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ba

11월 24, 2018

카리브海 의 珍珠 쿠바를 찾아서



2002년 4월 23일부터 5월 12일까지 18박 20일간 북미의 멕시코와 중미 2개국을 다녀왔다.
북미나 남미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지만 중미는 조금 익숙하지 안은 지역이다.
중미는 멕시코 남쪽 여러 나라로 과테말라, 벨리세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파나마 등이다.

그 옆 대서양의 카리브 해에는  쿠바를 위시하여 바하마 群島, 자메이카 등 여러 섬나라들이 모여 있다.
그중에서 멕시코의 6개 도시(깐꾼,치첸이싸,뚤룸,멕시코씨티,오하까,딲스꼬)와 쿠바의 수도 아바나, 과테말라의 4개 도시(플로레스의 띠갈, 과테말라씨티, 안띠과, 빠나하첼의 아띠뜰란)를 둘러보고 왔다.

여행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보는 내용과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여행기라기보다는 사진 설명을 조금 상세히 곁들이는 것에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다녀 온 느낌을 조금 소개할 생각이다.



2002년 4월 26일(금)
카리브 해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멕시코의 남단 유까딴 반도의 휴양지 깐꾼으로 날아갔다.
깐꾼은 멕시코 씨티 서쪽 해안 휴양지 아까뿔꼬를 제치고 동남쪽 끝에 카리브 해로 뻗어 나간 유까딴 반도에 멕시코 제1의 휴양지로 꾸며진 자그마한 도시이다.
이곳에는 리조트에서 간단히 다녀올 수 있는 마야유적도 많지만 쿠바나 과테말라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해서 깐꾼으로 먼저 왔다.

멕시코의 동남부 유까딴 반도 끄트머리의 휴양지 깐꾼에서 아바나로 떠난다.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도 대단히 폐쇄적인 나라라고 듣고 있던 나라를 간다니 왠지 마음이 설렌다.

깐꾼 공항에서 쿠바 입국 비자를 받아야 한다.
비자 피는 $15.
공항에 직원이 나와서 처리하는데 여권에다 도장을 찍어주지 않고 티켓을 발급한다.
여권에 쿠바 입국 근거가 남으면 어떤 나라에 입국할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아바나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 때 호텔 바우쳐가 없다고 예약을 하고 오란다.

엄 회장님 팀은 바닷가 호텔 “도비”에 1인당 $22에 예약했다.
강철호 회원과 임병우 회원 그리고 나는 별 다섯 개 짜리 최고급 내셔널 호텔을 예약했다.
우리나라의 반도호텔 수준이다.

USD $170이라는 2인실을 USD $100에 깎았다.
호텔 값이 싼 나라에서는 최고급 호텔에 투숙해 보는 즐거움도 있다.
호텔 지하에서 공연하는 USD $ 35 짜리 파리지앵 쇼 입장권 포함이다.


공항택시
 아바나 공항에 내리는 순간 놀란 것은 공항 택시가 모두 현대차라는 것.
기사들이 무척 친절하다.

모두가 잘생긴 미남들이다.

멕시코나 과테말라 등의 나라들은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이므로 키가 작고 비만형인데 쿠바의 혼혈은 아프리카 흑인과 백인의 혼혈이 대부분이므로 남녀가 모두 잘 빠진 체형이다.

선천적으로 낭만적이며 약간은 여유로움이 지나쳐 느린 것 같다.



호텔로…
 분리대의 가로수가 멋지다.
이 나라의 國樹다.
공항에서 우리나라 자동차를 타고 호텔로 간다는 것이 왠지 어깨가 올라가는 기분이다..
가로수는 이 나라 상징나무다.
시내로 들어가면서 혁명광장 왼쪽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 벽에 체 게바라의 모습을 구조물로 만들어 붙여 놓은 것이 보인다.

말레꼰 바닷가 호텔은 중후하고 고급스럽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이 매우 좋다.




분리대의 가로수가 멋지다.
이 나라의 國樹다.
공항에서 우리나라 자동차를 타고 호텔로 간다는 것이 왠지 어깨가 올라가는 기분이다..
가로수는 이 나라 상징나무다.
시내로 들어가면서 혁명광장 왼쪽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 벽에 체 게바라의 모습을 구조물로 만들어 붙여 놓은 것이 보인다.

말레꼰 바닷가 호텔은 중후하고 고급스럽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이 매우 좋다.




바닷가 낙조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흔히 얘기하는 오메가를 닮았다.
쿠바는 미국의 푸로리다 남쪽 끝 키웨스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면적이 남한 땅만 한 110,860평방킬로미터, 인구는 11,200,000명(2000년), 인종은 물라토(아프리카흑인+백인) 51%, 백인 37%, 흑인 11%, 중국인 1%로 구성되어 있고, 종교는 가톨릭이 85%이다.
1인당 GNP는 USD $1,980.




구 아바나지역. 식민지 시절의 건물들
 구 아바나 지역은 말레꼰 해변을 끼고 펼쳐져 있다.
이 지역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스페인 통치 전성기에 지어진 중후한 건물들이 옛 영화를 말해 주고는 있지만, 지금은 해풍에 허물어져 간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지원금으로 주는 자금으로 조금씩 수리하고 있다.




아바나만 입구에 설치된 16세기에 구축한 해안 포대 진지
 아바나 항 입구에는 양안에 포대 진지가 구축되어 있다.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의 무역 통로에서 번성하던 아바나를 세계를 주름잡던 영국과 프랑스의 해적들이 자주 침입해 와 이들을 막기 위해 스페인이 구축한 진지란다.

프랑스의 쟈크 드 쏘르가 1555년 아바나 침공 후 해적들은 100여 년간 카리브 해를 약탈하고 다녔단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프란시스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섬멸한 공로를 포함해서 영국왕실로부터 작위까지 받았다.

요새 위로 올라서면 망망대해 오른쪽으로 아바나 항구가 보인다.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다투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쿠바는 스페인이 경영하였다.
이때 아바나 항구는 신 구대륙을 오가는 배들의 중간 기착지로 흥청거렸고 지금도 옛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쿠바는 무역의 중계지로 번성하다가 사탕수수와 담배 재배로 크게 일어선다.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아프리카 흑인이 대량으로 유입(노예 수입)되었고 18세기부터는 중국인 노동자가 대거 들어오면서 이탈리아 남부와 북유럽인들까지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만든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사람은 쿠바인들을 “라틴 아프로 아메리카인”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부르던 노래 ” 라 빨로마”는 아바나 항구를 떠나는 선원들이 정들었던 치니따(중국계 賣笑婦)와의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한 것이다.



호텔 정원에서 해안을 향해 설치된 대포
 저녁을 먹고 호텔에서 빠리지앵 쇼를 보았다.
화려하고 열정적인 살사춤의 춤사위가 매혹적이다.



파리지앵 쇼



초저녁 쇼를 보고 나서 어느 여행안내 책자에 “아바나에 가거든 여기를 들러라” 라고 소개한 재즈 클럽을 찾아갔다.
마침 우리가 투숙하는 호텔에서 멀지 않아서 걸어서 갔다.
낡은 건물 7층엔가 있다기에 올라가 보니 어두컴컴한 조명으로 음산한 느낌조차 드는 분위기의 자그마한 바 한 모퉁이에 피아노 한 대가 덩그러니 있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일행 셋뿐.

맥주 한잔 씩을 시켜놓고 있으려니, 나이가 든 흑인이 피아노를 치면서 쉰 목소리로 블루스 한 곡을 부르고는 일어서 나간다.

많은 여행객은 추억의 장소를 찾아간다.
옛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도 옛 기억을 더듬으면서 감상에 빠져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고 즐긴다.

이곳을 소개한 미국인은 옛날 아바나가 한창 흥청거릴 때의 향수가 남아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로 소개한 것 같다.
그러나 옛날 아바나에 대한 추억이 없는 우리에게는 뛰어난 연주가 없는 쓸쓸한 분위기의 이곳이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다.

호텔 앞 해변 광장에는 늦은 밤인데도 유명 연주가와 가수들의 무료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수만 명의 군중이 운집해 살사리듬에 맞춰 열광하고 있다.




해변 광장의 아바나 최고의 연주자들의 시민 위안공연
 낮부터 광장 주변을 통제하더니 이 행사를 위해 준비한 모양이다.



4월 27일 (토)
오늘은 헤밍웨이의 발자취를 돌아보기로 하고 씨티 투어를 계약했다.
9시에 관광회사에서 왔다.
계약서를 보더니 헤밍웨이 집 입장료를 1인당 $5씩 더 내란다.
우리는 점심을 포함해서 $28씩에 계약을 했었다.
호텔 측에서 잘 못한 것 같다.

호텔 측과 해결하라고 하고 우리는 출발했다.




골목 안 군중집회. 미국을 성토하는 것이란다.

다른 팀과 합류하러 가는 골목에서 여성이 리드하는 군중집회가 있었다.
상당히 선동적이다.
경찰관들이 멀리서 지켜 보고 있다.
미국을 비난하는 집회란다.

골목을 빠쪄 나가는데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빵 공장이다.
황 선생이 내려가서 US $1어치를 사왔는데 24개나 된다.



빵공장

1달러어치 식빵
 우리 일행 8명이 한 끼는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사회주의 국가라서 기초 생활 물품은 싸게 공급해 주고 있다.
어려워 보이는 노인들도 시가를 피우고 있다.
일정 연령이 되면 국가에서 시거를 배급해 준단다.



거리풍경 – 낙타 버스
 일명 낙타 버스라고하는 버스 두 대를 연결하여 제작한 대형 버스가 대중교통으로 아주 싸다.




헤밍웨이가 살던 저택
 헤밍웨이는 아바나를 끔찍이 사랑한 사람이다.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했을 때에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헤밍웨이가 살던 집은 아바나 항구 북쪽으로 공장지대를 지나서 조금 더 외곽에 아바나 항구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다.
집에서 남서쪽으로 바라보면 아바나 항구가 멀리 보인다.




헤밍웨이가 단골로 들르던 카페 La Tellaza

낚시를 끝내고 돌아 나오는 모퉁이 단골 맥줏집도 관광 코스다.
지금은 식당을 겸하고 있는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USD $2씩 받고 방문 확인서를 발행해 준다.
그것도 오래된 타자기로 쳐서 주는 것이 애교스럽기 까지하다.



바닷가에서
 저택 입장료 $5, 비디오 촬영료 $25, 사진 촬영료 $5 이다.
외부 촬영은 제한이 없고 내부 촬영료다.
유물 실에는 등산화, 정글화, 사냥복 등등이 있고 별채 2층 유물 실에는 아프리카에서 사냥해서 잡은 동물들의 박제가 전시되어 있고, 3층에는 사진 전시실, 4층에는 아바나 항구와 별들을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기자로, 소설가로 명성을 떨치면서 사냥과 낚시뿐만 아니라, 술과 담배, 여자까지 즐길 줄 알았던 멋쟁이었다.
쿠바를 대단히 좋아하여 아바나 시 외곽의 언덕에 저택을 짓고 낚시를 즐기다가 만년에 젊은 쿠바여인을 데리고 키웨스트로 이사해 살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특히나 낚시를 좋아했던 헤밍웨이는 낚시에 조금만 덜 심취했어도 “노인과 바다”의 내용이 더 많아졌을 것이라고 본인이 고백했을 정도였다.

그 헤밍웨이의 발자취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이 도시의 중요한 관광코스 중 하나다.
그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해변이 헤밍웨이가 바다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낚시를 다니던 바닷가에 있는 헤밍웨이 동상

동상 좌대를 놀이터 삼아 놀고 있는 천진난만한 소녀


2시 30분에 호텔로 돌아왔다.
다른 팀은 30일로 예정된 출발 날짜를 오늘로 당겨서 가신단다.
날짜 변경 수수료는 1인당 $50.



오토바이 택시
 오후에는 딱정벌레 모양의 택시를 시간당 $10에 전세해서 시내 일부를 구경했다.



말레꼰 해변 언덕 위에 있는 우리가 투숙한 호텔




호텔 정원에서 패션쇼






호텔에 돌아오니 횃숀 쇼가 한창이다.
팔등신의 흑인, 백인 미인들이 멋진 의상을 입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야자수 그늘에서 펼치는 쇼는 볼만했다.
특히나 막간에 흑인 남녀가 나와서 추는 아프리카 원주민 춤은 춤사위가 독특했다.



호텔 정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 풍경

아프리카 원주민 춤

아프리카 원주민 춤: 패션쇼 중간에 출연
 저녁에는 1905년 제물포항을 떠나 유까딴 반도의 1차 “애니깽”으로 용설란 농장에 계약노동자로 간 1,030명이 4년 계약기간이 끝나자 멕시코 각지와 미국, 중남미로 흩어졌는데 쿠바로 건너오신 분의 2세인 林 선생님을 찾았다.

애니깽 2세인 林 先生님을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출발할 때 어느 분이 꼭 만나 보라며 만나거든 전해 드리라고 월간조선 한 권을 주어서 잊지 않고 찾았다.

원주가 고향인 부친은 90세에 별세하시고 본인은 지금 75세란다.
대단히 건강해 보인다.
부인도 한국인이고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한 명은 생물학을 전공하여 대학교수로 일하고 있고 한 명은 식당을 운영한단다.
나름대로 단란한 생활을 하고 있다.




林 先生님과 만남
 젊은 시절에는 쿠바 정부의 고위 관리를 지냈고 정년퇴직 후에는 택시 기사를 하다가 지금은 고령으로 일은 하지 않는단다.
사회주의 국가라서 고급 관료를 하면서 아이들은 잘 길렀지만, 돈은 모은 것이 없단다.
그래서 택시 기사도 했고.

요즈음엔 최근에 생긴 한국어 학교에 공부하러 다니신단다.
듣기는 조금 되는데 말하기가 더 어렵단다.
쿠바에는 한국 사람이 700여 명(대부분이 2세)이 있는데 사업을 하기는 매우 어렵고 월급생활을 주로 한단다.
가지고 간 월간조선을 드렸더니 대단히 좋아하신다.
저녁을 들면서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져야 했다.



林 先生님

기념촬영
 4월 28일(일)

오늘은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미식축구 핼멧 처럼 생긴 오토바이 택시가 2인승이 시간당 us $10, 3인승이 us $12 이다.
셋이서 한대로 카데드랄에서 구시가지를 지나 100년이 넘는 고풍스러운 Ingratra Hotel, 그리고 요새까지.



중앙공원
 서민들의 휴식처.
옛 정취를 찾아볼 수 있는 낭만의 거리.
양옆으로는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거리의 화가 그림
 중앙공원 나무 그늘에는 여러 명의 화가들이 작품을 걸어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중앙공원은 올드타운 가운데에 수백 년 된 가로수에 텊여 있다.
서민들의 휴식처 이면서 거리의 화가들이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앙공원의 모녀
 공원 양쪽으로는 옛 도심인데 지금은 어두워 보인다.
조금만 이동하면 국립 회화박물관 광장과 잉그라트라 호텔이 나온다.
혁명박물관을 지나 바닷가로 나갔다.



웅장한 문화궁전과 멀리 잉그라트라 호텔
 Ingratra Hotel은 작그마하지만 로비와 식당에 스페인 세비아 산 타일로 치장한 벽과 천장 그리고 철문, 샨데리아 등이 고풍스러운 유럽 분위기가 난다.

길거리에는 요소에 경찰들이 배치되어 조금이라도 불량해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검문을 한다.




검문
 동냥하는 사람들이 조금 있지만 귀찮게는 하지 않는다.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활기가 넘친다.
까데드랄 옆 골목 – 국립 회화박물관 – 잉그라트라 호텔까지가 중심지이고 잉그라트 호텔 골목으로 들어가서 까데드랄 옆 골목부터 인사동 골목을 연상시키는 각종 상점이 즐비하다.
그림가게, 골동품가게, 음반가게가 즐비한 골목은 관광객들로 붐빈다.



길거리 풍경

멋쟁이 아가씨들

멋쟁이 가족

애기와 아줌마

김용대와 이영표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축구대회를 하는 해 봄이다.
도심 길거리에 세계 각국 축구 선수들의 사진이 수백장 진열되어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들 사진을 산단다.
우리나라의 선수 7-8명의 사진이 있다.
김 용대, 이 영표, 설기현, 서동원, 이천수 외 여러명의 사진이 진열되어 있었다.



꼴로니얼 시대 건물 – 주교좌 성당

수리 중인 까데드랄
 이 주교좌 성당 광장이 올드타운 관광의 시발점이다.
왼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그림가게, 골동품 가게 들이 늘어서 있다.

주교좌 성당으로 들어오기 전 우측 대로변에서는 토요일 이면 그림시장이 대대적으로 형성된다.



성당앞 광장 풍경


까데드랄 광장에서 시가를 든 할머니가 주교좌 성당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까데드랄 광장 모퉁이의 노인네 밴드
 한창 수리 중인 까데드랄 광장 한 모퉁이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들이 모여 앉아서 연주하고 있다 .
경력이 대단한 노인들이라고 론라프라넷이 소개하고 있는 그분들이다.”




주교좌 성당 광장 한 모퉁이에서 매일 노래를 부르는 노인 밴드.
한시절 잘나가던 밴드였단다.



호텔로 돌아오는 말레꼰 해변에서는 주말을 즐기는 가족 수영객들이 몰려나와 해수욕장이 붐비고 있다.


바닷가 풍경
 식민시대의 중후한 건물들이 늘어선 구시가지를 끼고 있는 바닷가에는 수영객들이 많이 나와 있다.



수영객들
 쿠바는 남미에서 가장 늦게 스페인에 독립 투쟁을 했고 1898년 2월 미국이 이를 빌미로 스페인과 전쟁을 일으켜 4개월 만에 승전한다.
미국은 이때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던 필리핀을 2,000만 달러에 시들이고 스페인은 쿠바를 독립시키지만 사실상 미국의 보호국이 되고 미국은 쿠바에 대규모 해군기지를 건설하였다.

19세기 초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이 독립했으나 쿠바는 만은 가장 늦게 독립했으면서도 제도혁명당이 70여 년을 독재하면서 미국의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부분 토지는 여전히 외국 자본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쿠바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교육자이며 민족운동가인 호세 마르띠의 영향을 받은 까스뜨로와 7.26 운동이 체 게바라의 협력을 얻어 1959년 바띠스따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에 성공하면서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외국 자본을 몰아내고 자주 경제 체제를 추진하면서 미국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몇 년 후 소련의 후루시쵸프와 미국의 케네디 시절에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 건설을 시도하자 미국은 해상 봉쇄로 이를 저지하고 소련이 철수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었었다.
그 후 미국이 쿠바의 경제를 봉쇄하자 소련이 쿠바에 원유의 국제가 이하 공급, 쿠바산 설탕의 국제가의 5배로 사주기 등으로 연간 20억 달러 규모로 도와주었으나, 고르바쵸프 때 와서 뻬레스뜨로이까 정책으로 소련연방의 붕괴를 가져오고 쿠바와의 거래 가격이 정상 가격으로 됨으로써 쿠바경제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 후 허리띠를 졸라매고 관광산업의 육성, 달러의 개인 보유 합법화 등 개방 개혁 노력으로 1993년 이후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으나, 인접 부국인 미국이 유엔 결의를 무시한 채 경제봉쇄를 계속하는 한 쿠바의 앞날은 계속 어둡기만 하다.

쿠바의 수입차량의 70 – 80%가 한국산이고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도 인기가 높다.



“여행은 방종이 아니다.
적당한 간격의 쉼과 충격의 파도를 즐기는 것이다”
– 이성영 교수의 여행기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중에서 –



적당한 간격의 쉼과 충격의 파도를 즐기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러나 궁금했던 것은 확인해보고 싶다.
언제까지 가능할는지는 몰라도.

저녁 바람이 시원하다.
내일은 08시 비행기로 멕시코의 깐꾼으로 되돌아가서 다음날 과테말라의 프로레스 근처에 있는 띠갈의 마야 유적지로 여행을 계속할 예정니다.
언제나 미지의 세계로 들어 간다는 것은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인다.

아바나 시내는 치안이 잘 되어 있어 있는 동안에 편안했고 사람들도 친절했던 나라,
“라 빨로마” 노래에의 향수에 집착하면서도, 여린 허리를 격동적으로 흔들며 살사춤을 추는 무희들의 모습에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까스뜨로가 즐겨 피운다는 아바나산 시거 “꼬히바”에 불을 붙여 물고 아바나를 떠났다.





면적 : 110,860km2.
인구 : 1,147만(2010년)
종족구성 : 물라토 51%, 백인 37%, 흑인 11%.
종교 : 가톨릭 85%.
어어 : 스페인어.
화폐 : 쿠바 페소(1$ : 21페소 – 2004년)
1인당 GDP : $3,000(2004년)
수도 : 아바나(Havana, 217명)

<쿠바 미사일 위기>

카리브 해상, 미국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쿠바는 휘어진 칼처럼 생긴 섬나라로, 1960년대만 해도 지척에서 미국의 목을 노리는 “붉은 칼”이었다.

1959년 카스트로가 이끄는 사회주의 혁명군이 친미 바티스타 정권을 내쫓고 정권을 잡자 미국은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1961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쿠바의 반혁명세력을 움직여 카스트로를 공격했고, 이에 분노한 카스트로는 쿠바에 소련제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소련의 후루시쵸프는 이를 수락했고, 쿠바에 미사일 기지 건설이 본격화됐다.

쿠바에 새로운 군사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와 전면전으로 맞설 것인지, 외교로 대응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전쟁으로 대응할 경우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핵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케네디 대통령은 결국 전면전 대신 외교노선을 택했다.
소련의 핵미사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상을 봉쇄한 가운데 “미국은 쿠바에 군사공격을 하지안는다”는 조건으로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철거시켰다.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항까지 갔지만, 전쟁 대신 외교적 해결을 선택한 케네디 대통령의 결정으로 최악의 핵전쟁 위기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냉전이 종식되고 화해 분위기가 마련되면서 소련과 미국의 관계는 호전됐으나, 아직도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고 있다.
(서진근 펴저 UN회원국 다이제스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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