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ra – Taj Mahal

11월 26, 2018

북인도 – 아그라(AGRA), 타지마할



2001년 1월 1일
아침에 아그라를 향해 출발했다.
자이푸르에서 버스로 6-7시간 걸린다.

자이푸르에서 아그라에 도착하기 전에 파테푸르 시크리(승리의 도시)가 있다.
아그라에 도착하기 전에 아그라 성남 서쪽 35km 지점에 있는 파테푸르 시크리에 들렀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성벽과 건물들은 웅장하다.
이곳으로 옮기면 아들을 낳는다는 예언자의 말에 따라 1574년 수도를 아그라에서 옮겨와 아들을 낳았으나, 식수 부족으로 겨우 14년간 수도로 사용하다가 아그라 성으로 돌아갔다.

파테푸르 시크리(승리의 도시)는 사람의 발길을 뜸해졌지만, 아직도 옛 영광을 간직한 채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힌두와 이슬람, 불교와 자이나교를 포용한 정책을 폈던 흔적이 이채롭다.
이 성채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파테푸르그 시크리를 보고 아그라 성으로 갔다.

아그라는 기원전 3세기경 Agrabana라는 이름으로 도시가 형성되었고, Agra Fort는 무굴제국의 3대 황제 악바르 대제가 야무나 강 변에 1565년에 건설했다.
1638년 5대 황제 샤 자한이 수도를 델리로 옮길 때까지 무굴제국의 수도였다.
야무나 강 변에 우뚝 솟은 붉은 사암으로 쌓은 웅장한 성채는 깊은 해자로 둘러 싸여있다.
성 남쪽 아마르 성문을 들어서면 궁전과 모스크가 늘어서 있고 접견실들이 있다.
야무나 강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인상적이며 멀리 타지 마할이 물안개 속에 희미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 성채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1월 2일
아그라에는 타지 마할이 있다.
무굴제국 5대 황제 샤 자한이 15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사랑하는 왕비 아르주만드 바누 베가무를 위해 만든 묘지다.
흰 대리석으로 지은 이 마할(궁전)을 타지 마할이라고 부른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리고 있는 이 건축물은 건축광 샤 자한이 국력을 기울여 세운 기념비적 걸작으로 인류가 지상에 남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른 아침 타지마할로 갔다.
안개가 짙게 깔린 매표소 앞에 도착하니 비데오카메라는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단다.
낭패다.
다른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길게 뻗은 분수대 끝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타지마할이 희미하게 보인다.
겨울이라서 물안개가 피어올라 이른 아침에는 언제나 시야가 좋지 않단다.
사진기가 있어도 사진이 제대로 나올 것 같지 않다.
타지마할은 정말 대단한 예술품이다.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낙타행렬
 아그라로 가는 도중 만난 낙타들.

13세에 등극한 악바르 대제는 결혼 후 13년이 지나도 아들을 얻지 못하자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파테푸르 시크리에 은거하고 있던 성자 샤이크 살림 치스티를 찾아가 도움을 받은 후 아들을 낳자 그를 위해 파테푸르 시크리 성을 건설하고 수도를 아그라에서 이전했다.
그러나 물이 부족해서 14년간 있다가 아그라 성으로 되돌아 갔다



파테푸르 시크리 城의 접견실
 성문을 들어서며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



접견실 중앙의 기둥
 악바르 대제는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종교 간 화합을 정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홀 중앙에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조로아스터교를 상징하는 문양을 조각했다.



이슬람교 문양

힌두교 문양

불교 문양

조로아스터교 문양

기둥 상단 조각

사무실
 재무와 세무를 관장하는 부서가 있던 곳이란다.



사무실 입구

5층 누대

왕궁과 누대

왕궁 앞 좌대

건물 群

왕궁

왕궁 입구 조각

왕궁

궁전 앞 화분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은 왕비는 궁전 앞 화분에 꽃을 심고 아들이 잘 자라도록 기원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여 꽃을 키웠단다.



아그라 城
 붉은 사암으로 쌓아올린 아그라 성의 웅장한 모습.




성벽


외성 문을 들어서며

내성 문


내성 성벽


건물 기둥 조각과 원숭이
 아그라 성에는 원숭이가 많다.



왕궁

안으로

디와니암
 1628년 많은 기둥으로 건축한 접견실 디와니암(Diwan-i-Am)




아름다운 모스크

디와니암과 모스크

별궁과 수중 좌대

별궁
 길게 연결된 대리석 건물에 방들이 여럿인 별궁이다.




별궁

인도 학생들


별궁의 기둥 조각


이슬람 양식의 문양으로 대리석에 아름답게 조각했다.





투각 창살
 대리석을 쪼아서 창살을 만들어 채광을 했다.



실내분수

성벽
 야무나 강 절벽을 이용해 쌓은 아그라 성벽.
성벽의 총 길이가 2.5km.란다.





야무나 강 절벽을 이용해 쌓은 아그라 성벽.
넓은 해자가 성벽을 둘러싸고 있다.




아그라 성의 첨탑


회랑 기둥에 기대어 야무나 강을 바라보면 타지 마할이 보인다.
한 관광객이 하염없이 바라보는 방향이다.
짙은 안개로 타지마할은 보이지 않고……

아그라 城은 악바르 대제 때 지었으나 그 아들 자항기르 황제 때 증 개축했고, 5대 황제 샤 자한이 보완해서 지금의 위용과 아름다운 건축물로 완성했다.

야무나 강 변에 인류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타지 마할이 있다.
붉은 사암으로 만든 웅장한 정문을 들어서면 가로 300m 세로 580m의 부지에 긴 분수와 첨탑이 늘어선 정원 끝에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타지 마할은 말 그대로 궁전이다.
사람이 살거나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세운 궁전이 아니라 샤 자한이 사랑하는 아내의 묘지로 건설한 것이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건축물은 꿈의 궁정처럼 아름답다.

샤 자한은 19년 동안 함께한 사랑하는 아내가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자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 국력을 기울여 22년간 묘지를 건설했다.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1,000여 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했고 인도와 페르시아의 장인들을 위시해서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장인들을 데려와 공사했다.
재원 조달을 위해 통행세를 여러 번 징수했단다.
뭄타즈 마할은 페르시아 여자로 원명은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인데 여러 명의 왕비와 살고 있으면서도 샤 자한은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을 “용모와 성격에서 모든 여성들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 말하고 그녀에게 뭄타즈 마할, 즉 ‘황궁의 보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타지 마할을 지키던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는 형제들과의 왕위계승 싸움에서 승리하고 황제에 오른 후 아버지 샤 자한을 아그라 성에 유페시켰다.
샤 자한은 유폐된 탑에서 타지 마할을 바라보면서 여생을 마쳤다.

안개 자욱한 공원의 긴 분수대를 지나 마할에 도착해서 계단을 올라 묘역을 둘러보았다.
대단히 매끈하고 정교한 조각들이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내부에서는 일체의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하 타지마할 사진은 외부에서 빌려 온 것을 싣는다.






이른 아침 타지 마할을 관광하고 카주라호로 가기 위해 아그라 기차역으로 갔다.
3시간 이상 연착으로 기차역에서 지루한 기다림을 겪었다.



아그라 역

기다리는 사람들

발가락 반지

방한복을 입은 사람

방한복을 입은 사람의 신발
 위는 따뜻하게 발은 시원하게?



구두 닦는 사람

철길안의 소



간이 식당




<무굴제국>

무굴제국(Mughul Empire)은 1526년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가 지금의 인도 지역에 건설한 이슬람 국가이다.
무굴이란 몽골을 가리키는 말로, 튀루크계 몽골 족장인 바부르는 한때 티무르의 땅이었던 북부 인도를 되찾으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바부르는 여러 번의 전투 끝에 1526년 델리 근교의 파니파트 전투에서 인도지역의 마지막 술탄이었던 아브라힘을 물리치고 인도에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제국을 대제국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제3대 황제인 악바르라고 할 수 있다.
악바르는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책략가로 1605년 그가 죽을 때 무굴제국은 데칸 고원과 벵골 만 ,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대제국이 되었다.
또한, 악바르는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힌두교도를 회유하지 못한다면 무굴 제국이 인도를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력한 힌두교 부족에서 부인을 맞이하고 힌두교 인에 대한 차별적인 세금을 철폐하는 등 힌두교 유화정책을 폈다.
악바르는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융합시켜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어냈다.

무굴제국 제5대 황제인 샤자한은 젊은 나이에 사망한 부인 뭄타즈 마할을 위해 타지마할을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타지마할은 전성기 무굴 제국의 부를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샤자한의 뒤를 이은 아우랑제브 황제는 데칸 고원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때 제국의 영토는 최대를 기록했으나, 아우랑제브는 전 인도의 이슬람화를 추진하여 각지에서 힌두교 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무굴제국은 빠르게 쇠퇴했으며,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이 인도에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다.
1858년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샤가 영국에 의해 추방되면서 무굴제국은 멸망했다.
(서진근 편저 UN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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