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bodia – Angkor Wat
11월 24, 2018잃어버린 제국의 미아, 앙코르인.-Kampuchea-앙코르와트
2006년 2월 25일(토)
08시 6분. 빡세 공항 이륙.
09시 정각 씨엠립 공항 도착.
입국 절차를 밟으려고 줄 섰는데 근무자가 부지런히 오더니 일행이 넷이냐며 여권과 입국 세를 주면 자기가 절차를 대신해 주겠단다.
여권 4개와 $100(1인당 $20)짜리 한 장을 주었다
.
기다리다 보니 우리만 남는다.
워낙 빨리 처리해 주니까 줄 서는 것이 더 빠른 것을 몰랐다.
그래도 열심히 해서 가져왔다.
거스름돈을 내놓지 않고 미적거린다.
수고비 달라는 의사표시인 것 같다.
사기 친 것은 아니지만 사기당한 기분이다.
공항 택시 스탠드에 공식적으로 1일 전세료가 쓰여 있다.
일반 택시는 하루 $20. 흥정이 필요 없다.
2일간 비리기로 하고 호텔부터 찾아갔다.
렌터카 안내서에 관광코스가 그려져 있다.
레드 코스와 블루코스.
그 코스를 벗어나 다른 곳을 보려면 기사와 다시 흥정해야 한다.
저녁에는 디너쇼하는 것을 보기로 하고 예약을 했다.
디너쇼하는 곳이 여러 군데인데 우리는 $12짜리로 예약했다.
시엠레압(씨엠립)은 앙코르 지역을 관광하는 거점 도시다.
시엠레압의 의미는 “태국군을 물리친 곳”(Siamese Defeated)이란 뜻이란다.
앙코르 왓까지 6.4km, 앙코르 톰까지는 9.7km이다.
앙코르 지역을 관광하는 입장료는 1일 us $20, 3일권이 us $40이다.
우리는 3일권을 샀다.
사진을 붙여서 발행한다.
앙코르왓 |
Chams 족에 의해 먼저 수도인 Baphuon이 파괴되자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 요새화된 도시다.
한 변의 길이가 3km인 정방형의 성벽은 높이가 8m, 길이가 12km이다.
10평방 km의 넓이에 5개의 문을 가지고 있다.
동쪽에 2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승리의 문으로 왕궁의 중앙 단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 안에는 사원, 궁전, 공공건물, 집들이 있는데 신만이 돌로 지은 건물에 살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전 이외의 건물들은 나무로 지어 모두 삭아 버렸다.
앙코르 톰 남문으로 들어가려면 우유의 바다(힌두교 창조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건너야 한다.
성곽 주위에 폭 100m의 해자를 만들고 다리로 연결했는데 남문의 다리 난간이다.왼쪽 난간은 善神이 오른쪽은 惡神이 Vasuki(뱀)을 끌어안고 있다.
인상이 좋아 보이는 善神들.
앙코르 톰 남문 |
남문 꼭대기는 Avalokitesvara神의 頭像이 4방을 바라보게 조각되어 있다.
Bayon은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세워진 앙코르 톰의 정 중앙에 있는 신전.
앙코르 왓 보다 100년 뒤에 건설된 불교 사원이다.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보존되어 있다.
54개의 탑에는 4방을 바라보는 Avalokitesvara神의 頭像 조각되어 있다.
바욘 외벽의 전투장면 부조 |
바욘에는 이러한 얼굴 상이 11,000개나 조각되어 있단다.
얼굴 상의 입술은 양 끝이 약간 위로 치켜져 있다.
새벽 동이 트면서 비치는 햇살의 각도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표정은 정말로 미묘하단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새벽부터 온종일 한곳에서 감상한단다.
탑 중앙으로 올라가는 기둥에 새겨진 부조 |
앙코르의 미소 |
왕실 사원 겸 제단 Phimanakas |
왕궁의 동문인 코끼리 테라스 (350m).
양쪽 벽면에 코끼리의 행진 모습이 새겨져 있다.
공공의식을 관람하는 관람석과 대강당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바로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 문둥이 왕의 테라스가 있다.
코끼리 테라스 |
世界三大 佛敎遺跡 群 중 하나로 불리는 앙코르 지역의 유물 중에서도 최고의 건축물인 이 사원은 Suryavarman 2세(1112-1152)가 힌두신인 Vishnu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화장 사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30년 걸려 지은 것이다.
한 변이 850m x 1,000m의 장방형 대지에 시바가 산다는 티베트 남부에 있는 해발 4,560m인 Kailas 산(Sumer 산 = 須彌山)을 본떠 건립했단다.
해자의 넓이가 190m, 둘레 길이가 5.5km에 이른다.
Naga(해자를 건너는 다리 난간)의 길이가 250m.
해자를 건너 입구에 들어서서 중앙 건물까지가 350m,
중간 양쪽에 있는 작은 건물들은 서고였단다.
중앙사원은 3층으로 층마다 사방으로 뚫려 있고 주위에는 회랑을 만들어 놓았다.
중앙탑은 3층에서 31미터, 지상으로부터 55미터나 된다.
중앙탑을 가운데 두고 다섯 개의 탑이 둘러서 있다.
1층 회랑의 둘레는 1.2km에 이르며 라마야나 이야기, 염라대왕의 심판, 정복전쟁 이야기, 크메르인들의 생활 등을 양각으로 새겨 놓았다.
처음에는 힌두사원으로 지었으나 점차 불교 사원으로서 기능을 더해 갔다.
Angkor Wat를 둘러싸고 있는 우유의 바다(해자)를 건너가는 다리. |
다리 위에서 만난 승려들 |
앙코르 왓 주 건물의 외곽 |
본건물로 들어가는 건물 앞에 영광의 단상이 있다.
이 단상을 지키는 사자 상
본건물 입구 |
1층 회랑 벽에 부조된 라마야나 이야기 중에서, |
라마야나 이야기 중에서 |
수야 바르만 2세(?)의 전쟁 기록화 중에서. |
전쟁기록화 중에서 |
중앙탑을 올라가는 계단 |
주탑 위에 |
주탑 위의 부조
앙코르 왓 1층 외벽에서 문을 열면 서 있는 부처님 |
앙코르 왓을 석양에 보면서…… |
입구를 무화과나무 뿌리가 완정 정복했다.
벵갈 보리수들의 침입 |
톤레삽 호수
톤레삽 호수는 캄보디아 사람들의 단백질 공급원이다.
우기에는 호수의 수위가 수 미터나 높아져 유역이 범람하여 퇴적층을 형성해 농사에 큰 도움을 준다.
건기에는 수량이 3/1로 줄어들어 우기에 홍수 조절기능을 톡톡히 한다.
여기에서 흘러나가는 강은 매콩 강과 합류하여 베트남의 남쪽으로 흘러들어 메콩 삼각주를 만든다.
톤레삽 호수에는 수많은 난민이 수상생활을 하면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해 간다.
톤레삽 호수의 새벽 |
등교길 |
수상 학교 |
투망하는 사람 |
수상 가옥들 |
모터 수리공장도 있다.
슈퍼마켓도 있고 배로 싣고 다니는 구멍가게도 있다.
식수는 육지에서 가져다 먹는단다.
시엠립에서의 실수
언제나 바쁘게 서둘면 실수를 한다.
그리고 허가받은 전문점(여행사, 안내소 등)과 상의해야 덜 속는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믿겠거니 하는 안이함이 속는 원인이다.
공항에서 택시를 전세한 것은 잘한 것이다.
택시를 타고 여행자 거리로 가자고 했더니 그 방향으로 갔다.
우리가 예정했던 호텔은 만원이란다.
기사가 최근에 오픈한 깨끗한 호텔이 저렴하니 그리로 안내해 주겠단다.
따라가니 아침식사포함 $25, 많이 비싸다.
우리 예정가격은 $8-15$였다.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2일 만에 앙코르 지역을 다 보려면 시간이 바쁘다.
그냥 결정했다.
다음 날 아침.
식당에 가니 달랑 탁자 세 개 뿐이고 주방도 없다.
말라빠진 토스트 2쪽에 커피 한 잔.
계란 프라이를 달라고 했더니 1개에 $1씩 달란다.
$1이면 웬만한 식사 한 끼 값보다 비싸다.
웬만하면 그냥 있으려 했는데 너무한다.
할 수 없이 새벽 산책 때 보아 두었던 게스트 하우스로 옮겼다.
에어컨 있는 트윈이 $14. 식사는 없다.
게스트하우스라고 하지만 $8짜리 방에서부터 $20짜리까지 다양한 그레이드의 시설이 있는 집이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우리 스타일 대로 해야 하는데 관광지 기사를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2월 27일(월)
새벽 6시.
쾌속정으로 프놈펜으로 가기 위해 톤레삽 호수로 달렸다.
7시 20분에 작은 보트를 타고 쾌속정까지.
8시 20분 100인승 쾌속정이 출발했다.
6시간 만인 14시 20분에 프놈펜에 도착했다.
요즈음은 도로사정도 많이 개선되어서 같은 시간이면 버스로 프놈펜까지 간단다.
선착장에 똑똑이 기사들이 호객하느라 아우성이다.
좋은 기사를 만나서 박물관과 왕궁이 가까운 올드타운에 호텔을 잡았다. 트윈 $15.
톤레삽에서 쾌속정을 타고 프놈펜으로
왕궁, 박물관, 실버파고다를 오늘 보고 내일은 일찍 베트남으로 가야 한다.
짐 풀고 나니 4시가 넘었다.
5시면 모두 문을 닫는단다.
먼저 국립 박물관으로 갔다.
대강 둘러보니 5시가 넘는다.
왕궁과 실버 파고다는 밖에서 보고 똑똑이를 1시간($3) 빌려서 씨티투어를 했다.
하루를 더 있다면 킬링 필드를 견학하는 것 말고는 크게 찾고 싶은 곳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킬링필드 현장이나 고문기구 등은 보고 싶지가 않았다.
폴랜드에서 오이시비엥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프놈펜에 있는 국립박물관
국립박물관 정원 |
국립 박물관과 왕궁 사이 넓은 공원에 있는 기념탑
왕궁 |
광장의 기념탑 |
해먹 까페 |
베트남 국경까지 가는시외 버스 |
베트남으로 가기 위해 캄보디아 국경 이미그레이션으로 가고 있다.
크메르인들은 수백 년간 다민족 간의 자연러운 혼혈로 생겨난 민족이란다.
그중에서도 인도인, 인도 말레이인, 중국인 등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란다.
국가명 : Kingdom Of Cambodia/Preah Reach Ana Pak Kampuchea.
면적 : 181,000평방km.
인구 : 1,449만.(2009년)
수도 : Phnom Phen.
언어 : 크메르어 90%, 베트남어.
종교 : 소승불교 95%, 가톨릭, 힌두, 이슬람.
화페 : 리엘(1$ : 4,116riel)(2004년 9월)
1인당 GDP : 818$(2008년)
환율 : $1 : 4,116리엘.
크메르 왕국은 세기 초 힌두교와 불교를 신봉하는 푸난왕국과 첸라왕국이 양립하다가 6세기 말경 첸라왕국이 주도권을 잡는다.
802년에 앙코르 지역에 근거를 둔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무너지고 앙코르 시대가 열리면서 1432년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전성기를 누린다.
자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 지역에 수도를 세우고 위대한 건축물들을 세우기 시작한다.
크메르제국의 왕들은 수많은 사원을 지었고 12세기 수리야바르만 2세가 앙코르 왓을 지을 때 절정에 달한다.
이때 시암(태국) 북부와 홍하삼각주(베트남 남부)까지 서쪽으로는 벵골만에 이르는 넓은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는 중국 국경을 넘어서는 지역까지 대제국을 건설했다.
13세기-14세기 나약한 군주들이 등장하고 불교가 성해지면서 힌두교를 바탕으로 한 국가의 위계질서가 허물어지면서 국력이 약해지자 주변 국가들의 침입이 잦아져 15세기 중반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긴다.
그 후에도 주변국에 조공을 바치는 위치로 전락하여 앙코르 인들의 문화적 유산은 잊혀져 400여 년간 밀림 속에 묻히게 되었다.
프랑스의 자연학자 Henri Maouot가 1860년대에 그의 항해보고서를 출간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후 프랑스의 고고학자, 철학자로 구성된 탐사대가 조사에 착수했고 에꼴 프랑세스의 후원을 받아 1908년부터 1970년 내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유적지 발굴 및 복원작업을 했다.
1864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안정이 회복되었고 2차대전 후 프랑스 연방이 되었다.
1941년 프랑스는 노르돔 시아누크공을 왕으로 세웠고 1953년에는 완전히 독립했다.
시아누크는 베트남 전쟁 때 중립을 지켰으나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허용하여 반대파와 론놀 장군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 후 논 롤 정권과 공산주의자들이 분열 대립하였으나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크메르루즈에 의해 논롤 정권은 무너졌다.
1976년 중국의 지원을 받는 폴포트가 이끄는 세력이 캄푸치아 공화국을 선포하고 폴포트가 총리가 되어 공산당이 국가통치기구로 공식 승인되었다.
폴포트는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도시민들을 농촌지역이나 대규모 관개공사와 공공의 토목공사에 배치하는 한편,
교육받은 중산계급과 정부의 반대 세력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숙청하기 시작해서 1979년까지 3년 동안 100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폴포트가 베트남에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자 1979년 베트남은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여 크메르 루즈를 서부내륙으로 몰아내고 온건파로 사회주의 정부를 세웠다.
<크메르루즈와 캄보디아 대학살>
그메르루즈(Khmer Rouge)는 게릴라전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1975년에서 1979년까지 4년 동안 캄보디아를 통치한 공산주의 딘체로, 크메르루즈의 지도자 폴 포트(Pol Pot)는 100만 명에 달하는 주민을 학살했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베트남 전쟁의 영향으로 많은 베트남인이 캄보디아로 흘러들어왔다.
미국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1969년에서 1973년 사이에 대대적인 폭격으로 60만 명 – 70만 명에 달하는 캄보디아 인들을 학살했다.
미국에 대한 반발과 정부의 부패는 국민이 크메르루즈를 환영하게 만들었다.
1975년 수도 프놈펜을 장악한 크메르루즈는 도시 주민 200만 명을 시골로 강제이주시키고 노동자에 의한 농경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 기술자. 관료. 승려. 운동선수 등이 몰살당했다.
이 사건은 1984년 개봉한 롤랑조페 감독의 영화 <킬링필드>로 유명해졌고,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과 함께 가장 충격적인 대량학살로 꼽힌다.
당시 사망자의 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전문가들은 대략 80만 명 – 100만 명 정도가 살해당했고,
그 밖에도 기아. 질병. 중노동으로 수십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크메르루즈 정부는 베트남군과 캄보디아 내의 다른 공산동맹군에 의해 1979년 무너졌으나 크메르루즈의 지도자 폴 포트는 계속 숨어서 남은 군대를 이끌다가 1997년 6월 체포되었고 그다음 해에 사망했다.
현재 캄보디아의 권력자 중에는 폴 포트 정권과 관련됐었던 사람이 많고, 미국은 1969년부터 4년 동안 벌렸던 학살을 은폐하고자 하기 때문에 크메르루즈의 당시 대량학살에 관한 과거 청산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서진근 편저, 192 유엔 회원국 다이제스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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