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gkok
11월 24, 2018방콕의 寺院들
타이족은 원래 중국의 양쯔 강 남쪽에 살았다.
한족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차츰 한족에 밀려 남쪽으로 이동해왔다.
13세기경 선주민인 몬족과 크메르족이 쇠퇴하자 북부에 치앙마이를 수도로 한 타이유안족의 란나타이 왕국과 중부에 수코타이를 수도로 한 시암 족의 수코타이 왕국이 나타났다.
정통 왕조는 수코타이 왕조(1257-1350)로 제3대 람캄행 왕(1277-1317) 때 영토를 확장하고, 캄보디아문자를 개량해서 문자표기법을 제정하였다.
중국인 도공을 데려와 宋胡錄 도자기를 개발하였다.
수코타이 왕조를 이어 아유타야 왕조(1350-1767)가 나타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였다.
17세기에 아유타야는 무역으로 번창. 왕실이 무역을 독점하고 서구와 중국, 일본과도 교역하였다.
수차례 미얀마에 점령당하였으나 그때마다 회복하였고 1782년 차크리 장군이 방콕에서 차크리 왕조를 세워 지금에 이른다.
1932년 6월 24일 인민당이 무혈 쿠데타에 성공하여 12월에 헌법을 공포하고 입헌군주제로 발족하였다.
1939년 국호를 시암에서 지금의 SIAM KINGDOM OF THAILAND로 고쳤다.
1947년부터 수차례에 걸친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었으나 입헌군주제는 온전히 유지되고 있다.
올해 80세가 된 현재 국왕은 정치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고 국민의 생활에 관심을 두고 살아왔기 때문에 국민에게서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단다
며칠 전 태국 총리가 퇴임사에서 국왕의 뜻을 받들어 결정했다는 말을 할 정도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이번 여행계획에서 태국은 방콕, 치앙마이, 치앙라이, 메이싸이, 골든트라이앵글, 치앙셍, 치앙콩으로 가는 코스를 잡았다.
2006년 2월 10일(금)
인천공항에서 30분 늦게 18시 40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5시간 30분간 날라서 방콕의 돈므앙 공항에 22시 20분(시차 2시간)에 도착.
공항버스 2개 노선 중에 제2(A2) 노선이 시내 올드타운 근처의 kHAOSAN ROAD가 종점이다.
배차는 1시간마다.
요금은 100밧.
택시는 300밧 정도, 공항 택시는 700밧, 밴은 1,000밧을 달란다.
24시 40분에 카오산 로드 종점에 도착해서 바로 옆 골목에 Four Son’s Place Hotel에 투숙.
더블 650밧, 트윈 700밧, 트리플 850밧.
배낭여행자들의 집합소 카오산 로드 |
카오산 로드의 미용실 |
Four Son’s Place |
골목 안 포장마차 |
복권장수들 |
카오산 로드 로터리의 조형물 |
방콕 시내 |
왕궁 로터리의 국왕 부부 사진 |
왓 프라깨우는 라마 1세 때 세운 왕실 사원이다.
법당 높은 곳에 에메랄드로 조각한 높이 60cm짜리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금실로 짠 법의를 입고 있다.
이 불상은 스리랑카에서 제작되어 치앙라이를 거처 치앙마이, 비엥티안을 거쳐서 방콕으로 왔단다.
왓 프라깨우(왕궁 사원= 에메랄드 사원)에 있는 미얀마, 태국(중앙), 캄보디아 양식의 세 탑.
사원을 지키는 怪獸像 |
왓 프라깨우(에메랄드 사원) |
왓 프라깨우 벽면 조각 |
왓 프라깨우 외부 장식 |
왓 아룬
왓 프라깨오를 나와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 시장 골목을 빠져나가면 짜오쁘라야 강의 선착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도선료와 입장료를 내면 강 건너 왓 아룬(새벽 사원)으로 실어다 준다.
왓 아룬은 새벽 사원이라고 알려진 높이 104m의 캄보디아 양식의 탑이다.
King Thaksin이 건립한 이 사원 벽에는 도자기 조각이 붙어 있어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짜오쁘라야 강을 건너가면서 보이는 새벽 사원 |
새벽 사원 |
새벽 사원 |
왓 포
새벽 사원을 보고 선착장으로 나오면 5밧을 내고 다시 강을 건너서 골목길을 지나서 조금만 걸으면 왓 포에 도착한다.
왓 포는 17세기에 지어진 방콕 最大, 最古의 사원이다.
아름다운 Chedi(쩨디=사리탑)가 있다.
짜오쁘라야 강을 건너면서 멀리 왓 포의 지붕이 보인다.
왓 포 입구 |
왓 포 |
46m짜리 와불 |
와불 발바닥 |
와불 아래에는 여러 개의 불상(?)들이 있다.
아름다운 Chedi(쩨디=사리탑)
마블 템플 |
왕궁을 가기 위해 걸어가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사람이 친절하게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영어도 유창하다.
왕궁 사원을 간다고 했더니 오늘은 토요일이고 토요일은 부다 데이라서 오전에는 열지 않고 오후 2시부터 입장을 시킨다며 시간이 있으니 몇 군데 관광을 하고 오후에 가 보란다. 자기가 잘 아는 톡톡이 기사를 소개해 줄 테니 그때까지 40밧만 주고 타고 다니란다.
고마운 생각에 톡톡이 2대에 나누어 타고 떠났다.
그런데 마블템플을 구경시키고는 다음에 데려간 곳이 보석 가공공장이다.
보석공장 안이 어둡고 출입구도 하나뿐이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되돌아 나오면서 다른 곳으로 가자니까 본색이 나온다.
보석을 안 사니까 다른 곳은 데려다 줄 수도 없고 톡톡이 요금도 1대당 100밧씩 200밧을 달란다.
싸운 끝에 2대에 100밧을 주고 해결하고 택시를 타고 왕궁 사원으로 갔다.
이번에 떠나면서 읽은 여행안내 책자에 방콕에서 조심할 사항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읽었으면서도 멍청하게 당한 얘기다.
<콰이강의 다리>
타이는 19세기 서구 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해 식민지화시킬 때 영국과 프랑의 완충지대로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고 독립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타이는 일본의 점령지가 되었다.
일본은 버마(지금은 미얀마) 점령을 위해 방콕에서 미얀마 남부의 모올메인(Mawlamyine)까지 철도를 건설하고, 이 철도를 잇기 위해 1942년 – 1943년 칸차나부리(Kanchanaburi) 근처의 콰이(Kwai)강에 다리를 건설했다.
이 철도와 다리를 건설하는 데는 싱가포르에 주둔하고 있었던 영국군을 비롯한 수많은 연합군 포로들이 동원됐다. 전쟁 포로에 대한 국제 조약인 제네바 조약(Geneva Conventions)에 의하면 포로는 노동에 동원하지 못하지만, 일본군은 이들을 이용해 철도와 다리를 건설했고, 이 과정에서 포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널리 알려졌다.
제2차 대전이 종결된 후 , 포로에 대한 잔학행위의 책임을 물어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던 일본군들은 전범 재판에 세워졌는데, 그중에는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이 전쟁 시 사로잡은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모집해 1942년부터 동남아시아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배치한 것이다.
대부분은 정규군이 아닌 軍屬(군속)이었지만 소수 군인도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이 홍사익 중장이다.
洪思翊은 조선인으로 일본군 중장까지 진급한 인물로, 1944년 필리핀의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되었다.
홍사익은 작전 지휘권이 없는 보급지휘관이었으나 전후 포로 학대의 총책임자로 기소되었다.
그는 법정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으며, 결국 A급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서진근 편저 UN 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ASEM(아시아. 유럽 정상 회의)
아시아. 유럽 정상 회의(Asia Europe Meeting)를 줄여 ASEM이라고 한다.
ASEM은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재 ASEM 회원국은 우리나라, 일본, 중국, 몽골, 인도, 파키스탄과 타이를 비롯한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 그리고 EU(유럽연합) 27개국이다.
ASEM은 회원국 정상들이 만나 정치, 안보,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의견을 교환하는 회의이자, 아시아와 유럽의 공동발전을 지향하는 정부 간 협력기구이다.
따라서 ASEM은 공동 문제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지만, 시기와 상황에 맞춰 다양한 논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유연성이 있다.
1990년대 이래 세계질서의 흐름은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3개의 축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그 중 아시아와 유럽 간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미진했다.
또한, 한국,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신흥 경제국들의 성장이 두드러지자 유럽 국가들에서도 아시아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1994년 싱가포르가 ASEM 창설을 제의하자 한국, 일본, 중국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과 ASEAN, EU의 동의로 ASEM 창설이 결정되었다,
ASEM은 1996년 3월 1일 타이의 수도 방콕에서 제1차 정상회의가 개최되면서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제2차 정상회의는 런던에서 열렸으며, 제3차 정상회의는 2000년 10월 서울에서 열렸다.
(서진근 편저 UN 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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