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asak
11월 24, 2018옛 앙코르인들의 흔적 짬빠삭(Champasak)
2006년 2월 23일(목)
06시. 밤새워 달려온 버스가 빡세에 도착했다.
버스터미널은 중앙시장 앞이다.
빡세는 Sedon River와 메콩 강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여기서 40여 km 떨어진 짬빠삭에 11세기-12세기에 크메르인들이 살던 유적으로 추정되는 小 왕국 터를 방문하기 위해서이다.
이 왕국 유적은 2001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Champasak의 Wat Pho Monument를 다녀오기 위해 똑똑이를 전세했다.
짬빠삭의 왕국 유적지를 가려면 똑똑이로 1시간 20분, 배를 건너는데 약 30분 걸려서 왕복 4-5시간이 걸린단다.
1시간여 만에 Ban Muang 나루터 도착, 목조선 페리로 도강하여 10여 분 달려서 Wat Pho Monument에 도착.
발굴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큰 저수지가 있고 한창 복원 중인 중앙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좌우에 왕궁으로 쓰였을 크메르 양식의 건축물이 나타난다.
중앙 통로를 통해 산 위로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사원과 부속 건물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캄보디아의 앙코르 왓 보다 먼저 앙코르 인들에 의해서 건설된 小 왕궁의 흔적이 아닐까 추정한단다.
빡세 버스터미널 바로 뒤 빡세호텔.
시장도 가깝고 걸어서 시내를 돌아보기 편한 위치에 있다.($21)
옥상에 까페는 음식도 좋고 시내 야경을 보는데 그만이다.
나루터 |
반 무앙 나루터 |
승객과 자동차를 실어 나르는 널판지 페리 |
페리 위의 상인 |
페리 위의 상인 – 무 |
메콩 강을 건너는 페리 |
강을 건너서 Wat Pho로 가는 길가의 좌불.
상당히 오래전에 조성되었는가 보다.
나무가 부처를 감싸고 올라간다.
짬빠삭 동네에서 본 쌀국수 공장 |
크메르 양식의 石柱 |
왕궁 유적 |
관광객 |
왕궁 유적 |
유적의 벽면 |
사원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
사원 |
언덕 위 사원 |
사원내부 |
사원 앞에서 내려다본 왕국 유적들.
멀리 메콩 강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자리 잡았다.
왕궁 앞에는 넓은 둘판이 펼쳐져 있다.
그럼에도 좌측에 넓은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背山臨水에 넓은 평야를 앞에 둔 최적의 장소에 있었던 小 왕국 터가 한눈에 보인다.
사원으로 올라오는 列柱 길 |
메콩 강 변의 여인 |
河童들 |
도중에 수박파티를 하면서 여유 있게 다녀도 4시간 반 걸렸다.
1시 30분에 점심을 먹고 야간버스로 온 피로를 풀자고 호텔에서 쉬었다.
호텔방에 들어와서 TV를 켜니 옛날에 방영되었던 우리나라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다.
미얀마, 태국에서도 우리나라 연속극을 즐겨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특히나 대장금을 하는 시간에는 인기가 대단하단다.
어떤 사람은 한국 연속극은 왜 그리 울고 짜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는 이도 있다.
저녁에는 바로 길 건너 시장에서 감자와 상추를 사다가 된장찌개에 상추쌈으로 푸짐하게 먹으며 향수를 달래었다.
2월 24일(금)
이제 라오스를 끝내고 캄보디아로 넘어가는데 길이 프놈펜으로 가는 길밖에는 없다.
자동차로 씨엠립으로 가려면 프놈펜으로 가서 다시 5-6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그러려면 하루에는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그리고 빡세에서 프놈펜으로 가는 교통편도 확인이 안 돼서 위왕짠에서 미리 쎄엠립으로가는 비행기 편을 예약해 왔다.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하기에 나와 한 동기 회장님은 걸어서 시내 투어를, 김 교수와 김 이사는 자동차로 외곽을 다니기로 했다.
라오스 남부 최대의 사원 Wat Luang. 새벽이면 70여 명의 승려들이 탁밧을 나온다.
주민은 나름대로 공양할 것을 준비해 정성스레 공양한다.
Sedon 강의 일방통행 다리를 건넛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둘러보고 아이들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다시 시내로 나와 Wat Pha Bat(Wat Tham Fai), 중국 사원, Champasak Historic Museum 등을 둘러보았다.
17세기경에는 루앙뿌라방과 위왕짠, 짬빠삭에 있는 소왕국들이 경쟁하기도 하였으나 빡세와 짬빠삭의 유적과 유물들은 앙코르 인들의 흔적이 더 많다.
Wat Luang
라오스 남부에서 가장 큰 사원. 아침이면 70여 명이 탁밧을 나선다.
사원 문의 조각 |
쩨디들 |
쩨디에는 사진들이 붙어 있다. |
이른 새벽부터 준비하고 있는 신도 앞으로 탁밧행렬이 지나간다.
공양하는 모습에 정성이 가득 담겨 있다.
여러 팀으로 나누어져 나온 행렬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Wat Pha Bat |
마을 골목의 사립문 |
마을 어린이들과 |
중국 사원 |
중국 사원 내부 |
불당 앞의 홀은 중국인들의 회합과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로 활용했단다.
Champasak Historic Museum |
철북. 행사 때 동원되는 鐵鼓 |
유물들 |
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
면적 : 236,800평방km.
인구 : 637만.
수도 : Vientian.
종족구성 : 라오룸 50%, 라오퉁 30%, 라오숭 10% 등 47개 부족.
언어 : Lao어. Local Language.
종교 : 불교 90%. 토속 신앙.
국민소득 : us$385(2005년)
환율 : us$1 : 10,82Kip
통화 : KIP(LAK).
*.라오스는 90% 이상이 해발 180m 이상인 산악 국가이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면적은 메콩 강 동쪽에 강변의 농토로 고작 4% 정도밖에 안 된다.
동쪽으로 솟아 있는 해발 1,500 – 2,400m의 안남 산맥은 베트남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라오스는 12-13세기에 북부에 무옹스와 왕국이 있었으며, 14세기에는 크메르의 앙코르 왕의 도움으로 파눔이 라오족 국가 란상을 세워 1,713년까지 유지했다. 그 기간 중 1574-1637년 사이는 미얀마의 통치를 받았다.
18세기 중에는 3개 왕국으로 분할되어 시암의 왕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제후로 몰락했다.
19세기 말 프랑스가 메콩 강 동쪽의 시암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와 라오스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1945년 일본이 프랑스를 몰아내고 라오스가 독립하였으나 2차대전이 끝나고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946년 프랑스는 루앙 뿌라방 왕이 통일 라오스의 통치를 승인하였고 1949년에는 헌법이 공포되고 프랑스 연방이 되어 일부 자치권을 유지하였다.
1950년 좌파인 파테드라오(조국 라오)가 제1차 인도차이나반도 전쟁에 참여하여 종전과 함께 2개 주를 통치하게 되면서 국내정치에 깊게 관여하게 되었다.
프놈펜과 베트남에서 반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진 1975년, 파테트 라오가 정권을 잡게 되고 그때까지 지하에 있던 공산당이 밖으로 나와 인민 민족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라오스가 공산화가 되자 국민의 약 10%가 인접국(태국)으로 나가버려 국민 수를 늘리기 위해 피임기구를 모두 없애 출산율을 높이는 정책까지 도입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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