 메스띠조 90%, 인디언 7%, 흑인 2%.
종교 : 카톨릭 98%.
언어 : 스페인어.
화폐 : 렘피라(1$ : 18.92L)(2010년)
1인당 GDP : $2,105(2011년)
수도 : 떼구시갈빠.
< 축구전쟁>
축구전쟁은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축구경기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까닭에 축구전쟁이라고 하며, 닷새 동안 벌어진 전쟁이기 때문에 100시간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1950년대 이후 온두라스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엘살바도르의 주민이 온두라스로 불법 이민을 오기 시작해 1960년대 말에는 온두라스 내 엘살바도르 인이 30여만 명에 달하게 됐다.
1969년 온두라스 정부가 토지개혁을 하면서 불법 이민 온 엘살바도르인들의 토지를 모두 압수하고 국외로 추방하자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국민 사이에는 악감정이 생겼다.
그러던 중 1970년에 열릴 제9회 멕시코 월드컵을 위한 지역 예선에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맞붙게 되자 두 나라 국민의 관심은 모두 축구경기에 쏠리게 되었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열린 지역 예선 2차전에서 엘 살바도르가 3대0으로 이기자 온두라스 응원단은 심판에게 편파 판정이라고 항의했다.
이에 엘 살바도르 응원단이 온두라스 응원단을 폭행해 온두라스인 2명이 사망했고, 이 소식을 들은 온두라스인들은 자국 내 엘 살바도르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두 나라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엘살바도르는 1969년 7월 14일 선전포고와 함께 온두라스를 침입했다.
전면전이 벌어져 5일간의 전쟁에서 2,000여 명이 사망했고 15,000여 명이 부상했다.
미주기구(OAS)가 급히 중재에 나서 7월 18일 정전이 합의됐으나 평화조약이 체결되기까지 10년 이상이 걸렸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까지는 17년이 더 걸렸다.
(출처 : 서진근 편저, UN 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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