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nmark – Copenhagen – Odense
11월 16, 2018덴마크 – Copenhagen, Odense
2008년 7월 12일(토)
스웨덴의 남쪽 항구도시 Malmo”에서 13시 21분 기차를 타고
14시 05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코펜하겐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크고(인구 150만) 활기찬 도시다.
1167년에 세워진 이 도시는 15세기 초반에 덴마크의 수도가 되었다.
덴마크는 독일과 연결된 유틀란트 반도에 위치하며,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광범위한 사회복지제도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덴마크의 국토녹화사업은 덴마크를 세계적인 낙농업국으로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역에 도착해서 내일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행 야간 기차표를 확보하려니까 좌석이 다 찼다
.
하루 늦춰서 모레 좌석을 확보하고 (i)에서 소개하는 Publick Hostel로 갔다. 1베드에 kr150.
분위기도 좋다.
기차역 (i)에서 소개한 Pblick Hostel에서 여행객을 맞는 기타 맨.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7월 13일(일)
덴마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城 Egeskov(이에스코우)를 보러 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안데르센의 고향인 오덴세에서 기차를 갈아 타야한다.
08시 30분, Esbyer행 기차를 타고 10시 35분에 Odense에서 지방선으로 갈아탔다.
발음이 어려운 Kvaemdrup역에서 내렸다.
인적없는 시골역이다.
내린 사람은 우리 두 사람과 젊은이 두 사람 뿐이다.
우리와 함께 온 두 사람들을 기다리는 현지 젊은이에게 城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걸어가면 30분 쯤 걸린단다.
대중교통은 없다길래 걸어가자고 나서니 자기기 데려다 주겠단다.
동료들을 기다리게 해 놓고는 우리를 승용차에 태우고 성 입구까지 간다.
자동차로는 10분도 않되는 거리지만 너무 고맙다.
호수와 꽃밭, 잔디 밭이 펼처진 호수가에 아름다운 城(Slot)이 서 있다.
城에 들어서면 전체가 박물관이다.
2층의 거실과 수집품들, 3층의 수집품들은 이 성채 주인의 성품과 취미를 그대로 나타내 준다.
중세 기사복장과 무기들, 사냥한 동물들의 박제, 세계에서 수집한 수많은 수집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특히나 미니어쳐로 만들어 놓은 생활관은 너무 정교해서 감탄을 자아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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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城이라는 Egescov Slot(이에스코우 城) |
작은 호수 한가운데 지어져 들어 올릴 수 있는 다리를 갖추고 있다.
이 城의 城主의 趣向을 알수 있는 다양한 수집품들이 가족 단위로 이곳을 찾아 오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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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에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있는 관람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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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기사 복장과 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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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실의 城主 夫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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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실에서 내려다 본 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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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냥한 수확물 박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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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人國 거실 |
실물크기의 수십분의 1로 축소해서 완벽한 생활 모습을 구성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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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빼곡하게 글씨를 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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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하는 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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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집품 전시실 |
드넓은 잔디밭에는 수집품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여럿 있다.
중세 마차들, 자전거로 시작해서 모터싸이클까지, 고전적인 자동차에서 현대 자동차까지, 비행기들 까지 다양한 수집품들이 상당한 규모로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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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차 |
잔디공원에 별도로 건물을 지어 전시실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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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터싸이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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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 |
대중교통은 없고 셔틀버스는 3-4시에 출발한단다.
그냥 걸었다.
빈 버스가 지나간다.
손을드니 세워준다.
기차역 까지 돈도 안 받고 태워다 준다.
선진국 일수록 관광산업에 힘을 쏟고 있다.
이런것이 관광객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준다.
너무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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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밭 |
14시 05분 오덴세에 도착했다.
오덴세는 덴마크에서 3번째로 큰 도시다.
대학이 있는 도시로 교회와 공원이 많은 아름다운 조용한 도시다.
이 도시는 안데르센의 고향이라는 것을 크게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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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dense 역 앞 조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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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dense 시청 앞 광장의 안데르센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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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덴세 시청 광장의 조형물 |
교회들이 늘어선 거리를 걷다 보면 Odense Dom Church 인 Knud교회가 나온다.
교회 왼쪽으로 개울을 끼고 안델센 공원이 있고 교회를 지나쳐 가다가 첫번째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안데르센이 14살까지 살던 집이 있다.
지금은 안데르센 뮤지엄.
살던 집 옆으로난 안델센 박물관 정문으로 들어가면 잔디밭과 호수가에 동화에 나오는 예쁜 집이 있다.
이 곳에서 하루 몇 차례 씩 안데르센 동화가 실연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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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nud대왕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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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데르센 공원의 안데르센 동상과 Odense Dom Chur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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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안 성단의 성화(木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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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데르센이 살던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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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실에 유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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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데르센 아버지 유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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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데르센 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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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데르센 뮤지엄의 동화의 궁전 |
이 곳에서는 하루 두차례 안데르센 동화를 연극으로 보여준다.
16시 22분, 오덴세를 출발해서 16시 44분 코펜하겐역에 도착.
시청과 스칼라좌를 둘러보고 호스텔로 돌아 왔다.
7월 14일(월)
Kopenhagen에 오면 모두가 보러가는 인어공주 동상을 보러 호스텔을 나섰다.
08시20분 호스텔을 나와 26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내려 우측으로 돌아 해변으로 나가면 해변을 따라 여러개의 동상들이 있다.
우리가 들어선 해변에서 세번째 만난 것이 인어공주 동상이다.
중국인 관광객들 여럿이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부산하다.
인어공주 동상은 조각가 “에릭센”이 안데르센 동화를 읽고 영감을 얻어 자기 부인을 모델로 해서 1953년에 제작했단다.
무슨 연유에선지 팔이 잘려나가고, 페인트 세례도 받고, 폭파되어 바다속에 던져지기도 했단다.
인어공주의 조각을 보고서는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다는 얘기들을 한다.
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조각이 너무 왜소해 보여 실망했을까?
그러나 실물을 묘사한 조각들은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한 실물크기로 제작하는 것이 통례다.
조각상의 어두운 표정에 실망감을 느꼈을까?
아름다운 인어공주가 화사한 표정으로 관광객을 맞이할 것을 기대했다가 만나 보니 너무 쓸쓸한 표정이 마음을 무겁게해서 실망했을까?
인어공주는 비련의 공주요 허무한 죽음을 선택한 비운의 공주였다.
그러니 작가가 밝은 표정의 인어공주상을 만들 수는 없지 않았을까?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동상은 귀여움을 못 받는것 같다.
인어공주의 삶이 기구해서 사랑스런 모습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는지 표정이 아주 쓸쓸하다.
해변을 따라 한참 내려 가면 자그마한 교회 앞에 힘이 용솟음치는 “게피온” 분수가 보인다.
아릿다운 여인이 네마리 황소의 고삐를 거머쥐고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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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피온 분수 |
“게피온”은 북유럽의 여신이란다.
수웨덴 왕과 내기를 걸어 하루에 갈아 엎는 땅을 모두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어와 네 아들을 황소로 변신시켜 혼신의 힘으로 땅을 갈아 얻은 것이 지금 코펜하겐이 자리잡은 셀란섬이라나…….
어쨌든 신화니까.
그러나 아들들을 힘차게 내려치는 채찍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나의 그런 느낌은 아마도 문화의 차이 일게다.
교회 뒤편에 있는 전쟁기념공원(처칠공원)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 아말리엔보르그 궁전으로 갔다.1
1794년 이래 왕족이 거주하는 왕궁이다.
중앙 광장의 기마상을 중심으로 4면에 저택이 둘러서 있다.
광장 우측으로 둥근지붕의 프레데릭 교회를 지나 왕립 공원과 그 안에있는 로젠보르궁전을 들렀다.
공원에서 나와 구시가지 골목 모퉁이에 있는 원형탑 Runertaorn(1642년에 세운 유럽 最古의 천문대)을 보고 Vor Frue Kirke(Bertel Thorvaldsen의 작품 그리스도와 12사도상)를 들렀다.
1.2km에 이르는 보행자도로는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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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malienborg 궁전 광장 |
일부만 공개한다.
아말리엔브로 광장에서 올드타운 쪽으로 프레데릭스 교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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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uneortao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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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r Fure Kirke(12사도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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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와 열두제자 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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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단 |
콩게니스 광장과 크리스티안보르 궁전, 1673년에 완공한 항구 Nyhaun. 항구 양안에는 안델센이 살던 집들 등등을 돌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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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enhagen 시청 광장의 놀이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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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없는 거리에서 |
170cm인 내가 옆에 서보니…….
Rosenborg Slot은 17세기 크리시티안 4세가 세운 네델란드 르네상스 스타일의 성이다.
왕궁공원 한쪽에 서 있다.
로젠보르그 城에는 수집해 놓은 보석들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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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yhaun 운하 |
운하 양안에는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번창한 이 도시 상인들의 특색있는 집들이 늘어서 있고 안데르센은 이 부근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했고 그가 살던 집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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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하옆의 빌딩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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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하 옆에 서있는 생선을 든 아주머니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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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심을 휘도는 운하는 보트관광 코스다 |
돌아 볼 곳이 너무 많다.
역사적인 현장을 찬찬히 둘러보고 거리의 분위기를 느껴 볼려면 여러 날 돌아 다녀야 되겠다.
그러나 이만하고 떠나야 한다.
18시 53분, 코펜하겐역을 출발해서 암스텔담으로…..
면적 : 43,094km2.
인구 : 약 554만명 (2012년)
종족구성 : 스칸디나비아인, 에스키모인, 독일인.
종교 : 복음루터교 95%, 가톨릭 및 기독교 3%, 이슬람교 2%
언어 : 덴마크어
화폐 : 덴마크 크로네(1$ : 4.97Dkr)
1인당 GDP: 63,003$(2011년)
덴마크는,
9세기 후반 바이킹 부족의 지도자 Hardegon이 Jutrand(유틀란드) 반도를 정복했다.
그 아들 Gorm은 10세기 초에 유럽 최초의 왕국을 세웠다.
이 후 영국을 침략하고 노르웨이를 거느리고 발틱해 연안을 정복해서 북구의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1536년 종교개혁으로 인한 내전에서 개혁파가 승리하여 전제 군주가 이끄는 덴마크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덴마크의 전성기는 크리스티안4세 재위기간(1588-1648) 중 지속되었다.
그러나 1625년 스웨덴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30년 전쟁에 참여했으나 1658년 스웨덴에 패하여 스코네와 스웨덴 본토에 있던 영토를 잃었다.
1848년에는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1849년에 헌법이 채택 되었다.
선거에 의한 의회가 성립되고 프레데릭 7세가 대부분의 정치권력을 포기하고 최초의 입헌군주가 국가가 되었다.
1-2차 대전 때 중립을 지켰으나 2차대전 때는 독일의 침공으로 점령 당했다.
그러나 戰火는 크게 입지 않아 온전히 살아 남았다.
코펜하겐은 덴마크 영토의 동남부 끝으로 치우처진 위치에 있다.
국토의 크기에 바하면 위치가 너무 외지다.
그러나 덴마크는 이 수도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발틱해 연안을 경영했다.
수도의 위치가 의미하는 바가 크다.
*.Hans Cristian Andersen.
코펜하겐 근처 오덴세 출생.
가난한 양화점의 아들로 아버지는 문학을 좋아하여 어린 아들에게 《아라비안 나이트》나 극작가 호르베아의 작품 등을 들려주었으며, 어머니는 루터교의 신앙을 교육하였다.
15세 때 배우가 되려고 코펜하겐으로 갔으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당시 극장장인 요나스콜린의 도움으로 슬라겔세와 헬싱고르의 라틴어 학교에서 공부하고, 마침내 코펜하겐의 대학을 졸업하였다.
1833년 이탈리아 여행의 인상과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소설 《즉흥시인 Improvisatoren》(1835)이 독일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그의 문명이 유럽 전체에 퍼졌다.
같은 해에 내놓은 최초의 《동화집》은 동화작가로서의 생애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 후 동화 창작은 1870년경까지 계속하여 모두 130편 이상에 달한다.
《인어 공주》 《미운 오리새끼》 《벌거숭이 임금님》 등 아동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수많은 걸작 동화를 남겼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대부분의 생애를 해외여행으로 보냈다.
《즉흥시인》에 이어 내놓은 《가난한 바이올리니스트 Kun en Spillemand》(1837) 《그림 없는 그림책 Billedbog uden Billeder》(1840)은 그의 많은 작품 중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으로 널리 애독되는 명작들이다.
1846년 안데르센은 독일어판 전집을 내기 위하여 자서전 《나의 생애 이야기》를 썼으며,
1855년에 증보하여 상하 2권으로 완성하였는데,
자전문학사상(自傳文學史上)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867년에는 고향 오덴세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어 전국민의 축하를 받았다.
1870년대 초부터 건강이 나빠져 즐기던 여행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1875년 8월 친구인 멜피얼가(家)의 별장에서 죽었다.
그의 장례일에는 덴마크 전국민이 복상(服喪)하였고, 국왕 ·왕비도 장례에 참석하였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두산백과에서)
<그린란드가 덴마크의 영토가 되기까지>
그린란드는 세계의 최대의 섬으로 약 218만km2이다.
이는 덴마크 본토 면적의 약 50배에 달하는 것이다.
그린란드에 최초로 진출한 유럽인은 노르민인 에리크로, 982년에 그린란드에 상륙해 “초록의 섬”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에리크는 탐험대를 결성하여 그린란드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린란드는 1261년 노르웨이의 지배를 받게 됐으나,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속령이 되면서 덴마크령이 되었다.
1721년 노르웨이의 선교사 한스 에게데(Hans Egede)가 덴마크의 허가를 받고 그린란드에 선교회 겸 무역회관을 세우면서 그린란드는 명실 공히 덴마크의 영향력 아래 들게 되었다.
당시 덴마크는 노르웨이와 그리란드를 포함하여 넗은 식민지를 가진 발트해의 강국이었다.
그러나 1814년 킬(Kiel)조약에 의해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도하면서 덴마크의 영토는 본토를 비롯해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로 축소되었다.
1905년 독립한 노르웨이는 그린란드의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나, 덴마크도 그린란드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린란드는 결국 1933년 국제사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덴마크의 영토로 확정됐다.
현재 덴마크의 해외 영토는 그린란드와 페로 제도이며, 본래 노르웨이령이었다가 덴마크에 속히게된 아이스란드는 1944년 6월 독립했다.
현제 그린란드는 식민지가 아니라 덴마크 본국의 일부로 되어있으며, 1949년 덴마크가 중립정책을 깨고 NATO에 가입하면서 그린란드에 미군기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린란드는 교육, 조세, 재판권 등의 분야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지만 덴마크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벌리고 있다.
(서진근 편저 UN회원국 다이제스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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