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many – Frankfurt
11월 16, 2018독일 – 프랑크푸르트
인구 65만 정도의 도시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인구 350만) 만큼이나 잘 알려진 도시일 것이다.
독일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지인 이 도시는 기원전 로마 시대에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라인 강과 마인 강이 만나는 삼각주 근처, 마인 강 변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있는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와 구분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마인 이라고 부른다.
또한, 독일의 정치가이며 문학가요 과학자인 괴테를 빼놓고는 이 도시의 분위기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2008년 7월 22일(화)
07시 30분, 민박집에서 육개장에 김치, 오이소박이로 아침을 먹고
08시 30분 트램을 타고 시내로 들어와 중앙역 Haupt Bahnhof 짐 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시내 관광을 시작했다.
09시 10분. 중앙역을 나와 정면에 뻗어 있는 Keiser Strase를 따라 내려가면서 보이는 우뚝우뚝 솟아 있는 멋진 빌딩들이 거의 은행들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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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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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역 정면 카이져 거리 |
괴테광장 부근의 옛 거리와 그 부근에 볼거리가 집중돼 있다.
중앙역에서부터 모두 걸어서 다닐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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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건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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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원으로 내려가는 길가의 조형물 |
이런 멋진 빌딩들이 여럿 있는데 대부분이 금융기관이란다.
3-4 블록 내려가면 공원이 나오고 왼편에 괴테와 쉴러 기념상이 있었는데 괴테의 기념상은 보이지 않는다.
공원에 있는 “실러” 기념상.
1759년에 태어난 독일의 국민시인이며 극작가.
괴테와 더불어 고전주의 문학의 2대 거성으로 불린다.
생애 마지막 쓴 희곡이 “빌헤름 텔”이다.
10년 아래인 쉴러는 1794년 잡지 호렌(Die Horen)을 창간하며 괴테와 교분을 맺으면서 괴테와 각별한 관계가 된다.
괴테는 실러의 연극활동에도 관여하는 등 창작활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이 시기에 괴테는 23세에 쓰기 시작했던 “파우스트”를 계속 쓰기 시작해서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29년에 완성했다.
공원을 둘러보고 올드타운 쪽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Keiser 광장을 지나 큰길로 직진하면 Goetheplatz가 나오고 Keiser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Ro”merburg가 나온다.
우리는 괴테광장에서부터 관광을 시작했다.
괴테기념상은 괴테광장 옆으로 옮겨 있었다.
Goethe 기념상.
Goetherplatz 옆 골목에 있다.
1749년에 태어난 괴테는 시인, 극작가, 변호사, 정치가, 과학자, 독일 고전주의 대표자로 뛰어난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관에서 인류역사상 탁월한 업적을 남긴 10대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비가 계속 내린다.
수병(위병?)의 광장으로 갔다.
수병의 집을 지나 괴테가 세례를 받았다는 St.까뜨리나 교회,
교회에서 카이저 광장 쪽으로 조금 가면 좁은 골목 안에 괴테의 집이 나온다.
하우프트바헤(18세기 바로크식 위병본부) 까페.
괴테광장 한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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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 까뜨리나 교회 |
괴테광장에 붙어 있는 교회.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관광객이 괴테의 집 앞에 몰려 있다.
중국인들이 떠들썩하게 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 나온다.
비는 계속 내린다.
또 한팀이 사진을 찍느라고 부산을 떤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집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돌아간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사라져서 우리가 들어가는데 한 무더기의 학생들이 인솔자를 따라 괴테의 집으로 들어온다.
인솔자의 설명을 들으며 진열된 유물들을 진지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며 열심히 메모한다.
일본의 젊은이들이다.
Johann Wolfgang Von Goethe!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자연연구가이고, 바이마르 公國의 재상으로도 활약했던 괴테는 1749년 이 집에서 태어났다.
궁정고문관인 아버지와 시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률공부를 했다.
변호사 시절 실연을 겪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내 고등학교 시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느라고 엄청나게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는데 누군가가 파우스를 읽었느냐고 묻는 바람에 그 이해하기 힘든 책과 한동안 씨름했던 기억이 새롭다.
파우스트는 23세에 쓰기 시작해서 그가 죽기 직전인 83세에 완성한 역작이란다.
그는 법률가, 정치가, 문학가, 광학연구로 “색채론”을 발표한 과학자이며 지질학, 광물학을 비롯해 자연과학에도 몰두해 동물에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으로 되어 있던 “간악골(間顎骨)”을 발견하여 비교해부학의 선구자가 된 대단한 인물이다.
세계적인 국제기관에서 최근 발표한 인류 역사상 10대 천재(?)에 포함된 인물이다.
비록 2차대전 후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된 집이라고는 하지만 옛날 부유한 집안의 중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집이다.
괴테는 이 집 서재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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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의 집과 괴테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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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의 집 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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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택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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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필 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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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 초상 |
가구며 도자기, 집기, 그림 등등 당시 이 집의 주인의 품격을 살펴 볼 수 있는 수집품들이 잘 보존 되고 있다.
수집품들
Goethehaus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인 강 쪽으로 내려가면 Ro”merberg가 나온다.
뢰머광장은 구시가지 중심에 15-6세기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광장이다.
“Ro”mer”는 “로마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이 광장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시청사 맞은 편에 오스트 차일레 건물들, 시청사 왼편으로 박물관과 니콜라이교회가 있다.
그 가운데가 Ro”mer 광장이고 그 한가운데 “유스티아 동상”이 있다.
한 손에 칼을, 다른 손에 저울을 치켜들고 시청사를 향해 서 있는 이 동상은 공무원들에게 일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일하고 저울처럼 공평하게 하라는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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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市 公會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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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mer – Town Hall 紹介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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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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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건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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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스티티아 동상 |
저울을 든 손 위에 앉은 비둘기는 날아가던 비둘기가 잠시 앉은 것이다.
한 손에 칼, 또 다른 손에는 저울을 들고 시 청사를 바라보고 있다.
“공무원들이여! 公務는 칼처럼 예리하게, 그리고 저울처럼 공평하게 처리하시게!” 하는 듯이……
유스티티아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법 집행에서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란다..
오스트 차일레 건물 뒤편에 “칼 대제”가 968년에 종교회의를 개최한 Keiser Dom(황제의 대성당)이 있다.
이 성당에서는 12-13세기, 로마 왕들을 선출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대관식을 거행한 유서깊은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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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iser Dom.(황제의 교회) |
12-13세기, 로마 왕들을 선출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대관식을 올린 유서 깊은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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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단 |
聖畵調刻
보물관도 입장료(3유로)를 내고 볼만하다.
본관과 별관이 있다.
보물관에는 역대 성직자들의 예복과 미사를 드릴 때 사용하던
香爐, 술잔 등등 수많은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중세 교회가 權威를 드러내기 위해 얼마나 奢侈했는지 짐작케 하는
너무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물품들로 가득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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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관(성당 박물관) |
둘러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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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司祭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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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제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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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 드릴 때 사용하던 각종 祭器 |
중앙역으로 돌아오다가 케밥 집에서 양 갈비로 출출함을 달래고…..
맛있다.
하이델베르그로 떠났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16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폭넓은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유럽사회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한 축이 되었다.
중세 유럽은 각 지방의 봉건영주들이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는 형태였고, 큰 권위를 갖지 못한 왕 대신 교회와 교황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정치, 사회에 깊이 관여하며 막대한 권력과 부를 갖게 된 교회는 차츰 부패하게 되었으며, 성직자의 타락과 성직매매, 면죄부 판매 등은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다.
당시 독일은 작은 도시국가들로 나누어져 있었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빈곤한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교황 레오10세는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다는 명분으로 면죄부를 판매하며 독일 국민에게 헌금을 강요했다.
바텐베르크대학교의 주임사제이자 교수였던 루터(Martin Luther)는 1517년 10월 31일 바텐부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로 된 반박문을 붙였다.
루터는 이 반박문에서 교황이 독일 민중의 빈곤을 안다면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 성 베드로 성당을 지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하며, 교황은 연옥(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죄를 씻어 내는 곳)에 관한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며 면죄부 판매를 공격했다.
루터는 성서만이 권위가 있고, 오로지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Worms)에서 열린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소환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하여 결국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당했다.
그 뒤 루터는 바르트부르그에서 1년 동안 은신하며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16세기 동안 유럽전역, 특히 북유럽으로 확산됐으며 그 뒤로 츠빙글리(Zwingli), 칼빈(Calvin) 등이 나타나 종교운동을 일으켰다.
종교개혁으로 그리스도교의 주요 분파 중 하나인 개신교가 탄생했다.
(서진근 편저 UN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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