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enia – Garni – Geghard

11월 16, 2018

아르메니아 – 가르니, 게하르트



9월11일 오전에 예치미이진 근처를 돌아보고 오후에는 조금 떨어진 산중에 있는 여름 궁전인 가르니,
수도원인 게하르트를 둘러보고 그루지야로 돌아왔다.

가르니는 천애의 벼랑 위에 세워진 요새 이면서 왕실의 별장 지로 쓰였단다.
로마식 신전 건물과 목욕탕이 남아 있다.
목욕탕 바닥에는 모자이크로 된 그림이 남아 있다.



예치미아진에서 조금 떨어진 가르니 입구 기념품 가게.
아라랏 산(大, 小)과 신전 그림이 보인다.



기념품 가게 – 毛皮 店

신전

목욕탕, 모자이크 그림
 가르니를 보고 나서 험준한 산악지대로 들어간다.
산세가 험준하면서도 아름답다.
이 계곡에서 SF영화를 촬영했단다.

게하르트는 석산에 동굴을 파고 예배당을 만들었다.
동굴 속에 큰 홀을 만들고 성상 등 성물들을 설치해 놓았다.

자연 암반과 잇대어 지어진 건물은 서로 통하게 지어졌는데 이음새가 완벽해서 빗물이 새어들지 못한단다.
건물 밖에도 바위를 뚫고 공간을 만들어 한 사람씩 수도할 수 있는 공간이 여러 개 보인다.



게하르트 수도원

수도원 입구 악사들

수도원 입구 노점상

수도원 벽 조각

수도원으로 들어가면서.

수도원으로 들어가면서.

바위산을 뚫고 지은 예배당

바위산을 뚫고 만든 홀


바위산과 인공 건축물을 이은 부분.
이음새가 완벽하다. 비가와도 빗물이 스며들지 않는단다.




바위산을 뚫고 덮개를 씌운 환기구.
여러 개의 홀이 있다.
홀마다 중앙 천정에 둥글게 환기와 채광을 위한 창이 있다.




내부의 홀은 공명이 잘돼서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린다.
백봉기 회장님이 개인 리사이틀을 하셨다.



백 회장님의 노래를 듣는 관광객

바위산에 석굴을 파고 수도하는 공간

게하르트 수도원에서 기념촬영

교회당 출입문의 조각


계단 – 많이 닳았다.


임혜숙 여사님의 칠순잔치

기념사진 – 함께 다니는 기사와 가이드 Asiya도 함께.


조영선 여사님의 축시낭송

식당 주인도 샴페인 한 병을 선물하고 기념 촬영
 9월12일(목)

8시50분에 예레브니 호텔을 출발해서 그루지야로 돌아간다.
국경 도착 30분 전 즈음 Goat 고기로 점심을 먹었다.
오이와 토마토 덜 익은 것으로 담근 장아찌(?)-우리나라식으로는 오이지 담그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향채와 파, 풋고추, 버터, 치즈, 요구르트 등 아르메니아 시골음식 그대로 점심을 즐겼다.

국경에 도착해서 그루지야로 입국하는 데 2시간이 걸린다.
비자 피 1인 $40. 되게 비싸다.
저녁 6시에 트빌리시에 도착.
그루지야에 들어오니 하얀 승용차를 가진 젊은 사람이 붙는다.
자기는 관광회사를 하니 부탁하면 안내하겠단다.
이미 다 돌아보았다고 하니까 다비드 갈리지(데이비드 칼리지)라는데를 가 보아야 한단다.
호텔 옆 지하 식당에서 그루지야 서민들과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그루지야로 돌아간다.
가는 길이 심심산골을 지나간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가는데 점심때가 되었다.
길가 식당에서 Goat 꽂이 구이로 점심을 먹었다.
식당 주인의 풍채가 좋다.


샤시리크 굽기

식당 여주인
 김 교수가 커피를 한잔 부탁했다.



식탁. 토마토, 오이, 당근으로 우리가 여름에 먹는 오이지 맛나게 담근 것이다.
피클 맛이 아니다.


채소와 요구르트, 치즈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는 흑해와 가스피해 사이에 있는 나라다.
이제 발칸반도 5개국에 코카서스 산중의 그루지야, 아라랏 산을 끼고(실제로는 터키에 있음)있는 아르메니아 여행을 끝내고 내일이면 새벽 6시 비행기로 이스탄불로 간다.

나는 세계사를 모른다.
그런데도 여행을 다니려고 자료를 찾다 보니 과거에는 화려한 역사가 있었어도 지금 형편이 별로 좋지 않고 장래가 암담한 나라는 자료조차도 구하기 어렵다.

현지에 가서 보면 과거에 많은 것을 일구어 놓았었고 영화도 누렸었던 흔적이 확연한데 지금은 국민의 의식 속에 자존심만 남았지 초라해진 나라들을 보면서 우리의 지도자들도 잘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왕조가 영원하지 못한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었을것이다.
조선왕조 500년을 보더라도 명군이 몇 분이나 계셨던가!

우리는 지금 명군(?) 다운 인물이 우리 체제에 맞게 추진력을 갖추고 나타나 세기적인 격랑의 시대를 헤쳐 나아가야 할 시점에 있다는 것이 나 같은 범부의 눈에도 보인다..
그러한 상황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마음이 착잡하다.

비판의 정신은 대안을 가졌을 때 빛이 난다.
답답할 때 용기와 끈기가 더욱 필요한 것이다.





면적 : 29,800km2.
인구 : 329만 명(2010년)
종족구성 : 아르메니아인 93%, 아제르바이잔인 2%.
종교 : 아르메니아정교 94%.
언어 : 아르메니아어.
화폐 : 드람(1$=361.2드람)(2010년)
1인당 GDP : $2,658(2009년)
수도 : 예레반.



<세계 최초의 그리스도교국가>

아르메니아는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 이전인 301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지정한 세계 최초의 그리스도교 국가이다.
아르메니아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언한 후 로마가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392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지정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역사를 가진 그리스도교 국가이나 아르메니아 교회(Armenian Apostolic Church)는 예수에 대한 교리상의 차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았다.

아르메니아는 이웃한 페르시아로부터 조로아스터교를 강요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로 일찍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됐다.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와 셀주크튀르크, 오스만튀르크의 지배에 놓이면서도 그리스도교를 고수했으며, 아르메니아 유민이 다스린 소아르메니아(현재 터키 남부 지방에 위치)는 십자군 원정 때 십자군의 주요한 전선 기지가 되기도 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유대교의 성지로 각 교단이 관리하는 몇 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서남쪽 구역은 아르메니아 정교회 구역이다.
(서진근 편저 192 UN 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 사건>

아르메니아와 터키는 오랫동안 반목해온 사이로, 아르메니아가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외교관계가 단절되었으며, 1993년에는 양국 간의 국경도 폐쇄되었다.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관계가 이렇게 나쁜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1917년 터키의 前身인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150만 명 가량의 아르메니아인 사상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군을 지원하는 의용군을 구성했다.
그러자 오스만튀르크는 175만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사막으로 추방했다.
아르메니아는 오스만튀르크의 강제 이주와 군, 경찰에 의한 무차별 학살로 1915년부터 3년 간 150만 명 가량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터키는 오스만튀르크 말의 혼란기에 오스만튀르크와 아르메니아 국민간의 충돌, 그리고 아르메니아 내부의 분쟁으로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며, 오스만튀르크에 의한 집단 학살은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오스만튀르크가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막고 있다.
2007년 10월 미국 하원이 오스만튀르크의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을 인정하는 “아르메니아 결의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터키는 막대한 로비 공세를 벌여 결의안 통과를 방해하기도 했다.

2009년 10월 10일 아르메니아와 터키는 근 100년 가까이 반목해 온 적대관계를 깨고 국교를 수립하였으며 양국은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을 규명하기 위한 공동 조사단을 꾸리는데 합의했다.
(서진근 편저 192 UN 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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