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gentina – Buenos Aires – Iguazu Falls
11월 29, 2018아르헨티나 – 부에노스아이레스, 이과수 폭포
2005년 3월 29일(화)
산띠아고에서 비행기로 아르헨띠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
아르헨띠나는 우리에게 탱고와 축구의 나라로 잘 기억되는 나라다.
남미에서 브라질 다음으로 큰 나라로 남북으로 길이가 3,700km나 되고, 우리나라와 정반대 쪽 남반부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4계절이 있는 기후를 갖고 있다.
아르헨띠나의 안데스 산맥의 남쪽 파타고니아 지역은 우리나라보다 7배나 넓은 대 평원지역이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내륙으로 부채꼴로 펼쳐진 중부의 팜파스지역은 광활한 초지와 비옥한 농토를 가지고 있어 세계 3대 곡창지대로 자연조건이 좋은 국가다.
1516년 에스파냐의 후안디아스 데 솔리스가 발견하여 식민지로 경영되어 오다가 1,816년 7월 9일 독립하였다. 19세기 말 영국자본이 유입되고 농축산물의 유럽 수출로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페론의 중 공업화 정책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이딸리아, 독일, 프랑스계 이민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로 말미암아 현재의 인구 구성도 이딸리아계 40%, 스페인계 30%, 기타 유럽계 25%로, 원주민 비율이 극히 낮고 메스띠소(백인과 원주민 혼혈)도 잘 보이지 않는다. 1-2차대전으로 유럽이 전쟁에 휘말려 있을 때 군수물자로 식량을 수출해서 한 때는 세계 6대 부국 반열에 들었던 나라이다.
그러나 중 공업화 정책으로 농, 축산업이 쇠퇴하여 수출이 감소하고, 분배 위주의 정책으로 그 많은 돈을 써버리고 2차산업국가 진입에도 실패해 했다.
2차대전 후 1,946년 Juan Dongo Peron이 국가사회주의를 내걸고 분배 위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흥청거렸으나 몇 년 못 가서 경제가 추락하여 지금도 후진국 대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라이다.
아르헨띠나 스테이크는 질과 양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우리 교민이 5만여 명 있었으나 경기가 계속 나빠지기 때문에 지금은 2만여 명으로 줄었단다.
거의 모두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고 있단다.
교민들의 90% 이상이 의류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단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7월 9일 도로는 폭이 140m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다.
중앙분리대의 폭도 30-40m로 녹지가 조성되어 공원 같은 분위기다.
그 대로변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는 지상 6층으로 세계 3대 극장 중 하나다.
지하에서 설치된 무대가 지상으로 올라오도록 설계되어 있단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는 도시 전체가 유럽풍이다.
중앙광장에서 뻗어 나간 방사형 도로와 건축물들은 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다.
그래서 이 도시를 남미의 파리라고 부른다.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와 자동차로 40여 분 거리에 있는 마드리드를 본떠 만든 여름 휴양지이며 주말 별장도시 St. E. Isidro, 그리고 아르헨띠나와 브라질, 파라과이 국경에 걸쳐있는 이과수 폭포를 볼 예정이다.
도착하자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관광하고, 변두리에 있는 Boca 지역으로 가서 탱고의 발상지를 찾아보고, 아르헨띠나 최고 명문 Boca Juniors Club의 축구장을 보고 저녁에는 탱고 쇼를 보면서 식사를 했다.
탱고는 이딸리아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 발상지란다.
지금은 관광코스에 들어 있어 기념품 가게가 모여 있는 거리로 변모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로 |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시발견 400주년 기념탑 |
부에노스아이레스 Centro(중앙광장)에서…..
남미의 파리라는 별칭을 받는 도시다.
싼 마르틴 광장의 기마상호세 데 산마르틴은 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다.
Boca Juniors 축구장 앞 광고판 |
Boca Juniors Club |
Boca Juniors Club |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각종 기념품을 팔고 트로피 등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Club은 1,905년에 이딸리아 이민자들이 창설했단다.
Barrio La Boca(보카 지역) |
이딸리아 이민자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지금은 모두 기념품 가게로 변모되었다.
이르헨띠나 탱고의 발상지.
Boca 지역의 길거리 탱고 |
번화가 빌딩 |
차 없는 거리 |
자동차 통행이 금지된 구역. 600여 개의 상점과 주점, 까페 등이 있다.
차 없는 거리의 저녁 |
초저녁 풍경 |
차 없는 거리에서 탱고를.
구경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수입이 월 us $1,500은 된단다.
극장식 식당 |
메뉴는 여러 가지 이었지만 단연 아르헨띠나 스테이크가 인기다.
과연 크다. 맛있다.
식사와 포도주는 무제한으로 준다.
사진은 촬영금지.
한 쌍씩 나와서 늘씬한 몸매와 춤솜씨를 자랑하고는 들어간다.
군무도 춘다.
절도 있고 현란한 스텝이다.
탱고를 출 때는 춤사위도 중요하지만, 표정이 더 중요하단다.
쇼 마지막에는 아르헨띠나 국기가 천정에서 서서히 내려오면서
나이 듬직한 바리톤 음색의 가수가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부르고
나중에 전 출연진이 합창하며 끝낸다.
아직도 서민들 사이에서는 페론에 대한 향수가 짙게 남아 있는 것 같다.
3월 30일(수)
오늘도 1일 투어를 신청했다.
멕시코, 콜롬비아, 볼리비아, 뻬루, 칠레, 우루과이, 한국 등 다국적 팀이다.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갔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 여름 휴양지이며 주말 별장지인 St. E. Isldro까지 예쁜 기차를 타고 갔다.
St. E. Isldro는 마드리드처럼 설계된 휴양(별장)도시란다.
고급주택 지역이다.
조용하고 깨끗하다.
옛 정취가 그대로 살아 있다.
버스로 돌아와서 Palermo 지구에서 40여 분간 라플라타(銀) 강을 실버크루즈를 하며 점심을 먹었다.
이 강변에는 위락시설이 되어 있고 잘 살 때는 거대한 카지노도 있었단다.
강변에는 양쪽으로 보트로 드나드는 별장들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폐가가 되어가고 있단다.
이시드로 가는 기차역으로 버스를타고…… |
이시드로 기차역 앞 |
역전 휴게소 |
보도블록 |
길가의 소공원 |
St. E. Isidro Museo 안내판 |
성경책 |
라플라타 강 선착장 출구 |
지금은 믾은 별장들이 폐가가 되었단다.
라플라타 강(실버리버) |
유원지 |
강가의 별장 |
3월 31일(목)
오늘은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간다.
이과수 폭포는 브라질, 아르헨띠나, 파라과이 3개국 국경을 통과한다.
우선 아르헨띠나 국내선으로 이과수 폭포 근접 도시로 가서 브라질로 넘어가 브라질 쪽 이과수를 보고 다시 아르헨띠나 쪽 이과수를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착하는 날 날씨가 좋지를 않아서 이과수 관광을 내일로 미루어 하루에 양쪽을 다 보기로 했다.
서 진근 회장님과 한 동기 회장님 부부, 윤 광열 사장님 부부는 버스를 타고 파라과이를 넘어갔다가 오셨다.
옛날처럼 경찰들의 감시가 철저하지 않아서 쉽게 다녀오셨단다.
우리 부부는 다운타운으로 버스를 타고 나가봤다.
국경에 작은 도시인데 거리를 걸어보니 느낌이 편치 않다.
환전만 하고 바로 돌아왔다.
4월 1일(금)
오전에 브라질 쪽 이과수를 갔다.
입장료와 셔틀버스비를 합쳐 1인 us $7이다.
계곡 사파리나 보트 타기(별도 요금)를 하려면 반나절 이상이 필요한데 어제 일기 관계로 못했기 때문에 폭포 구경만 하기로 했다.
1시간 남짓 걸어 다니며 사진 찍고 구경하니 충분하다.
평범한 넓은 개울이 별안간 단층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점심을 먹고 아르헨띠나 쪽으로 넘어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걸렸다.
입장료가 us $11이다.
아르헨띠나 쪽 이과수는 기차를 타고 들어가서 10여 분 이상을 걸어간다.
5시 30분이 마지막 나오는 기차 시간이라 조금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서도 충분한 구경을 못하고 악마의 숨통 근처만 보고 나왔다.
악마의 숨통이라는 별명을 얻을만하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모여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기차역에서 폭포까지 가는 길도 아름답고 자연의 경이를 맘껏 느끼려면 양쪽 모두 하루씩은 잡아야 여유로울 것 같다.
브라질 쪽 이과수 폭포로 가는 길 |
브라질 쪽 폭포 보트 투어 |
이과수 폭포 (Iguazu Falls)
이과수 폭포를 배경으로 |
아르헨티나 쪽 폭포는 기차를 타고가서 내려 다시 걷는다.
원주민 기념품 상 |
기념품 |
폭포 가는 기차 |
폭포 가는 길
이과수 폭포
“악마의 목구멍”이라고 불리는 폭포.
엄청난 수량과 깊이 대문에 모습을 제대로 촬영할 수가 없다.
관광객 |
공원 입구 근무자가 우리를 보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Korea….
두 손을 치켜들고
“대-한민국!”
발음도 좋고 운률도 맞는다.
아르헨띠나 상징 새(국조?) |
면 적 : 2,780,400 평방km.
인 구 : 4,219만 명(2012년).
수 도 : Buenos Aires.
종족구성 : 유럽계 백인 97%.
언 어 : 스페인어, 이딸리아어, Amerindian어.
종 교 : 가톨릭 92%, 개신교, 유대교.
통 화 : Peso.(1$:3.97페소)(2010년)
1인당 GDP : us$10,640(2011년)
*.아르헨띠나 略史
1516년 에스파냐의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가 상륙 후 스페인이 식민지로 경영.
1816년 7월 9일 독립.
1836년 아르헨띠나 공화국 성립.
1880년 – 1914년 유럽에 농축산물 공급 많이 증가하고 유럽계 자본 유입으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노동력이 많이 부족해 이민장려. 이딸리아, 독일, 프랑스 등.
세계 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 때 유럽에 곡물 쿠데군수물자 수출로 세계 6위의 부국에 올라감.
1946년 Juan Dongo Peron이 국가사회주의를 내걸고 집권하여 서민중심의 분배정책을 추진하였고 공업화에 실패하여 경제가 점점 어려워짐.
1955년 구테타로 실각하고 1,970년까지 군정 계속. 정국 혼란.
1982년 4월 포크랜드제도 영유권을 놓고 영국과 전쟁,
패전 후 민정이 들어서 계속되고 있다.
<*. 포클랜드 전쟁.>
포클랜드 제도(Falkland Islands)는 남미대륙 남단에서 동쪽으로 450km 정도 떨어진 남대서양상에 있는 섬으로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Islas Malvinas)라고 부린다.
아르헨티나는 이 근방을 지배했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영유권도 계승한 것으로 보아 자국민을 정착시켰으나, 1832년 영국이 자국민들이 먼저 이주해서 살고 있었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정착민을 추방하고 무력으로 점령했다.
풍부한 수자원과 근해에 매장된 석유, 또 남극대륙 전진기지로서의 가치 때문에 영국은 포클랜드를 포기하지 못했고, 아르헨티나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양국 간의 관계는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아르헨티나는 1982년 4월 2일 선전포고도 없이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침공을 강행했다.
그러자 영국은 기동부대를 파견, 75일간의 격전 끝에 아르헨티나의 항복을 받아 섬을 탈환했다.
이 전쟁으로 아르헨티나 쪽에서는 7백여 명, 영국 쪽에서는 250명이 전사했으며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몰락하게 됐다.
(서진근 편저 192 유엔 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나라 경제를 망친 페론 부부.>
아르헤티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선진국 수준에 이르는 富國이었다.
산업혁명 후 유럽 국가들의 식료품 수입이 급증하였고, 제1-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황폐해지자 아르헨티나가 유럽에 다량의 식량을 수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6년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아르헨티나의 운명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페론은 농,목축업 대신 중공업 위주의 산업화 정책을 시행했으며, 경제에 정부가 직접 간섭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철도 및 공익사업을 국유화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이를 위한 자금은 당연히 그동안 무역으로 쌓아왔던 국고에서 나갔으며, 농,목축업이 쇠퇴하자 수출도 부진해져 1946년 17억 달러에 달하던 외화보유고는 10년 동안 4억 달러 남짓으로 감소했다.
게다가 페론은 지나친 사회복지사업을 추진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국고를 바닥냈다.
1974년 페론이 죽자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아무런 지지도 받지 못하고 2년 뒤 군부에 의해 쫓겨났다. 그 뒤를 이은 정권들은 페론이 남긴 수출 감퇴와 인프레이션이라는 짐을 져야 했고, 그 해결도 쉽지 않았다.
1985년까지 대외채무는 500억 달러에 달했으며 거기에 포클랜드 전쟁의 후유증까지 겹쳐 국민경제는 파탄 직전에 몰렸다. 경제 상태는 계속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아르헨티나는 결국 2001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서진근 편저, 192 유엔 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0 Comments