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uhuashan

11월 15, 2018

中國南方文化探訪 (15) – 九華山 = 地藏菩薩



2008년 4월 11일(금)  비

地藏菩薩을 만나 뵈려고 주화산(九華山)을 찾아간다.
九華山은 오대산, 아미산, 보타산과 더불어 중국의 4대불 산의 하나이다.

부슬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지만 오늘은 구화산 까지만 가면 된다.
지도를 보니 銅陵까지 가서 구화산행 버스로 갈아타야 할 것 같아서 어제 동릉 가는 표(86위안)를 사 두었다.

09시 20분에 버스가 출발했다.
4시간 남짓 갔는데 기사가 구화 산을 갈려면 도중에 池州에서 갈아타란다.
13시 40분, 지주에 도착하니 바로 구화산행 버스가 연결된다.
겨우 43km. 40분만에 구화산 입구에 도착했다.

14시 20분, 버스에서 내면서 바로 구화산 경내 입장권을 사야 한단다.
1인 70위안. 60세 이상 할인 50%.
버스터미널의 출구가 바로 구화산 경내 입구다.

새로지은 호텔이며 상가가 늘어서 있는데 관광객은 보이지 않는다.
호텔 삐끼들 몇 명뿐이다.
터미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새로 지은 깨끗한 호텔 樂遊小樓에 짐을 풀었다. 150위안.

부슬비는 계속 내린다.
15시에 늦은 점심을 먹고 호텔에서 쉬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深山幽谷에서 들려 오는 개구리 소리가 정겨운 밤이다.



4월 12일(토) 흐림

08시, 셔틀버스를 타고 17분 걸려서 구화 마을(?)로 올라갔다.
요금은 입장료에 포함되었다.

구화 산에는 82개의 사찰과 6,000여 개의 불상, 300여 명의 비구와 비구니가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입구에 있는 祈願禪寺와 김교각 스님이 창건한 구화 산 최초의 사찰 化城寺 그리고 김지장(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모시고 있는 月身寶殿이 가장 중요한 古 刹들이다.

안개가 몹시 심하다.
차에서 내려 조금 올라가면서 맨 처음 들러 볼 곳이 祇園禪寺.
구화 산을 들어서면서 바로 왼쪽에 있다.
그 앞에 섰는데도 짙은 안개로 정문이 보이지 않는다.
祈園寺는 明代(1522-1566)에 지어진 구화산 최대의 사찰로 山門과 천왕전, 대웅보전, 불상 등 유물들이 제대로 보전되어 있다고 한다.
구화산 모든 사찰을 총괄하는 방장이 머무는 곳이란다.

들어가 보니 여러 곳에서 모인 스님들이 큰 행사를 하는 모양이다.
법당에 많은 스님이 모여 독경을 한다.
경내에는 향 타는 연기가 안개와 섞여 객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祈願禪寺
 구화 산 최대의 사찰이며 구화 산 전체 사찰을 총괄하는 방장 스님의 거쳐다.


기원사 입구

法堂


기원하는 사람들

기원 사에서 나와 조금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化城寺가 나온다.
절 앞에 放生 池가 있다.

化城寺는 김교각 스님이 구화 산에 들어와 최초로 지은 사찰인데 지금은 九華山歷史文物館으로 지정되어 별도의 입장료를 받는다.

수많은 사찰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大山門이 나오는데 이곳으로 들어가면 육신보전(月身寶殿)에 이른다.

김교각 스님은 695년 7월 15일 신라 성덕대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21세 때인 716년 당나라에 유학해서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高僧大德을 찾아 불법의 깊은 뜻을 깨닫고 귀국했다.
고국에 돌아온 김교각은 왕실의 권력다툼을 보고 24세 되던 해에 불법으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誓願을 하고 출가했다.

다시 당나라로 건너갈 때 삽살개 한 마리와 황립도라는 볍씨, 금지차라는 차 종자, 신라 송이라는 잣 열매와 조 씨앗을 가지고 구화 산으로 들어가 수행에 전념하는 중 이에 감명받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구화산 최초의 절 화성사를 건립하였다.

김교각 스님에 관하여는 구화산지 “서장문화” 등 300종에 가까운 중국 문헌에 소개되고 있다.




九華山歷史文物觀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하고 별도의 입장료를 받는다.



金地藏스님이 당나라 때인 781년에 세운 구화 산 최초의 사찰.
지금은 역사문물 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화성사 소개문


境內

대웅정
그 후 제자들과 농사를 지어가며 열심히 수행하니 설법을 듣기 위하여 각처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지장스님의 명성이 신라에까지 전해져 소우, 소보라는 김교각의 숙부와 모친이 바다를 건너 구화 산을 찾았다. 신라의 승려들도 찾아와 지장의 설법을 들었단다.

794년(음) 7월 30일, 99세를 맞이하여 유언 법문을 남기고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하였다.

가부좌한 채로 돌아가신 지장보살의 육신을 당시의 관례대로 옹기에 넣어 3년을 보관한 후 열어보니 얼굴빛이 생전과 다름없었다.

제자들이 스님의 육신에 금분을 입히고 等身佛을 만들어 탑에 모셔 받드니 지금의 육신 보전이다.

이 육신 보전은 唐의 眞元10년(794년)에 건축되어 여러 차례의 修築을 거쳐 현재의 건물은 塔殿式으로 되어 있다.

明 나라 신종황제는 “護國肉身寶殿”이라는 이름을 등신불을 모신 사찰에 하사했다.



육신 보전 경내로 들어가는 문.



行願無盡이라 쓰여 있다.

기둥에는 지장스님의 誓願인 “地獄未空誓不成佛(지옥이 텅 비기 전에는 절대 성불하지 않겠다.)”라는 글이 써 있다.


地藏禪寺
여기서부터 정상의 육신 보전 까지는 상당히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호국 육신 보전(護國月身寶殿) 전경

육신 보전

호국 육신 보전 소개문

육신 보전 안의 세 불상
 지장스님의 등신불은 세 부처님 뒤에 있는 7층 8면식 목탑 안에 모셔져 있다.



木塔



鐘塔

종탑 처마 밑 조각


茶 詩碑
 지장스님이 데리고 있던 동자를 떠나 보내며 지었다는 茶 詩를 새긴 碑.

地藏스님이 전하고자 한 思想은 未來의 부처, 미륵불이 현생 하기 전까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었다.
김교각 자신이 평생을 중생 교화에 바쳤고 입적할 때의 誓願도
“地獄未空誓不成佛”이라 했다.
김교각은 우리 조상이지만 중국 불교 신자들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다.
구화산에는 엄청난 규모의 새로운 사찰들이 계속 지어지고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엄숙함 보다는 규모 면에서 또 치장하는 형태로 보아 완전히 관광객용으로 짓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다른 사원의 부처님과 장식물들







구화산을 돌아내려 오니 12시다.
合肥行 버스표(75위란)를 확보하고 점심 후 마을 구경을 나섰다.
새로 개발한 호텔지구에서 5분 정도 들어가니 옛 마을이 나오고 그 주변 대로변이 모두 여관 촌, 식당 촌이다.

관광버스 수십 대가 그 지역에 몰려 있다.
신개발지구가 조금 비싸니 관광회사에서는 좀 더 싼 옛날 여관 촌으로 손님을 데려가는가 보다.

호텔 촌 부근에 김지장스님이 99세에 입적한 것을 기념하여 99m 높이의 동상(석상?)을 크레인을 동원하여 건립하고 있다. 또 하나의 관광자원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저녁은 슈퍼마켓에서 만두, 새우, 완두콩 옥수수 등 재료를 사서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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