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many – Bon – Koln

11월 16, 2018

스칸디나비아 4국과 베네룩스 3국을 25일간 둘러보고 이제 독일로 들어간다.

우선 라인 강 유람선을 타기 위해 가는 길에 독일 분단 시 수도였던 Bon을 들러서 바로 이웃한 독일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며 고대도시 Ko”ln으로 갔다.
2008년 7월 20일(일)

08시24분, 룩셈부르그 역을 출발해서 독일의 Bon으로…
10시에 독일의 Mozel 역 통과,
10시35분 Koblenz 역 통과하여
11시 20분 Bon에 도착했다.

Bon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9년 분단된 독일의 수도가 되어40여년간 임시수도이었으면서 인구 31만명의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1990년 동서독 통일 후 수도는 분할 이전의 수도였던 베를린으로 다시 옮겼다.

베를린은 라인강 西岸의 조용한 도시다.
40여 년간 서독의 수도였지만 이렇다 할 빌딩군도 없다.
자그마한 시골 동네가 아데나워의 고향 부근인 덕분에 임시수도가 되어 40여 년이 되었으나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루며 세계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했고, “본”은 인구 31만 여명의 조용한 도시로 성장했을 뿐이다.

역에서 나와 “민스터 교회”와 “베토벤 생가와 박물관” 그리고 본 대학을 둘러봤다.


Bon 역전 광장
 한가한 시골역 분위기다.



분수대

민스터 교회

중앙광장과 시청사

거리 안내판

베토벤 생가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 관광객들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인솔자를따라왔다.
밖에서 몇 마디 설명을 듣고 생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는 떠나가 버린다.
입장료 5유로가 아까웠나?

시간과 돈을 쓰면서 이곳까지 와서 너무나 아쉽지 않은가!



베토벤 생가
 생가와 뒤채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악보와 악기 등 생활의 흔적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말년에 청각장애 증세에 적응하기 위해 증폭된 음향 판을 댄 마지막 피아노가 전시되어 있다.
(내부 촬영 금지)


베토벤 동상
 후원에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베토벤 생가를 나와 걸어서 본 대학으로 갔다
본관 뒤에는 널은 잔디밭과 그 끝에 정원이 있다.
본 대학은 칼 마르크스와 하이네의 모교다.



본 대학
 칼 마르크스와 하이네의 모교



대학 뒤편 정원과 부속건믈
 조용하고 한가로운 풍경이다.
한참을 벤치에 앉아 점심도 먹고 분위기도 즐기며 쉬었다.








점심 후 기차로 쾰른으로 갔다.
14시30분, Ko”ln에 도착했다.
역에서 Old Town 쪽으로 나오니 왼쪽으로 웅장한 쾰른 대성당이 보인다.
역에서 나와 직진해서 첫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가다가 힐튼호텔 맞은편에 Hostel Backpacker에 짐을 풀었다. 1인 19유로.

쾰른은 로마의 영토였다.

‘쾰른’이란 지명은 식민지를 의미하는 라틴 어 콜로니아(colonia)에서 유래되었다. BC 38년에 마을이 서고 AD 50년경 로마의 도시로 인정받으면서 성장했다.

1248년에서 1880년까지 약 280년의 공사 중단 기간을 포함해 약 600년에 걸쳐 지어진 쾰른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성 베드로와 마리아 대성당이며 독일 쾰른의 로마 카톨릭 교회이다.

1996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정면에서 보이는 뾰족하게 솟은 두개의 첨탑으로 잘 알려진 쾰른 대성당의 높이는 157m로 독일 울름의 뮌스터교회에 이어 독일에서 두번째로 높은 교회이며 세계에서는 세번째로 높은 교회이다.
759년 카롤 대제가 대주교구를 설치하였고 한자동맹에 가담하여 발전했다.
지금은 水運, 고속도로, 철도 등 교통의 중심로 인구 100여만 명이며 독일에서 4번째로 큰 도시다.

쾰른 대성당으로 갔다.
1248년에 짓기 시작해서 1560년부터 1842년까지 278년간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80년에 준공했다.
350여 년 동안 지은 고딕양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은 157m의 쌍 탑과 함께 보는 이를 압도한다.



쾰른 대성당(Dom)






金棺
 1150년-1210년 사이 3분의 성인을 모신 관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동방박사 세명의 유해가 간직되어 있다고 전해지는 성유물함(聖遺物函)



기도소


스테인드글라스



지하묘지

성당 지하墓域의 바닥 모자이크

地下聖所

거리의 악사 – 박물관 앞에서

성당 바로 옆에는 Romisch-Germanisches Museum이 있다.
쾰른과 라인 강 주변에서 발굴한 로마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로마시대 독일의 Colone(Ko”ln), Bonne(Bon), Koblenz는 로마군의 캠프였다.



Romisch-Germanisches Museum


쾰른은 BC 38년에 로마가 세운 마을이다.
AD 50년경 로마 도시로 인정하면서 성장했다.

쾰른 주변과 라인 강 변에는 로마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된다.
이들을 전시하고 있다.



로마 유물들









몇 블록 떨어져서 St. Cecila 교회에 있는 Schunuetgen Museum에 교회보물들이 있다기에 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St. Aposteln(12사도 교회)에 들렀다.

12사도 교회 근처 로터리에 옛 로마성벽 일부였던 유적이 잘 보존되고 있다.


길모퉁이에서 만난 로마시대 성곽 유적

대로변 조형물
 바로 근처 Dumont Carff 건물 2층에 있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Buffet Chang에서 저녁을 먹었다.

독일인들을 주로 상대하다 보니 퓨전 음식이 되었지만 아쉬운 대로 한국 음식 맛을 보았다.(1인 7.9유로)



韓國人이 운영하는 뷔페식당.

Bon(?)에도 같은 식당이 있는데 장사가 잘된단다.
한국 전통 실내장식으로 분위기를 잘 만들었다.
음식은 주 고객이 외국인이므로 퓨전음식이 많으나 그런대로 한국 음식 맛을 보고 나왔다.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사업을 하시는 분이다.






요즘 한식의 국제화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순수한 한식만을 가지고 대중식당을 운영한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나라에서 성공하고 있는 한국식당의 경험을 참고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외국에 나가서 한식당을 하시는 분들은 현지 한국인이나 한국 여행객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경우가 많아서 현지화에 성공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식당 옆 (i)에서 라인 강 유람선 일정표 확보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신성로마제국과 가노사의 굴욕>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은 오토 1세가 황제로 임명된 962년부터 프란츠 2세가 제위(帝位)에서 물러난 1806년까지 존속했던 현재 독일 영토에 있던 제국의 이름이다.

로마제국의 멸망 후 프랑크 왕국의 칼 대제(샤를마뉴)는 서유럽을 통일하고 이탈리아 롬바르트족의 공격으로부터 교황을 보호하여 800년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冠)을 받았다.
이때부터 유럽인들 에게는 “고대 로마를 계승한 새로운 로마제국”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칼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서 프랑크, 중 프랑크, 동 푸랑크로 분열되어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의 기반이 되었다.

그 중 중프랑크는 일찍 쇠락해졌으며, 칼 대제의 혈통이 단절되자 동프랑크(독일) 작센왕조의 오토 1세가 나타나 독일지역을 안정시키고 교회를 보호하는 한편, 교황을 괴롭히던 이탈리아 귀족들을 토벌하여 962년 교황이 주관한 대관식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 당시 독일은 여러 개의 작은 나라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7명으로 된 선거인단(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와 보헤미아, 작센, 팔츠, 브란덴부르크의 제후)에 의해 선출된 독일 왕을 교황이 추대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황제와 교황은 협력하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다.

가장 격렬한 대립은 1076 – 1122년 일어난 “서임권 논쟁”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이전까지 황제가 가지고 있었던 성직자 임명권을 되찾아 오려고 하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폐위시키며 맞섰다.

이에 교황은 황제를 파문(破門)시켰고 황제를 지지하던 제후들과 성직자들이 모두 교황 편으로 돌아서자 위기를 느낀 황제는 1077년 북(北)이탈리아의 카노사에 머물고 있던 교황을 찾아갔다.

하인리히 4세는 성 밖의 눈밭에서 3일간 굴욕적으로 빌어 사면을 받았다.
이 사건을 “가노사의 굴욕”이라고 한다.

사임권 논쟁은 결국 당사자인 두 사람이 죽은 후 1122년 성직자 임명은 교황이 하고, 토지와 세속적 권리는 황제가 갖는다는 “보름스 협약”이 맺어지면서 일단락되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은 꾸준히 세력을 키웠으나, 1256 – 1273년에는 전통 황제가 없는 혼란스러운 대공위시대가 있었다.

그 이후 제위(帝位)는 독일 제후의 각가(各家)를 전전하게 되었고, 1438년부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제위를 계승하는 합스부르크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합스부르크가에 의해 이어졌으나, 1806년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에 의해 황제의 호칭을 박탈당했다.

또한, 16명의 제국 제후가 라인동맹을 조직하여 제국에서 분리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은 소멸하고 말았다.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츠 2세는 이후 단순히 오스트리아의 지배자(황제)로만 남게 되었다.
(서진근 편저 UN 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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