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 Chi Minh
11월 26, 2018호치민과 메콩델타
2006년 2월 28일(화)
게스트하우스에서 운영하는 국제버스를 타고 호찌민으로 간다.
07시 30분 버스가 출발했다.
서울대학에서 공무수행차량으로 쓰던 현대가 만든 버스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서 시속 40km 정도로 간다.
9시 10분, 차가 고장이 났다.
3시간 만에 고쳐서 2시 30분에 국경에 도착했다.
우리가 타고 가는 국제버스 |
떡장수 아주머니 |
소도시 “네른”의 페리 나루터 상인들 |
음료를 파는 쾌활한 아가씨 |
캄보디아 국경을 나가며 |
베트남 국경으로. |
Moc Bai 출발.
광활한 평야 지대는 벼농사가 한창이다.
18시 호찌민 시내 중심가 TN K 여행사 도착.
메콩 델타(삼각주) 크루즈 예약(1인 $7)하고 내일 다낭행 기차표 예약하고 19시에 Quyen Thanh Hotel Check In.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에 있는 이 나라는 남북으로 길고(1,650km), 동서로 좁은(최대 550km) 지형을 가지고 있다.
북부의 흥 강(하노이 부근)과 남부의 메콩 강(호찌민 부근) 삼각주는 세계적인 벼농사 지역이다.
베트남에는 정글과 울창한 삼림이 많은데 베트남 전쟁(1960 – 1975년) 때 미군의 폭격과 고엽제 살포로 큰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베트남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미국과 연달아 치른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외세로부터 조국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호찌민은 사이공으로 불리던 도시로 베트남 제1의 도시다.
3월 1일(수)
07시 50분 TNK 여행사로.
몇 군데 다니며 손님을 태우고 08시 30분 미토 시를 향하여 출발.
10시 40분, 미토 시 도착.
110시 50분 유람선 승선.
메콩 강 지류 수상마을과 과일시장 들러서 11시 45분 딴롱섬에 상륙해서 점심.
작은 보트로(6인승) 야자수 밀림지역 통과해서 코코넛 농장 도착해서 구경하고 돌아오다.
17시 40분 호텔에 돌아와 쉬었다.
메콩 강은 중국 쓰촨 성에서 발원해서 미얀마, 태국, 라오스를 거쳐 캄보디아를 통과해서 베트남으로 흘러들면서 하구에 엄청난 삼각주를 형성하고 바다로 흘러간다.
메콩 델타 지역은 너무 넓어서 관광코스도 여러 개 있다.
강물이 실어다 준 옥토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하는 관광이다.
우리는 미토시에서 출발하는 가장 가까운 코스를 택했다.
미토 시 메콩 강 지류변의 빈민촌 |
미토 시 메콩 강 지류변의 빈민촌 |
빈민촌 끝머리에 과일 시장
메콩델타로 나가는 강변 풍경 |
점심을 먹으러 딴롱 섬에 상륙 |
점심으로 나온 볶은 국수 |
먹을만했다.
식당 앞에 있는 묘지 |
통발을 설치하고 있다. |
정글 속으로. |
주로 건축자재로 활용한단다.
야자잎으로 자리 만들기 |
코코넛 캔디 공장 |
방문객을 위한 전통 노래 공연 |
가녀린 목소리지만 우리나라의 창을 듣는 느낌의 노래다.
실패 |
관광객이 거대한 뱀을 목에 감아보고 있다.
정글 |
정글 속으로 보트를 타고. |
정글 속으로 |
보트 사공 |
휴게소 |
조각배 |
메콩 델타 미토 지역 종착지점 |
*.베트남 이미그레이션에서.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비자면제국이다.
원칙적으로는 항공편으로 도착하는 경우에만 비자가 면제된단다.
약간 걱정을 하면서 걸어갔다.
베트남 이미그레이션.
육로라서인지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
두 군데에서 여권을 심사한다.
우리 넷은 한군데에 줄을 섰다.
김 교수, 한 회장, 내가 통과하고 김중석 이사가 마지막인데 입국 불가능하단다.
여권의 사진이 있는 부분이 떨어졌다.
조금 전에 캄보디아를 나올 때는 그런대로 붙어 있었는데 지금 펼치다가 떨어진 것이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 된다.
우리나라 스타일로 백방으로 노력해도 않된다.
하는 수 없이 캄보디아로 돌아가서 프놈펜에 대사관이 있으니
재발급을 받던 조처를 하기로 하고 김 이사 혼자서 되돌아갔다.
보내놓고 생각하니 또 걱정된다.
여권 표지가 떨어졌으니 캄보디아에서 입국을 시켜줄는지 걱정된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한 시간 전에 통과한 사람이므로 바로 서류를 확인하고는 출국 취소로 처리해 주더란다. 재입국을 하려면 비자를 새로 받아야 하니까.
프놈펜으로 돌아가서 하루 자고 다음날 대사관엘 찾아가니 휴무.
3.1절이라서 업무를 보지 않는 것이다.
다음날 가니 떨어진 부분에 도장을 찍어서 테이핑해주고
별도의 레터를 써 주어서 베트남에 입국했고
헤어진 지 5일 만에 훼에서 보트투어 중에 티엔무 사원에서 재회했다.
원래는 일찍 해결하고 따라오면 호찌민에 있는 어떤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고
거기에서 못 만나면 훼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호찌민에서는 만날 수가 없었고 훼에 가서 약속한 호텔로 가니 건물을 헐고 신축 중이었다.
난감해서 여러 경로로 연락망을 펼쳐놓고 기다리면서 1일 투어를 시작했는데 첫 방문지인 티엔무 사원에서 만났다.
베트남의 50대 후반에 있는 나이 든 사람 중에는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우리에 대해 아직도 대단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나간 날들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남겨서 베트남 사람들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것도 증요할 것 같았다.
3월 2일(목)
호찌민 시내를 대강 돌아보려니 범위가 뜻밖에 좁다.
아침 일찍 서두르니 오전이면 끝나겠다.
호텔 앞에서 기다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어제 병원에 갈 때 탔던 오토바이다.
영어도 곧잘 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역에서도 이 사람이 통역을 해서 무난히 알을 마쳤다.
19시에 예약한 기차표를 15시로 바꿨다.
멋쟁이 |
긴 소매가 달린 셔츠에 장갑을 끼고.
이 더운 나라에서 웬일인가?
햇볕에 타지 않도록 하는 횃숀이란다.
사이공 인민위원회 건물 |
사이공 인민위원회 건물 |
호찌민 아저씨 |
아이를 안고 있는 동상의 이름이 호찌민 아저씨다.
리틀 노트르담 성당 |
성당내부
전쟁박물관 |
실내에는 사진과 화학무기 샘플.
별도의 건물에는 고문 기구와. 길로틴(단두대)까지 설치되어 있다.
전쟁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아름다울 수가 없다.
전쟁박물관 |
길로틴(단두대) |
대통령 궁 |
이 전차가 왕궁의 문을 부수며 들이닥칠 때 옥상에서는 마지막 헬기가 출발했다.
해방군의 전차.
“Pho 2000”. 아주 유명한 쌀국구수 식당이다.
다른 메뉴도 많이 있다.
벤탄시장과 같은 로터리 모퉁이에 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사이공의 밤은 다음으로 미루고………..
14시 35분 기차역 도착해서 다낭행 열차에 올랐다.
<호찌민>
호찌민(Ho Chi Minh, 胡志明)은 베트남 민족 지도자로, 프랑스에 대항해 베트남 독립을 이끌었다.
호찌민은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중부에서 가난한 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에 머물면서 응우엔 아이 꾸욱(阮愛國)아런 이름으로 베트남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호찌민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짓는 베르사유 평화회의에서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해 유명해졌다.
1924년 호찌민은 광저우(廣州)에서 베트남 혁명청년협회를 구성해 베트남 독립운동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는 호찌민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호찌민은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프랑스 세력이 위축되자 호찌민은 1941년 베트남으로 잠입해 베트민(Viet Minh, 베트남 독립 동맹)을 결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호찌민에게 커다란 기회를 제공했다.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면서 그동안 베트남을 지배해 오던 프랑스가 밀려났고, 새로이 베트남을 장악한 일본도 2차 대전 패망과 함께 물러났다.
호찌민은 민첩하게 베트민 게릴라들을 지도하여 1945년 8월 19일 하노이에 입성하고, 9월 2일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고, 결국 1946년 11월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전쟁 후 베트남은 17도 선을 기준으로 분단되어 북부에는 호찌민의 지도를 받는 베트민 정부가, 남부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고 딘 디엠 정부가 들어섰다.
두 정부 사이의 갈등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대를 두려워한 미국의 참전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이 발생했고, 전쟁은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호찌민은 전쟁 중인 1969년 9월 2일 심장병으로 급사했다.
(서진근 편저 UN192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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